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텐션 글쓰기

맛있는 것을 잔뜩 먹고 키득거리며 글을 쓸 거야

by 소은성

“혹시 차 가져오셨나요?”

혜민씨가 불쑥 묻자 오늘 처음 수업에 온 수현씨가 놀라 고개를 저었다.

“잘됐다. 전철역까지 함께 가요. 글쓰기 수업 마치면 하이텐션이라, 모두 다함께 이야기하며 가야 되거든요!”

지난 학기 수강생 인경 씨의 이야기가 오버랩됐다.

“수업 마치고 ‘코노’ 들렀다 갔어요. 도무지 그냥 집에 못 가겠어서요.”

하이텐션의 이유를 물었다.

“바깥 세상에서 하면 안 되는 말 쏟아놓으니까 시원해서요.”

해야 하는 말, 안전한 말, 돈벌기에 필요한 말을 잔뜩 하면서 얻은 피로가 사라진 얼굴들. 밤 10시에 이렇게 눈빛들이 할로겐 전등같다.



잘 표현된 감정은 인간을 해방시킨다. 환멸과 분노, 권태 같은 부정적 감정들이 언어의 옷을 입고 반듯하고 놓여진다. 제 자리에 수납된다. 그러면 본연의 웃음을 회복할 수 있게 된다. 이게 그들이 말한 하이텐션일 것이다.


어린이들은 ‘하이텐션’을 가지고 태어난다. 내게도 있었다. 과묵한 모범생으로 유년기의 나를 기억했었지만, 엄마가 말했다. “다섯 살 때까지는 동네 할매들 앞에서 유치원에서 배운 춤추고 그랬어.”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과거다. 다만 내가 그 하이텐션을 끈 순간은 기억한다.


초등학교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재미있는 세상이었다. 신주머니를 흔들며 현관문을 열자마자 나는 빨간 머리 앤의 광기 넘치는 수다를 떨 수 있었다. 종일 느낀 다채로운 감정과 감각을 엄마에게 고스란히 전하고 싶었다. 엄마, 세상이 원래 이토록 아름다워요? 매일 매일이 설레서 죽을 것 같아!


말하기의 흥분을 아무렇게나 즐기고 싶었다. 설렘이 아니라 뻐근한 슬픔을 느낄 때도 나는 수다스러웠다. 나를 따라온 어린 강아지에게 어떤 이야기가 있을지 상상한 것을, 병아리를 파는 할머니를 보고 괜히 눈물이 났는데 그게 내가 이상한 아이여선지 아니면 어른에게 그런 감정을 느껴도 혼나지 않는 것인지를. 학교 담장벽을 손톱으로 그으며 걷는 더러운 소년에게 말을 걸어도 되는지를, 아니면 돕고 싶은 마음이 위험한 것인지를, 강아지와 할머니와 소년을 볼 때 심장 부근이 아픈 것은 내가 좋은 아이여서인지를, 아니면 이상한 아이여서인지를. 아무 것도 아닌 이야기를 끝도 없이 말하고 싶었다.


사랑은 자주 불운이 된다. 사랑이 많은데다 생각마저 많으면 불운 덩어리는 점점 더 크게 굴러간다. 엄마를 사랑했다. 그래서 슬픈 얼굴의 엄마를 웃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말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가정은 불행했고 불행한 가정의 멤버로서 지나치게 즐거워선 안 될 것 같았다. 슬픈 얼굴의 엄마를 위해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표정으로, 잘한일, 칭찬받을 만한 일, 엄마를 자랑스럽게 만들 만한 일만 이야기하고 입을 닫았다. 걱정과 슬픔, 분노와 불만, 불평, 비웃음 등은 철저히 감추었다. 나는 칭찬받는 장녀였다. 점집 할아버지는 내 사주를 보고 “애 안에 영감이 들었네.”라고 했다. 어른스러워서 걱정할 일 없겠다며 모두 엄마를 부러워했다. 엄마는 그게 칭찬인 줄 알았다. 저주인 줄 모르고.


그 모든 것이 지긋지긋해서 이제 나는 즐겁게 살기로 결정했다.

내게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야망하지 않기로 했다.



곤란했다. 글쓰기는 왜 고통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까. 작가에 관한 오랜 스테레오 타입 이미지를 신체화하면 찌푸린 이맛살과 병약한 몸이다. 구겨진 원고지 안에 갇힌 괴로운 영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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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만에. 나는 맛있는 것을 많이 먹고 키득거리며 쓰기로 결정했다. 글쓰기로 부귀영화를 누리거나 멋쟁이로 추앙받거나 명예를 높여 ‘선생님’이 되는 길을 철저히 포기한 후에 거머쥔 기쁨이다. 비밀스럽게 열어보는 아름다움이다.

글쓰기=일=돈인 인생을 살아왔다. 아등바등하던 시절이 나를 먹여 살렸으나 글쓰기의 기쁨을 차차 지워버렸다. 기자 시절, 밤새 2시간마다 알람을 맞추고서 자다 깨다 하며 죄책감을 느낀 밤이 있었다. 사랑하는 일이므로 잘 쓰고 싶기도 했고 지긋지긋해진 일이어서 더 이상 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어정쩡한 인간이므로, 결국에 마감을 하긴 했지만.


기자 인생의 결과가 나쁘지는 않았으나 다시 그 ‘과정’을 겪고 싶지 않아졌다는 게 문제다. 뼈 깎아 번 돈, 내 한 몸 바쳐 얻은 자식, 내가 출세시킨 남편, 며느리 도리 잘해서 얻은 시댁의 보답 같은 것처럼 결과가 아름답더라도 과정이 고통스러운 일을 내가 하지 않는 것처럼, 글쓰기도 우선 과정이 아름다웠으면 했다.


실없이 웃던가 혹은 울면서 마음을 순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글 작업을 즐기고 있다.

물론 이러한 결심이 비장하든 아니든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첫 에세이집을 완성하면서 간직한 하나의 자랑은 ‘써야 해서’ ‘인기있을 듯 해서’ 쓴 글은 단 한 편도 없다는 사실이다. 쓰지 않으면 못 살겠는 것만 골라 썼다. 그러므로 쓰는 동안 황홀했다. 물론 쓰는 중간에 민망함이나 부끄러움, 육체적 고통이 몰려올 수는 있지만 그래서 글쓰기가 싫으냐고 묻는다면 고개를 저을 것이다. 춤을 오래 추면 발바닥이 아프고 마라톤을 하면 허벅지가 쓰리지. 그래도 댄스 슈즈와 러닝화에 또 발을 꿰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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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책을 쓰고 있으나 ‘팔릴 만한 글을 쓰자’는 야심이 생기면 이내 바퀴벌레 죽이듯 꾹 눌러 없애버린다. 인기와 부, 명예를 얻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상상과 창의는 수그러든다. 기가 막힌 소재를 발견했다가 ‘이건 안 팔릴 테니까 쓰지 말자’는 생각이 드는 순간 화가 치솟는다. “돈도 안 되는데 즐겁지도 못해야겠어?” 범상하게 중얼댄다.


정세랑 작가님이 “문단은 돈이 없는데 품격까지 잃으면 큰일”이란 요지의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데, 글쓰기도 그렇다. 쓰기의 찬란한 기쁨이 사라진다면, 아무 의미가 없다. 관심 없는 주제로 책을 쓰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하루 내내 쓰기 노동을 해도 노동의 댓가는 0의 수렴한다. 그 과정을 이기게 해 줄 것은 기쁨, 뿐이다.


(“회사 갈 때는 맨 얼굴로 가. 싫은 데 가는데 파운데이션도 아깝다.”는 말을 듣고 한참 웃엇다. 나도 그러니까. 돈 때문에 글을 쓸 때는 음원사이트에서 ‘일 잘되는 음악’ 아무거나 찾아 듣는다. 내 이야기를 쓸 때는 엄선한 플레이 리스트를 튼다. 가장 소중한 순간이니까)


한 번도 배운 일 없이, 어린 아이들이 대사를 지어 만들어내는 연극 놀이 같았으면 한다. 자연스러운 창의였으면 한다. 내면에서 폭발하는 무엇이면 한다. 힙합에 심취해 버스를 기다리는 찰나도 참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랩을 하는 이상한 중학생처럼 글쓰고 싶다. 대화를 나누는 내내 허벅지에 드럼스틱을 두드리던, 직장인 밴드가 뭐라고 그것에 미쳤던 내 친구 같았으면 한다.


쥐어짜는 글은 더 이상 쓰고 싶지 않다.

터져 나오는 글만 쓰고 싶다.

글쓰기의 소명이란 “그저 살기만 할 수는 없어서” 쓰는 것 뿐이다.



글을 쓰지 않을 때는 불만이 쌓여간다. 우울하고 답답해진다. 내가 한국어를 알았던가 가물거린다. 쓰기 시작하면 나는 다른 세계를 하나 만든다. 나조차 온전히 파악하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세계를 하나 쌓아간다. 일종의 이중생활이다. 나는 드디어 나 자신의 몸으로부터 벗어난 기분이 든다. 자유로움이다.

이때 현실의 삶은 약간 모호한 색채를 띈다. 현실이 중요하고 글이 부수적이라고 누가 말하나. 내가 누구의 딸이며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성격의 사람인지 완전히 잊어버린다. 내가 글 속에 몰입해 있는 동안, 남편이 아플 것 같고 집안 살림이 엉망이 될 것 같다. 그래도 계속 쓴다. 밀고 나간다. 그러면 안 좋은 일이 모두 사라질 것 같은 기분으로 바뀐다.


쓰는 동안의 극도의 흥분상태. 배도 고프지 않고 카카오톡 메세지에 반응하기도 귀찮고 잃어버린 사랑도 이제는 괜찮고 내가 누구인지도 모르겠고 내가 누구라도 상관이 없는 그런 상태. 글 속에 등장한 ‘나’와 사랑에 빠지는 그런 망상. 온전히 그 세계 안에서 유영하고 싶다. 그렇게 극도의 흥분 상태를 맛보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매일 일기를 쓰게 된다. 글을 쓰는 몸이 된다. 자다가 일어나 쓰게 된다.


글쓰는 순간 나의 외모와 경제력, 성격 등의 사소한 문제는 사라져 버린다. 내가, 사라진다. 그 순간의 황홀함은 저울에 재어 타인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다. 그런 것을 우리는 ‘아름다움’이라 부른다. 너의 사랑과 나의 사랑의 무게를 비교할 수는 없듯이. 그래서, 그 세계를 최대한 사랑하기 위해 나는 세상의 규칙을 어기려 노력한다. 표준 문법에 어긋난대도 내가 쓰고 싶은 표현이면 써버린다. 나는 언어의 창조자다. (물론 이 자신감은 매일 밤 자기 전에 떠올랐다 오전에 책상에 앉으면 수그러든다. “그래도 될까...?”)


아무도 나를 해치지 못한다. 나에 대해 누가 헛소리를 하건 상관없다.

한국에서의 개인으로서의 나는 이 벽 안으로 넘어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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