소심한 사람들이
밤새 만드는 평행 우주

글을 쓸 때만큼은, 나는 '세상의 주인공'이다

by 소은성

“아이고. 마음을 솔직히 말하기까지 40분이 걸렸네요.”

“에에? 어떤 마음이요?”

“또, 또 그런다. ‘내가 주인공이고 싶다’는 마음!”

“그러고 보니! 지난주에도, 지난달에도 같은 이야기를 한 것 같네요.”


이 순간 전까지는 상담실 안에 폭소의 버블이 둥둥 떠다녔다. 이 순간 버블이 팍, 터뜨려졌다.

아주 큰소리가 났다. 아하하하하하, 아이고. 은성씨가 또!



긴장으로 바윗덩이같아진 두 발을 질질 끌고 상담실에 들어서던 때도 있었다. 몇 달이 흐른 뒤, 이제는 자주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는다. 다행히 상담선생님도 웃을 땐 제대로 크게 웃고, 어렵지 않게 농담하는 스타일이라 나와 합이 괜찮게 맞는다.


잡지 에디터 경험을 이야기하는 시간이었다. 빙빙 돌린, 본질이 아닌 이야기를 할 때면 종종 눈앞이 뿌얘진다. 취한 골뱅이 같은 눈으로, 기자 경험중에 무엇이 좋지 않았는지 짚어보았다. 기초 체력이 약해서 산 넘고 바다 넘는 여행 취재가 고단했던 것을 떠올렸다.

“취재를 마친 후 글쓰기를 시작하기 전까지 기자는 ‘비서’에 가까워요. 모든 상황의 비서에요. 하다못해 촬영지의 날씨까지 제 탓이라니까요!”


그저 글쓰기가 좋아서 시작했지만, 잡지 기자로서 '글을 잘 쓰는 것'은 너무도 디폴트라 자주 잊혀졌다. 가장 중요한 것은 촬영날의 완벽한 상황을 조직해야 하는 것이었다. 까탈스러운 사진작가들을 보조하는 것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인터뷰이의 비위를 맞추는 일도 에디터의 의무였다.


언제나 문제는 ‘하려고 들면’ 그럭저럭 잘한다는 것. (못해야 이직을 하지!) ‘유능한 에디터’의 마스크 하나 쓰면 되었다. 마스크는 갑갑했다. 새벽 출장을 나설 때마다 한 줌의 기대도 즐거움도 없었다.

“피로해서 그만 둔 건 아니에요. 제 성격상, 아무리 힘들어도 좋아하는 일이라면 어떻게든 솔루션을 찾아냈을 것 같아요. 문제는...”

이야기의 잔가지를 모두 쳐내고나서 불현듯, 정말 하고 싶은 한 마디가 튀어나오는 것은 상담이든 글쓰기든 마찬가지일까?

“제가 주인공이 아니잖아요. 조연이잖아요. 하나도 재미없었어요.”


상담사의 볼펜이 그제야 움직인다. 신이 나서 더 말했다.


“다 마치고 혼자 밤에 기사 쓸 때에는, 비로소 내가 된 것 같았어요. 물론 피로가 극에 달해서 이제 그만 쉬고 싶기도 하고, 글의 반응이 두려우니 회피하고 싶지만. ‘잘하고 싶다, 좋아하는 일이다’라는 마음은 충만했어요. 글은 내 꺼잖아요.”




진실은 언제나 주관적이다. 상담에서 에디터의 본질이 무엇인지, 글쓰기의 특성이 어떠한지는 부차적이다. 그 요소들을 내담자가 어떻게 수용하고 판단하는가가 핵심이다. 나는 왜 ‘주인공’이라는 단어를 선택했을까. 상담사의 펜끝이 쉴 새없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더욱 흥이 났다.


졸라 유명해지고 싶어요. 잘 살고 싶어요. 모두 나를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만든 것들을 보고 눈물 흘리고 감동했으면 좋겠고, 그리고 그 사실을 꼭 나에게 알려주면 좋겠어!


주인공이 되고 싶어서 부들부들하는 마음을 인정하기로 했어요. 아니, 세상에 안 그런 사람이 어딨어?


결국 성공과 유명세에 따르는 부작용이 두려운 건데, 아니 나는 부작용 겪어 본 적도 없는데 쫄보처럼 미리 걱정하는 게 우습잖아요? 원하는 것을 말하고 이루지 못하면 쪽팔리니까, 아예 인정도 안 했던 것 같아.


그런데 다들 그렇잖아요. 그 욕망을 한번 인정이라도 해보고 싶어요.

아이고! 새상 사람들아! 나는 엄청 잘되고 싶다!


도취해서 판소리를 뿜어내고 나서 헉, 하고 정신을 차린다.

“어머나. ‘졸라’라니. 미쳤나봐. 쌤, 죄송해요.”

“괜찮아. 난 이래서 은성씨가 좋더라. 하하하하하.”




글을 왜 쓸까. 백 명에게 백 개의 이유가 있다. 그리고 그 백개의 이유는 또 백개로 잘게 쪼개진다. 요즘의 내 이유는 ‘글을 쓸 때만큼은 내가 조연이 아니라서’다.


글을 쓸 때 우리는 철저히 나의 관점에서 세계를 재구성한다. 기존의 세계는 내 시선에서 조각조각 해체되어 내 손끝이 가는 방향에 따라 다시 새롭게 만들어진다.


이와 관련해 외울 정도로 좋아하는 글귀가 있다. 나를 글쓰기의 세계로 몰아넣은 김혜리 기자의 <똑바로 살아라> <거침없이 하이킥> 김병욱 감독에 대한 인상평이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소심한 사람들의 괴력을 눈치채게 되었다. 대범한 사람들이 세계를 들썩들썩 움직이는 동안 소심한 사람들은 주섬주섬 세상을 해석한다. 살아남기 위해 예민해질 도리밖에 없는 초식동물처럼 그들은 누가 힘을 가졌는지 계절이 언제끔 변하는지 민첩하고 정확하게 읽어낸다.


미미한 자극에 큰 충격을 받고 사소한 현상에 노심초사하는 그들의 인생은 남보다 느리게 흐른다. 타고난 관찰자이며 기록자인 그들의 소극적 복수는 ‘이야기’다.


그들은 더디게 살기 때문에 삶을 사는 동시에 재구성한다. 목소리 큰 당신이 휘어잡았다고 생각하는 어젯밤 술자리에서 벽지처럼 있는 듯 없는 듯 듣기만 하는 동료가 있었던가.

그가 잠들기 전 떠올린 스토리 속에서 당신은 놀림감이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세계의 평형을 유지하는 매커니즘 중 하나라고 판명돼도 나는 놀라지 않을 것이다.”



이 문장들은 내가 왜 글을 쓰는가에 대한 100퍼센트의 정답 같았다. 부글부글 끓는 속을 가라앉히고 잠자리에 들지만 다음날 새벽이면 분노는 다시 끓어오른다. 나에게 모욕감을 준 사람은 내 한글 파일 속에서 ‘캐릭터’가 된다. 그의 성격은 우스꽝스러워지고 외모의 단점이 부각된다. 소심한 복수를 하면서 비실비실 웃고 있어도, 누구도 놀리지 않는다. 날씨도 조명도 스케줄 세팅도 무관한, 온전한 상상력의 세계. 커피 한 잔과 초콜릿 몇 조각이면 되는 심플함도 더없이 완벽하다.


글쓰기 수업 중 쓰여진 학생들의 문장을 다시 본다. 이때는 보다 적극적으로 아이템을 준다.


짜증났던, 난감했던, 답답했던, 지루했던, 힘들었던 대화를 떠올리게 한 뒤, 그 상황에서 내가 미처 하지 못한 말을 넣어 대화를 완결해 보라고 한다. 강의실은 키보드를 부술듯한 타자 소리로 축제분위기가 된다. 이 사례들은 묶어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고 싶을 정도로, 유쾌하다.


전세계 여성들의 사례를 모으면 어떨까 싶다. 그건 실제 지구와 다른 또 하나의 평행우주가 될 것이다.


-몇 개월 동안 돈을 모아 너무도 좋아하는 화가 반고흐가 머물렀던 프랑스 아를을 찾았을 때. 나를 반겨준 것은 초로의 농부가 던진 ‘니하오!’와 혀를 날름거리는 캣콜링이었다. 기대를 처참히 부수고 여행자의 설렘을 순식간에 부숴버린 그의 행동.

내가 하고 싶은 말: “구텐탁! 너는 독일인이지?”(가운뎃 손가락을 치켜듦)


-외고모할머니: 너는 꿈이 뭐냐?

(8살의 나): 저는 인테리어 디자이너 될 거예요.

외고모할머니: 그거 되기 어려운 거야. 이런 집에 살면서 무슨!

나: 어렵거나 말거나 인테리어 디자이너 꼭 되고 말 거에요. 두고 보세요. 어린 애에게 무슨 그렇게 상처되는 말을 하세요? 이렇게 못사는 집 뭐 얻어먹을 거 있다고 왔어요? 다시는 오지 마요.

외고모할머니: (어안이 벙벙) 어머머...어린 게 되바라져가지고 말을...

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엄마! 아빠! 이리 와봐. 이 할머니가 나한테 꿈이 뭐냐고 묻더니 이런집에 사는 애는 그거 못된다고 창피 줬어.


상사, 친구, 시가 식구...등장인물들은 다양하다. 쓰다보면 깨닫게 된다. 할 말이 없어서 조용히 있었던 게 아니라는 것을. 권력이 상대에게 있었기 때문에 하지 않은 말이 얼마나 쌓여 있는지. 내가 재구성한 이야기의 세계에서 나의 결정적 한마디로 인해 나는, 주인공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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