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와 가면증후군 환자 재활기
이건 비밀인데, 쓰기 모임을 마칠 때마다 침울해지곤 했다. 나의 이야기를 쓰고 모두와 함께 읽을 때마다 그랬다. 내가 ‘다들 이제 썩 꺼져 버렸으면 좋겠군’ 생각하든말든, 마루에는 무심한 활기가 넘실거렸다. 에어로빅이 끝났는데 부침개를 나눠 먹는 사람들처럼 말야. 집에들을 안 가고들 말이야. 현관문 근처에서 떠드는 사람들을 보며 물티슈로 책상을 박박 닦곤 했다.
대체 왜 그 아름다운 일을 끝낸 후 문을 닫고 싶어졌는지. 이유를 이제 안다. 오래된 수치심과 완벽주의.
나는 그룹 안에 들어가면 어쩔 줄을 몰랐다. 10명이 모이면 9명보다는 잘 해내야 할 것 같은, 그런 마음은 너무도 징그러워서 바라보기도 고통스러웠다. 잘하고 싶은 일을 타인들과 함께 할 때면, 자아에 따개비처럼 붙어서 무럭무럭 자라난 나르시시즘, 경쟁심, 우등생 증후군, 비교의식 같은 것들이 폭죽처럼 내내 터지는 것이다. (정말로 싫어하지만 그 부분이 나를 살아남게 했기에, 따로 떼어 죽일 수는 없다)
쓰기 모임엔 언제나 칭찬이 젖과 꿀처럼 흘렀다. 달고 부드러운 것들을 실컷 마셨는데, 어럽쇼. 또 하나의 증후군이 고개를 내밀었다. 가면 증후군. 자신의 성취를 모두 가짜로 믿고 언젠가 사람들이 자신이 가짜인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그러니까 행운의 요정이 길을 잃어 잠시 내려앉았고 곧 날아가 버릴 거라고 장황하게 변명하게 되는 이 증후군은 굉장히 지랄맞다. 성취가 높아질수록 더 드세진다.
그러니까, 열심히 살면 살수록 이 증후군에 물을 주는 것이 된다. 빌어먹을. 뭐 이딴 게 있죠? 살란 거야 죽으란 거야.
아, 증후군 콜렉터.
나아졌다. 둔해졌다는 게 맞겠다. 증후군 콜렉터도 하루 이틀이지, 젖과 꿀 칭찬의 힘을 이겨내지는 못했다. 제대로 된 칭찬 한번 못 듣고 자란 우리들은 스스로를 재양육했다. 누가 나를 잘못 키웠으면, 고꾸라져 죽을 거예요? 스스로를 다시 키우는 건 꽤 재미있는 일이다. (물론 고달프고)
칭찬을 들으면 덩실덩실 어깨춤으로 승화하곤 했다. “책 언제 나와요. 저 여행 갈 때 가져가야 한단 말이에요.” 다감과 나직이 사람이 된 것 같은 혜에겐 호언장담 했다. “걱정을 마. 내가 은근히 마감 잘 맞춰.” 거짓말이지만, 흥겨운데 뭐 어때.
아, 혜가 정말 내 글을 좋아해 줘서 고마웠다. “키야, 오늘은 글이 김은성, 김은성 하네.” 사장님, 오늘 찌개 국물 진국이네요, 같은 구성진 그 칭찬이 외할머니 쓰다듬 같았다. 받아들여진다는 것. 내가 만든 것이(=내가) 굉장히 우습고 이상할지 모른다는 미지의 공포를 품고 살다가, 멤버들이 내 이야기에 키득거리거나 폭소를 터뜨리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
아파서 쓰다 만 날에 병약한 자신을 비난하려 할 때, 누군가 '아프다면서 나보다 많이 썼네!' 놀렸다. 우울해서 눈앞이 뿌얘지도록 두서없이 쓴 날에는, 꼭 한 명이 그 멜랑콜리를 좋아해줬다. 누굴 욕한 날에는 다같이 욕해줬다. 마늘처럼 찧고 빻아줬다. 너무 너무 너무 좋았다.
태어나서 한번도, 조건적이지 않은 지지를 받아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닫고 많이 슬펐다. 성적이 좋아야 칭찬받았다. 원고료를 받으며 글을 쓸 땐 칭찬도 불편했다. 다음에 이만큼 못 쓰면 어쩌지.
다른 사람의 초고를 보는 건 마법 같았다. 야, 이렇게 쓰다 말아도 되네. 그럼, 나중에 다 고칠 거니까. 초고를 하도 보다 보니, 잘쓴 글과 못쓴 글이라는 분류에 관심이 없어졌다. 차이의 발견이 우열의 자리를 대신했다. 10명의 글에는 10명의 각기 다른 삶이 오롯했다. 사람은 모두 다르다, 그 다름이 신기하고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셀룰라이트가 보이건 수술자국이 있건 온몸이 주근깨로 덮여있건, 바다니까 당연히 비키니를 입은 여자들이 눕고 헤엄치고 브라를 풀고 태양빛을 흡수하는 광경을 보았던 바닷가가 떠올랐다. 몸처럼 글도 다 다르고, 꼭 아름다울 필요도 없다는 것.
글이 소통의 수단이고 자아의 표현이라면, 자신이 바라는 방향과 정도에 맞는 정도면 되는 것 아닌가 싶었다. 너무 탁월할 필요가 있나, 당 떨어지게. 신선로를 끓이고 싶으면 시간과 정성을 많이 들이는 거고, 쌀밥에 달걀 올려 간장 뿌려먹는 식사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 정도면 되는 거지. 접배평자를 숙달시켜 마포구 수영대회에 나가려면 나가고, 고개 내밀고 호숫가 구경하며 떠 있고 싶으면 개헤엄만 칠 줄 알면 되는 것 아닌가, 하고.
보노보노와 너부리처럼 느긋해졌다.
쓰기 모임에서 ‘이왕 할 거면 잘해야지’ 강박을 버린 경험은 '그냥 해 버리는' 습관에 도움이 됐다. 오늘은 좀 못하지 뭐. 요가도 수영도 상담도 갔다. (아, 심리상담도 자꾸 말을 조리있게 잘하려고 해서 상담사에게 지적을 받았었다) 모두가 전전긍긍하고 모두가 고독하고 모두가 자기가 빚어낸 것을 보일 때 조마조마해한다.예술을 사랑해버린 이상 완벽하게 평온해질 날은 숨을 그만 쉴 때 정도일 것이다.
그런 상태로 그냥 계속 살아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