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에게 '표현력'이 가장 중요하다는 오해에 대하여

표현력만 좋다면 평생 인스타그램 작가로만 살면 된다

by 소은성

나는 멋진 표현에 집착하는 스타일이었다

정리와 계획을 싫어하는 성격이다. 냅다 지르는 걸 좋아한다. 연애도 그렇게 시작했고 퇴사도 그렇게 했다. 누가 좋으면 당장 손잡고 회사가 괴로우면 사표 내고 1주일 후 짐싸서 나오는 스타일.


글도 그렇게 '냅다' 썼었다. 그래도 잘 썼다는 말을 들었다. 야호! 적어도, A4 1장 짜리 글을 쓸 때는...그랬었다. 글 분량이 짧으니 소재도 하나 주제도 하나면 되었다. 비교적 표현력이 좋은 타입이라 내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슬슬 생겨났다.


00씨 글은 한큐에 읽어내려가는 맛이 있네요. 톡톡 튀는 표현이 좋네요.그 말에 중독성이 있었다. 한큐에 쓸 수 있는 글이니까, 그랬지! 돌아보니 나는, 눈에 띄는 표현에 연연하는 초보였다. (걸그룹, 보이그룹을 생각하면 쉽다. 한 파트를 끝내주게 부를 수 있다고 해서 당장 솔로 앨범을 낼 수 있는 건 아냐!) 물론 좋은 표현이 눈에 띄면 얼핏 보기에 글 잘쓰는 사람으로 보인다. (인스타그램에 멋진 표현을 한 줄 써 보라. '글 잘쓴다'는 댓글이 달릴 것이다)


위기는 곧 찾아왔다. 내 글은 표현이 독특하고 참신해서 클라이언트의 눈에 띄기 시작했다. 생초보 필자인데 자꾸만 중견이 쓸 수준의 일감이 들어왔다. 자료와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해서 에이포3장 짜리 기사를 쓸 일이 생겼다. 머리가 멍해졌다. 6장을 써야 할 땐, 아예 손을 놓았다. 머리속이 잔뜩 뒤엉킨 채로 딴짓을 했다. 한 줄도 씌어지지 않은 새하얀 워드파일을 앞에 두고 울고 싶어졌다. 이를 어쩌나. 나는 망했네


용기를 내어 '냅다' 쓰기 시작했다. 문장 몇 개 조금 쓰고 자료를 찾고 하기를 반복하자, 동력이 떨어졌다. “내가 지금 뭔 소리를 늘어놓고 있는 건지...” 필자가 원고를 장악하지 못하고 정보 속에서 허둥거린다는 게 바로 그런 거였다.


돌아보니 고교시절 논술 시험을 볼 때도 아우트라인 짜기를 싫어했다. 서-본-결 라인을 짜라는 논술강사의 잔소리에도 콧방귀를 뀌었다. 그래도 제법 잘 썼으니까 그래도 되는 줄 알았지. 세세히 계획을 짜다 보면 나의 영감과 멋진 표현이 사라질 것 같아서.






제대로 한 사람과 연애를 시작하면 설렘과 짜릿함이 모두 사라질까봐,

까만 밤에만 데이트를 하는 남자를 본 적이 있다.

"귀찮지만 찬찬히 데이트 계획도 세우고!

햇살 창창할 때 공원도 가고!

기대보다 지루한 시간도 함께 견디고, 사람이 그래야지! 그래야 진짜 사랑을 하지!" 하고 역정을 냈었지

지나친 비유일지도 모르겠지만, 한때는 그만큼 두려워했다. 진득하게 계획을 세우는 것을.





계획과 결과가 다를지라도, 그것이 인생

돌아보니 정말 바보같은 망상이었다. 살아보니, 인생에도 글에도 계획이 필요하다. 밑그림을 그려야 한다. 보다 정확하고 체계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 뻔한 표현이지만, 집을 지을 때 설계도가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결과는 그 아우트라인과 아주 다를 때도 많다. 그래도 필요하다.


물론 완성된 결과물은 애초의 계획과 아주 다를 것이다. 여행도 그렇지 않은가. 항공권을 사두고 머릿속에 내내 그린 여행의 모양과 실제 여행은 굉장히 다르다. 걷는 중에 낯선이를 만나 친구가 되는 일은 내 계획에 없던 일이다. 비행기가 연착되는 일도, 공항바닥에 주저앉아 기다리다가 기막힌 글감을 떠올리는 일도 예상치 못한 일이다. 그런 우연과 찰나가 모여 멋진 인생이 된다. 글도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항공권과 도착한 첫날의 숙소 예약과 대략의 방향은 필요하니까


개요표를 만들자. 중구난방 흘러가는 글을 매끈하게 쓰는, 기초 중 기초다. 개요표라는 말에 겁먹지는 말자. 개요의 스타일은 각양각색이다. 자신에게 잘 맞는 방식을 찾으면 된다.


이면지에 연필로 낙서를 하듯 메모하는 작가도 있다. 원고 파일과 별개로 아웃라인 파일을 따로 만드는 '성실형' 작가도 있다. 내 경우, 글의 종류에 따라 다르다. 나는 사보, 잡지 기자로 오래 일했다. 사적인 에세이는 단번에 써버리지만 기획 기사는 그럴 수가 없다. 인터뷰 녹취록, 여러 군데서 모은 자료, 책에서 수집한 글귀 등 다종다양한 종류의 텍스트를 잘 조합해야 하니까.


보통은 이렇다. 우선 한글, 워드 등 자주 쓰는 문서 프로그램을 연다. 개요표를 만들기 전에 모은 자료를 하나의 한글파일에 복사해 모조리 붙여넣는 게 나의 오랜 버릇이다. (어쨌든...다량의 텍스트가 내 눈앞에 있어야 마음이 편한 '불안형' 작가다)


글을 쓸 때 여러 파일을 오갈 필요없이 하나만 열면 찾을 수 있도록 한다. 특히나 자료가 어려워서 머리에 원고의 틀이 세워지지 않을 때는 그저 자료를 나의 문장 스타일로 리라이팅해보기도 한다. 이게 아주 효과적이다.


학부 시절 과1등 친구에게 넌 비결이 뭐냐 물으니 이렇게 답하더라. '별거 없어. 수업 때 받아적은 노트를 다시 한번 적어보며 내 스타일로 정리해 봐' 수업 내용을 필기하거나 참고서의 내용을 내 스타일로 노트 필기해 보듯 하는 것. 그저 읽어 볼 때와 다르게 집중력이 몇 배로 높아져, 난해해 보이던 자료도 금세 이해하고 소화하게 된다는 거였다.







글이 완성되기 전까지 계속 불안해요? 한 장에 몰아넣으세요

나는 해당 자료를 붙여넣은 한글 파일, 맨 위에 곧바로 개요표를 만드는 스타일이다. “내가 내 기사의 담당 에디터”라는 마음으로 원고 발주를 한다고 할까. 매체의 편집자라고 생각하고, 외부 필자에게 의뢰 메일을 보낸다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어떤 내용을 꼭 넣어야 할지, 원고의 톤은 어때야 할지, 마무리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써 본다. 인간은 남에게 시킬 때, 더 잘한다. 내가 나의 에디터라면 얼마나 요구할 수 있을지 고심하면서 나라는 작가에 대해 객관화가 된달까.


그리고 나서 한글 창을 4-6개 공간으로 나눈다. 표, 번호 매기기 등 원하는대로 하면 된다. 테마 하나당 번호를 매기고 원고 분량(예: 000선수의 수상경력 소개/2매) 각 단락에 무엇을 넣을지 ‘거칠게’ ‘아무렇게나’ 써 넣는다. 그런 다음 본문으로 만들어 나간다. 개요에 살을 붙이다 보면 어느새 정리된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세세한 표현은 나중에 고치면 된다고 자신을 다독이는 것!


초고를 단숨에 파이팅 넘치게 써야 해. 멈추면 안돼!


막막하다가도 한 테마에 집중해 원고지 3매만 쓰는 식으로, 당장 눈에 보이는 것에만 집중해서 써내려 가자는 이야기다. 초고를 뽑은 후에, 각 파트에 자연스럽게 이음새를 붙이면 자연스러워진다.



2박 3일 취재를 가면서 개요표 공포를 극복했다네

장기 취재를 가게 되면 더 복잡해질 줄 알았다. 반대였다. 워낙 촬영 스폿과 챙길 아이템이 많다보니 몇장의아웃라인을 만들어 프린트해 들고 갔다. 촬영을 다녀와서는 그 아웃라인을 바탕으로 글을 쓰면 되었다. 글 구성의 복잡성이 오히려 글을 탄탄하게 만든 것. 정보를 놓치지 않고 짜임새 있는 취재, 촬영, 원고 작성을 한번에 할 수 있었다.


잘 정리된 아웃라인은 필자의 마인드에 도움을 준다. 글 쓸 때의 집중력을 최고로 끌어올린다. 눈앞의 것에만 성실해지게 하니까. 멋진 첫문장에만 골몰하는 습관도 치유해 준다. 일단, 개요표대로 무심하게 쓰고요. 멋쟁이 문장은 나중에 찾아내도 된다. 그저 써내려가는 와중에 빛나는 문장도 절로 떠오를 것이다.



천만에! 그토록 멋진 표현이라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글로 쓰지 않았다고, 없는 문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정직하고 진실되고 내 마음에 솔직한, 진짜 문장은 어떻게든 어디서든 비어져 나온다.








매일매일 글쓰기를 고민합니다.

https://blog.naver.com/purplewater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