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름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수년 전 바르셀로나 여행이었다. 아시안 스타일 볶음면을 파는 '웍투웍'에서는 서버가 손님의 이름을 기록한다. 이를테면 '스타벅스 닉네임' 같은 것이다. 나는 내 본명을 말했다. 몇 분이 지났을까. 정신을 차려보니 서버가 '인사'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불려도 들리지 않는 내 이름을 생각하며 면을 씹었다. 면을 담은 용기에는 Insa라고 써 있었다. '은성'이라는 한국어 발음은 스페인 사람의 귀에는 '인사'고 들렸던 것이다. 이름을 이루는 알파벳 철자를 불러주고 확인을 할 에너지가 없었다.
굶주렸고 짐은 무거웠고 땀에 절었고, 제발 어디에든 앉고 싶었다.
늘 이런 식이다. 내 집 안에서 우리는 완벽한 대처를 상상한다. 지구 어디에서건 자랑스러운 내 한국어 본명을 또박또박 발음해야겠다고. 그것이 한국어 소리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일이자, 내게 가장 익숙한 이름으로 생활하는 일이라고. 하지만 집을 나서면 모든 것이 어긋난다. 우리는 날씨와 피로, 우연적 사고 등에 휩싸여 집 안에서의 결심을 쉽게 외면한다. 소설과 영화 속에서 정교하게 직조된 대화의 아름다움을 알고 있음에도, 우리가 그것에 결코 다다르지 못하듯. 처리해야 할 영수증 생각이 떠올라서, 추위에 온몸이 굳어서, 불면이 가져온 무기력에 짓눌려 우리는 어긋난 대화를 이어간다.
2 나는 지금 프랑스에 산다. eunseong은 8개의 알파벳으로 이뤄져 있다. 유럽인에게 이 알파벳의 조합이란 숫자와 특수기호를 넣어 10자로 새롭게 만드는 비밀번호, 친숙한 여러 개의 비밀번호를 모조리 보안성이 낮다고 거부당해 신경질을 내며 아무렇게 적어넣고는 메모해두지 않은 비밀번호나 다름없다.
그리고 이런 일은 내가 상점에 들를 때마다 일어난다. 회원카드를 확인할 때 그들은 전화번호와 이름을 물어본다. Paul 이나 Alice란 이름을 가진 사람은 이름의 철자를 불러줄 필요가 없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프랑스어 알파벳을 발음하려다 멈춘다. 으 위 엔 에스 으 오 엔 줴. u는 많은 프랑스어 학습자가 초반에 어려워하는 발음이다. 나는 이제 그 발음을 할 수 있지만, 오늘은 기운을 내고 싶지 않다. 외국인의 서툰 발음은 그들의 귀를 막을 것이다.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나는 핸드폰에 적어둔 이름의 철자를 보여준다. 내 핸드폰은 조그맣고 점원은 핸드폰에 쓰인 글자를 보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 듯 하다. 그는 잘 안 보인다는 듯이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며 내가 모르는 단어로 중얼거린다. 별 것도 아닌 일에 왜 저렇게 퉁명스러운 것일까. 나는 상대의 신경질을 다리미로 눌러 펴는 듯한 뜨겁고 무거운 힘을 담아 영어로 말한다. 고작해야, 영어로 말한다. 이것 읽어. 알파벳이니까 영어 몰라도 읽을 수 있지? 또는 이것 읽으세요. 알파벳이니까 영어 몰라도 읽을 수 있지요?
가게를 나서며 나의 퉁명스러움이 자랑스러운지 부끄러운지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지금으로서는 아무 것도 스스로 알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생각을 멈추고 내키는대로 시도해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3 선언은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헐리우드 배우 이기홍은 한국 이름을 사용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우리의 이름을 바꿀 필요는 없지! 제 모습 있는 그대로, 사람들에게 제 이름을 배우게 할 수 있는 거잖아요? 충분히 능력 있고, 꾸준히 일한다면, 사람들은 우리의 이름을 기억할 거예요."
그는 배우 우조 아두바의 인터뷰를 인용한다. 배우 우조 아두바는 미드 <미세스 아메리카>의 셜리, <오뉴블>의 '미친 눈깔' 역으로 유명한 나이지리아계 미국 배우다.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와 나눈 대화를 들려주었어요. '엄마, 아무도 내 이름을 정확히 발음하지 못하는데 이름을 바꿔도 될까?' 그런데 그녀의 엄마는 이렇게 답했다고 해요. '사람들이 도스토예프스키와 차이코프스키를 발음할 줄 안다면, 네 이름도 어떻게 발음해야 할지 배울 수 있을 거야'."
이런 인터뷰를 읽으면 심장이 뛴다. 하지만,
산드라 오가 오미주라는 한국 이름을 사용하지 않지만, 누구도 그녀를 비난할 수 없다. 내가 김은성이란 이름을 사용하지 않을 때, 나를 비난하는 건 나다. 누구의 시선으로 비난하는지는 모를 일이다. 성악가 조수미의 본명은 조수경이지만 서양식 이름으로 바꾸라는 재촉에도 불구하고 '한국식 이름을 사용하겠다며' (이건 누구의 분석인지 모른다) 발음이 어려운 '경'을 빼고 발음이 쉬운 '미'를 넣었다는 '미담'을 좋아하는 사람의 시선으로?아시안의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 이슈인지 알지만 나는 지쳐서 타협했다. 발음을 하루에 열두번 정정해 줘야 하거나 아예 잊어버려서 부르지 않는 것에 피로했다. 나는 간단하게 Kim을 쓴다. 어떤 사람들의 발음으로는 King이 된다. 그건 듣기 좋다.
4 파트너는 내가 킴이라고 불릴 때 조금 속상해하는 것 같다. 그와 연결된 사람들에게 나는 나를 은성이라고 힘주어 소개한다. 이름은 때로 사랑에 봉사한다. 나는 그를 슬프게 만들기 싫다. 내 이름을 정확히 발음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나라로 인도한 것이 비록 그이지만. 두 가지는 별개의 사안이니까.
5 나는 내 이름이 다양한 발음으로 불리는 것에 익숙하고 즐기기도 한다. 이름 따위에 신경 쓸 만큼 한가하지도 않다. 인사, 은송, 은숭, 은쏭. 모두 즐거운 발음이었다. 하지만 불리지 않는 것은 슬펐다. 불어학교에서 어린이들처럼 게임을 할 때, 어려워서 자꾸 잊어버리게 되는 내 이름을 아무도 불러주지 않았다. 얘들아. 나 저 단어 다 안다니까? 내 이름을 불러주면 내가 우리팀을 1등으로 만들 수 있는데, 이 바보들아.
나는 우울한 날에 대비하기 위해 이름을 버렸다. 게임 판에서 나는 나를 킴이라고 부르라고 시켰다. 친구들이 내 이름을 불러서 내가 단어의 스펠링을 맞추었고 우리 팀은 1등을 했다. 이름을 바꾼 건 순발력있는 현명한 선택이라 여겼다.
킴은 장난기의 옷을 입었다. 킴은 경쾌한 춤 같았다. 킴킴. 캉캉. 킴킴킴킴. 캉캉캉캉. 생활에 리듬이 붙었다. 나는 청자켓을 꺼내입고 껌을 씹기 시작했다. 자켓은 편안했고 껌은 긴장감을 없애주었다.
킴을 사용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내 이름을 휘파람이나 한숨, 노래처럼 불렀다. 그건 쉽고 귀엽고 짧고 친근했다. 나는 김정은의 조카라는 유구한 농담을 사용하기도 했고, 친구들이 킴 카다시안이라고 나를 부르면 입술을 내밀며 부풀리고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아직 돈이 모자라서 납작해." 킴은 중국이 아니라 한국 느낌의 성이라며 내가 한국인인 것을 맞추는 사람도 보았다. 나는 점점 킴이 좋아졌다. 프랑스 사람들은 프랑스식 인사에 꼭 '킴'을 붙여서 했다. 봉쥬킴, 메르씨킴, 싸바킴, 오흐부아킴! 봉쥬 마담, 봉쥬 무슈는 자주 해도 봉쥬 알렉산드리아, 봉쥬 막시밀리안은 자주 듣지 못한다. 아주 쉽고 짧은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이겼다, 하고 나는 슬며시 농담했다. 무엇에 이겼어?
6 한국계 벨기에인 입양아의 자기서사를 다룬 애니메이션 '피부색깔=꿀색'에서 주인공의 친구 이름은 '킴'이다. 그가 한국에서 가지고 온 성 '킴'을 이름으로 사용한 것이다. 정현도 금숙도 명진도 어려울 때 그들은 '킴'을 꺼내든다. 나는 반가웠다. 이곳에 얼마나 많은 킴이 살고 있을까. 우리는 같은 이름으로 묶인다. 킴이라는 민족.
7 라힘의 이름은 압둘 아브라힘으로 시작해 더 길고 긴 성이 붙은 이름이지만, 매일 만나는 친구들도 그의 풀네임을 모른다. 압둘과 아브라힘. 두 가지 단어 모두 전형적이고 유명한 아랍인의 이름으로 유명하다. 아브라힘은 심지어 성경 속의 완고하고 신앙심 두터운 한 인물을 떠올리게 한다. 압둘이란 이름은 아마도 '테러범'의 이미지와 연결되기도 할 것이다. 당연히 그는 라힘이란 이름으로만 생활한다. 출석부를 통해 '압둘 아브라힘'이란 이름이 불리면 모두 그게 누구냐며 두리번거리고 그는 소리없이 손을 들고 어떤 농담도 하지 않으므로 소란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는 유일한 혈육인 어머니를 아프가니스탄에 두고 먼 길에 올랐다. 그는 난민이다. 하교길에 누군가 그의 나라 말로 인사를 건네면 그는 땅만 바라보며 걸었다.
왜 인사 안 하니? 너는 예의를 배워야 해.
내 농담에 그는 돌처럼 딱딱하게 굴었다.
너 모르는구나. 인사하면 친구 되고, 친구가 생기면 귀찮아져. 다들 돈을 빌려달라고 하거든.
8 낯선 이름은 지워진다. 낯선 인간일 때, 이름마저 낯설다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낯섦을 완화하기 위해 우리는 친근한 이름을 지어낸다. 낯설다, 누구에게? 친근하다, 누구에게? 그 땅에 먼저 산 사람들에게. 시스템의 주인인 사람들에게. 나의 이름을 구성하는 음절을 처음 발음해 본 사람들에게. 아시안과 아랍인과 아프리칸을 '에트랑제' 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 에트랑제를 외국인일 뿐 아니라, 이방인, 나아가 '이상한' 이란 의미로 실은 사전의 주인인 사람들에게.
9 라힘에게 묻고 싶다. 너의 침대는 어때? 너는 암흑 속에서 잠이 깨 두려워지지 않아? 내가 누구지, 여기는 어디지, 나는 아무것도 아닌가, 이러다가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되면 어쩌나 싶은 생각에 공포가 몰려오지 않아? 공포가 온몸에 독처럼 퍼져서, 그대로 있으면 죽어버리니까 정신이 몸을 밀어붙여 한밤중에 눈을 뜨는 일이 없어?
그는 대답할 것이다.
"너 모르는구나. 너에겐 이름이 중요해? 여기선 나에게 비자와 먹을 것, 살 집을 줘. 이름이야 아무려면 어때. 아버지가 죽어가는 장면을 지켜봤어? 포화 속에서? 이름은 아무 것도 아니야."
이름이 나에게 왜 중요한지 설명하려던 욕구는 잦아들어 버린다.
아니다. 만약 네가 너의 이름을 지키려고 투쟁한다면? 생활에 어떤 실제적 도움이 되지 않는, 그 쓸모없는 노력은 네가 좀 다른 유형의 인간이 되는 방향으로 너를 끌어당기지 않을까, 라는 말이 솟아오른다. 하지만 다시 말을 삼킨다. 그는 거대한 장벽처럼 느껴진다. 어떤 주문에 걸린 사람처럼 누구의 말도 자기 삶에 적용하지 않으려 든다.
그는 라힘으로 죽을 것이다.
소은성 <친구들에게>는 한국을 떠나 프랑스 남부 작은 도시에 사는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매주 메일로 보내드리는 에세이 메일링입니다. 새로운 시즌 구독은 작가소개에서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에서 확인하실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