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상하게 비행기보다 기차가 좋더라. 파리에서 툴루즈까지 기차로 가면 오래 걸려?"
코로나가 물러가는대로 엄마의 프랑스행 항공권을 사기로 약속했다.
달 여행이 일반화되면 너는 갈래?
남북이 통일되면 가장 먼저 어디에 가보고 싶어? 아니면 한 동네에 살아보고도 싶어? 북한 친구 사귀어 보고 싶니?
죽은 뒤의 세상이 있다면 그게 뭐이길 바래?
연인들과 늘 나누었던 허무맹랑한 대화를 시작한 기분이 들어 씁쓸하고도 로맨틱한 기분에 휩싸여서 그럴 때 늘 하듯 호기롭게 계획을 외쳤다. "에펠탑 보러가자. 센강에서 유람선 타고 강가에서 와인도 마시자. 루브르도 갈테니 발편한 신발 사서 길들여 놓아!"
나는 에펠탑을 보러간 적도 없고 펍에서의 거나한 음주 후 센강에서는 입가에 매운 소스를 묻히며 터키 케밥이나 우걱대었고 무더위에 줄이 기가 막히도록 길어서 루브르는 가뿐하게 패스했었다. "엄마와 가려고 그곳들 하나도 안 갔어!" 엄마 때문에 그런 건 아니지만.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너랑 가고 싶어 그런 거라고' 거짓말한다. 꾸준히 이야기를 지어내 들려준다. 여행에서도 멈추지 않는 늦잠 습관과 여행 계획 실컷 짜고 다 날려버리기 등의 악습관은 이야기꾼의 훌륭한 자산이야, 라고 또 이야기를 꾸며대지.
엄마나 큰 이모와는 코로나에 대해 언제나 '물러가다'라는 동사를 쓰게 된다. 그럴 때면 코로나라는 것이 전국민을 감옥에 몰아넣은 거대한 악이 아니라 빗자루로 쓸면 시시하게 물러가는 잡귀라도 된 것 같아서일까. 떡 하고 술 빚고 무당 불러 굿 한 판 하면 썩 물러가버릴 가벼운 잡귀.
엄마는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들에는 항상 똑같은 수식어를 붙인다. '이상하게'
나는 이상하게 카푸치노가 좋더라.
나는 이상하게 7번방의 기적 같은 영화는 싫더라.
나는 이상하게 아저씨들 잘난 척 하는 게 싫더라.
나는 이상하게 너희들이 애 안 낳고 산대도 그다지 슬프지가 않더라.
나는 이상하게 책 읽고 글쓰는 게 좋더라.
나는 이상하게 젊은 애들 이야기가 더 재밌더라.
아줌마도 아니고 할머니가 참 이상하지. 진짜 이상하지. 그렇지?
'50년대생 한국 주부' 의 얇고 납작한 보편의 선을 조금 넘은 취향을 타인에게 드러내는 일을 머쓱해하면서도 '집요하다'랄 정도로 반복해서 엄마는 말해왔다. 시모에 의해 결혼하고 몇 년을 거의 '외출금지' 상태로 보낸 엄마는 여고시절 친구를 모두 잃었고 동네 학부모 모임은 있어도 자신의 자아에 대한 속마음을 터놓을 대상이 없었고, 그건 장녀인 내가 가장 많이 들었다. 순하고 의젓한 모범생 딸이었던 십대 때는 매일 밤 다정하게 들어주면서 속으로는 진저리를 쳤다. 백번은 들은 지긋지긋한 이야기...나한테 엄마 취향 좀 그만 이야기해! 친구한테 말해! 내가 엄마 말 들어주는 기계야? 왜 내 취향은 안 물어봐? 물어볼 때까지 절대로 말하지 않을 거지만! 그러다 이십대에는 가끔 발악하듯 교정해 주었다. 촌스럽게 이상하다는 말 좀 하지마! 그게 뭐가 이상해? 엄청 평범해! 뭐 대단한 취향도 아니고 말야.
싸움은 관계를 더 나은 것으로 변화시킨다. 엄마 집에서 나와 심리상담을 받으면서 2년 정도 엄마와 일주일에 한번씩 싸웠다. 바닥을 닥닥 긁은 더러움을 엄마 눈에 흔들면서 악을 썼다. 나한테 진지하게 사과해. 사과를 요청하고 사과를 받고, 또 사과를 받고 싶은 게 떠올라 또 사과를 받고. 사과의 사과의 사과의 나날을 보내자 나는 오랫동안 꿈꿔온 일을, 그렇지만 충동처럼 문득 시작할 수 있었다.
엄마, 나에게 글쓰기 배울래?
엄마의 '잘못된' 양육 덕분에 나는 듣는 일을 정말 잘하는 사람이 되어 살고 있다. 양육의 힘은 무서워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고 듣는 걸 직업으로 삼게 되었어. 엄마의 양육이 좀 잘못된 것이었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성장한 내가 잘못된 건 아니란 사실도 알았어. 엄마의 양육이 잘못된 것이었더라도 엄마의 존재가 잘못된 것도 아니야. 우리는 살아 남았잖아! 생존했잖아!
그렇다면 삶을 이어가자. 우리의 역사를 부정하거나 그것과 단절되지는 말고, 그대로 이어가자.
다시 한번 제대로 해 보지 않을래? 우리의 과거를 다시 살아보지 않을래? 이번엔 진짜 멋있게. 아름답게.
*
수업이 시작되면 마법도 시작된다. 선생이 되자 나는 이제 엄마의 반복되는 말버릇이 밉지 않았다. 나의 글쓰기 교실에 찾아온 조그만 여자 아이의 물결같은 고백에 귀를 기울인다. 중요한 요소는 조용히 메모하고 미래의 계획으로 만든다. 초여름의 파리 노천 카페에서 카푸치노를 마시자. "꺄푸치노 씰부쁠레. 어렵지 않지? 그렇게 다섯 번 반복하고 그 기세로 웨이터에게 말하면 돼. 언어는 기세야, 엄마." 엄마는 그대로 할 것이다.
카페인의 기세를 품고 소규모 극장에도 가 보는 거야. 베레를 갸웃하게 쓴 코가 길고 미소가 근사한 남자와 눈가의 주름을 아무렇게나 드러내고 빗지 않은 머리칼을 손가락 틈 사이에 넣어 시원한 바람을 넣곤 하는 여자가 연인으로 등장하는 프랑스어 영화를 함께 보자. 어머, 나는 이상하게 수전 서랜든이 좋더라. 그 여자가 누군지 내 주변에 아무도 몰라. 늙어도 멋있고 근사한 여자인데. 저 배우가 수잔 서랜든이지? 프랑스 여배우는 난데없이 미국인이 되어버리고 하지만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다.
영화의 막이 오르면 엄마는 코를 골아대며 여행의 피로를 풀어도 좋겠고 실컷 자고 난 뒤에 코를 드르릉 하며 일어나서는 고개를 빼고 사람들을 볼 것이다. 여러 종류의 사람 관찰하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엄마는 극장에서 프랑스 사람들은 무엇을 먹는지 또는 먹지 않는지 어떤 부분에서 웃는지 우는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일어서는지 아니면 여운을 즐기며 '느려터지게' 앉아있는지 관찰하고 또 나에게 수다를 떨 것이다.
어서 이 병이 물러가야 우리 딸을 보러가지.
비행기 타는 거 안 무서워 엄마?
이상하게 나는 무섭지는 않아. 요즘은 모든 게 감사하다.
역병에 걸리지 않아 감사하다.
나이가 이렇게 먹으면 병이 무섭지는 않다. 사람이 무섭지.
가장 무서운 게 사람의 마음이야.
참, 이상하다. 글쓰기를 배우고 나서는 예전의 이재인이 죽은 것 같아.
죽어버리고 새 사람이 된 것 같아.
맨날 그렇게 세상이 무섭고 속이 울렁거리는 사람으로 살았어. 젊을 때는 너희 할머니가 호랑이처럼 무서워서 마음이 덜덜 떨리고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밉고 무섭던 이재인이 아니고.
남은 인생 은유 작가님처럼 아니 그 작가님 발톱만큼이라도 살고 싶은 이재인이야. (요즘 엄마의 아이돌은 은유 작가님이다) 참 이상해. 글쓰기가 참 이상해. 글쓰기를 좋아하는 나도 너무 이상하고.
내 친구들은 '생각을 하니까 몸이 아프지. 한번 사는 인생 과거는 다 잊고 그냥 유-쾌하게 살아.'라고 하는데. 생각을 너무 많이 하는 내가 늘 이상했어.
글쓰기 수업을 시작하면서 내가 늘 버거워했던 엄마의 반복되는 말버릇은 완전히 모습을 바꾸어 소중한 글쓰기 팁이 되었다. 마음을 써서 노력했다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이 아니다. 그냥, 그렇게 되더라.
나의 학생이라면 나는 그의 '반복되는 어떤 습관'을 미워할까? 절대 그럴 리 없다. 나는 그것을 사랑하기 시작한다. 빨간펜을 들고 별표를 여러 개 치기 시작한다. 너의 반복은 너의 개성이다. 아마 너는 이 말버릇을 통해 너의 숨겨진 어떤 면을 드러내고 싶어 (스스로는 몰랐겠지만) 내 수업을 찾아왔을 것이다. 그 가느다란 실마리를 절대 놓치지 마. 내가 그 실을 잡고 있을게. 그걸 더 이어서 굵은 실로, 아름다운 스웨터로 지어보자.
역할이란 참 재미있다. 엄마가 나의 학생이라는 가정만으로 관계는 눈부시게 달라진다. 수업을 처음 시작할 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인간과 인간의 대화란 이다지도 복잡하면서도 단순한 것일까. 인생은 알 수가 없군, 고개를 갸웃하며 나는 선생으로서 강의를 이어간다.
작가의 개성이란, 내가 '어디 한번 만들어볼까' 작정하고 다짐해 만들어내기는 쉽지 않아. 엄마가 좋아하는 박완서나 신경숙, 이경자 같은 소설가라면 자신의 개성을 만들기 위해 다른 소설가의 스타일을 연구하고 필사도 많이 하면서 공부를 했겠지? 그런데 우리는 천재가 아니라 일반인이니까 그러긴 어렵잖아. 재능도 덜하고. 그렇다면 내가 가진 자원을 최대한 이용해야지. 내가 매일 사용하고 관찰하는 것에서 자원을 찾자. 우리는 매일 대화를 하지. 그러면 내 말하기 습관을 문체의 요소로 가져오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엄마는 자주 '이상하다'고 말하잖아.
"내가 언제?"
"강의 녹음한 거 들려줄까!"
"알았어..."
"그런 사소한 말습관을 글에 넣어도 돼. 그럼 작가 특유의 문체가 돼. 남과 다른 개성이 되는 거야. 사회 속에서 우리가 남과 다르면 오해를 받거나 외로워지기도 하지? 그런데 예술을 할 때 남과 같은 건 서글픈 일이거든. 엄마가 '나는 참 이상하네. 왜 남들하고 다르지...' 싶은 거에 동그라미 쳐. '앗싸. 예술가로서의 개성' 하고 써. 히히."
"음...." (오래 곱씹어보고 싶은 주제를 만나면 엄마는 '응'도 안 하고 침묵한다)
나는 강의를 이어간다.
"에세이에 평소의 내 말습관이 넣기 시작하면 마음이 좀 편안해져서 내 본모습이 실타래처럼 풀려나와. 어깨에 힘이 풀리지. 그렇게 '만들어낸 나'가 아니라 '진짜 나'를 드러내면 글과 말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지 않게 돼. 그걸 '글과 말이 유리된다'고 하거든. ("그게 유리컵 할 때 유리랑 다른 거지? 멋있게 들린다. 사전 찾아볼게.") 문단 아저씨들은 글과 말이 유리된 사람이 많아. 정치나 사회, 생태에 대해 엄숙한 문장들을 페북에 써놓고는 뒤로 딴 짓 하는 그런 거. (아, 이건 좀 흐름상 앞뒤가 안 맞지만 엄마는 나의 앞뒤 안 맞는 강의를 꽤 즐거워한다, 논리점프의 세계는 우리의 피에 흐른다)."
"음...."
"아무튼 그러면 더이상 글쓰기에 앞서 경직되거나 엄숙한 마음이 되지 않아. 삶 속에서 글을 늘 쓰고 있는 거니까, 책상에 앉기만 하면 글이 나오는 거지."
어쩐지 막연했던 우리의 여행 이야기는 구렁이가 담 넘어가듯 글쓰기 수업으로 전환된다. 나는 이런 식의 정신 빼놓는 수업 스타일을 좋아하는데 다행히 우리 재인 학생도 그래서 다행이다. '지금 갑자기 수업 하는 거야?'라고 묻는 대신 볼펜심을 또각 누른다. 필기를 시작한다. 죽이 아주 잘 맞는 산만한 선생 학생 콤보.
다음 수업은 내가 노천 카페에 나가 페이스타임으로 사람들을 보여주면서 할까보다. 과제는 사람들을 편견없이 바라보고, 사회와 교육이 심어준 고정관념 말고 내 눈과 감각으로 묘사해 보기 15분.
정신없이 글을 쓰다가 담배를 입에 물고 유모차를 밀며 지나가는 여자를 보고 너무 놀란 엄마는 펜을 멈추고 손을 들고 질문할것이다. "선생님! 잠깐만 저거 설명해 줘. 저 여자 자기 식구들 몰래 길에 나와서 담배 피우는 거야? 아니면 프랑스는 아기엄마가 담배 피워도 되는 거야? 남들한테 욕 안 먹어?"
선생의 지침 없이도 스스로 '왜'라는 질문을 멈추지 않고 생각을 이어가게 된 성장에 기뻐하며 나는 또 과제를 낼 것이다.
"저 장면에 대한 나의 궁금증 쓰기 10분! 여자가 남들 보는 데서 담배를 피우면 사람들이 하는 욕에 대해 5분! 내가 담배를 피워본 적 있는지에 대해 5분! 피울 수 있다면 어디에서 피워보고 싶은지 5분! 그거 다 이으면 한 편 되는 거야, 엄마!"
ps
어제는 프랑스에 온 뒤 처음으로 엄마와 소글 시니어 워크숍을 했어요. 엄마는 아이패드를 열어 페이스타임 어플을 노려보다 제 전화를 받습니다. ㅎㅎ 엄마가 폰 메모장에 글을 쓰고 피디에프를 제게 카톡으로 전송하면 같이 읽으며 첨삭해요! 이게 될까 했는데 하나도 어렵지 않아서 신기해요 화상 수업이니까 엄마가 더 집중하기도 하고요. 세상 좋아졌네!
에세이 <어색하지 않게 사랑을 말하는 방법> 작가이자 온라인 글쓰기 수업 <소글워크숍>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66세 한국여성인 엄마와의 글쓰기 수업을 기록합니다. 남프랑스로의 이민 몇 달 전에 엄마와의 글쓰기 수업을 시작해 현재는 온라인으로 즐겁게 이어가는 중입니다.
트위터 계정 @seniorwriting
https://twitter.com/seniorwriting?s=20
온라인 글쓰기 수업 '소글워크숍'
글쓰기 강의 문의는 sogeul.ws@gmail.com
수업안내 블로그 https://blog.naver.com/purplewater
팟캐스트 <마음을 썼다 내가 좋아졌다>
http://www.podbbang.com/ch/1776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