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기다리며 나는 역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주문한다. 무언가를 기다리는 순간이 창작의 적기란 것을 몇 번의 경험으로 알게 됐다. 일렁이는 마음이 잔잔해지기를, 꽃피는 봄이 오기를, 전쟁이 끝나기를, 사춘기가 지나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내 앞에 당도하기를 기다릴 때 우리에게는 평안이 없다. 평안이 없는 상태란 건강에는 그다지 좋지 않지만 만들어내는 에너지에는 좋다.
고작 커피 한 잔을 기다리며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우스워하며 '의미 기계'란 조어를 떠올린다. 의미 기계로 사는 것은 일상에 도움이 될까. 그렇지 않을까.
커피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태블릿을 열어 문장을 하나 쓴다. 두꺼운 도기 잔에 담긴 에스프레소를 세 번에 나누어 마신 뒤, 문장을 몇 개 더 이어간다. 유리창 밖의 관찰자 시점으로 나를 바라본다. 자꾸만 아무 것도 아니게 되는 나를 건져올리는 주문은 언제나 글쓰기다. 나는 나를 3인칭으로 바라보려고, 그렇게 해 보려고 힘을 쓴다. 안간힘이란 단어란 어쩌면 음절 하나 하나가 간절할까.
환영을 불러오는 일이 어쩌면 전부일 때가 있다. 연기로 인형을 만들 듯 허공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날들도 의미가 있다. 그것 외에는 할 수 없는 날들이 있다.
어쨌거나 나는 나를 3인칭으로 서술하기 시작한다.
저 동양인 여자는 예술가로군. 여자의 탁자 위에는 아녜스 바르다(와 그녀의 고양이)의 초상이 바탕화면으로 지정된 스마트폰이 놓여있다. 여자는 한숨을 길게 쉰 뒤에 커다란 검은 테 안경을 벗어 자신의 티셔츠 천에 문지른다. 보통의 것보다 훨씬 큰 안경은 테는 가늘지만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시그니처와 닮았다. 백팩 안에서 잔뜩 구겨진 종이 몇 장을 꺼내 펜으로 줄을 박박 그으며 무언가 쓰기를 이어간 여자는 이내 신경질적으로 종이들을 차례로 구겨 다시 백팩의 보조주머니에 뭉쳐 저장한다. 여자는 산만하고 신경질적이며 일을 할 때 쉽게 짜증을 부리는 타입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폭소를 터뜨리며 작업을 하는 예술가란 영화 속 아마데우스같은 광인 뿐이겠지.
저 여자가 예술가라는 데에 나는 10유로를 걸 수 있다.
예민한 신경줄을 누그러뜨릴 크림이나 우유가 들어간 커피를 주문하지는 않는 올곧은 취향에 10유로 더 얹을 수도 있다.
나는 이 호사스러운 이미지가 마음에 든다. 예민하고 복잡한 자아는 '성공적인 이민자' 상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으니까. 성공적인 이민자란 누구와도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는 무던함이나 짧고 압축적인 숙면 후 좋은 컨디션으로 일할 수 있는 무던함, 고향을 그리워해 자국 음식을 자주 해 먹으며 그 점을 굳이 감추지 않는 무던함과 어울린다는 것이 내 편견이다. 한국에서의 시절을 떠올린다. 매일은 아니었지만 자주 사람들과 이질감을 느꼈다. 모임에서 돌아온 밤엔 잔여감정에 한참을 소파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명절이면 엄청난 노동력을 단숨에 빨아들여 한줌의 나물이 되는 한식의 비효율성에 스스로 위태로워 보일 정도로 몸을 떨고는 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한국을 떠나기 직전에 나는 창작자라는 옷을 새로 입었기 때문이다. 에세이스트로서의 분열적 고민과 에세이에 대한 어떤 몰이해를 끊임없이 불평했지만, 불평은 커피에 올린 크림처럼 짙고 달콤했다. 민감한 사람이어도 된다는 허가를 받은 듯 했다. "이 정도 민감성이 없다면 그게 예술가일 리 없잖아." 나는 그 옷에 작별인사도 하지 못한 채 이곳으로 달려왔다.
이민자 기차에 올라타자 신기하게도 모든 승객에 나에게 너는 누구냐고 물었다. 옷을 걸치지 못한 채 보낸 일년이었다. 또는 이 옷 저 옷을 바꾸어 입어보느라 바빴다.
떠오르는 장면 하나. 첫 하교길이다.
# 장면1
여기에 왜 왔어?
응?
공부하러?
(까르르 웃으며) 대체 누가 이 조그만 도시에 공부를 하러 와. (하지만 이 도시에도 대학이 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그러면 왜 왔어? 한국은 부자 나라잖아. 프랑스보다도 더 돈이 많을 텐데? 친구들 다 한국 공장에서 일해. 돈 많고 나쁜 나라야. 이주노동자에게 아주 가혹하지.
(나는 할 말이 없어져 대화 주제를 바꾼다)
나는 배우자 비자야.
그러면 너는 '빠삐에' 가 있겠다. 최고네.
(빠삐에는 보통 체류증 같은 것 등을 의미한다. 내가 거주에 필요한 정당한 서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든다)
그는 지갑에서 자신의 체류증을 보여준다. 나는 체류증 카드를 처음 본다. 만져봐도 되냐고 내가 묻자 그는 기뻐하는 듯 하다. 조악한 디자인과 종이 재질에 나는 조금 놀란다. 혹시 가짜가 아닐까. 나는 플라스틱으로 된 주민등록증에 익숙하다.
이제 일도 할 수 있어. 아주 안심이야. 모든 면에서.
그는 다시 묻는다.
너는 왜 반지가 없어? 결혼하면 여기에 반지 끼우는 거잖아. 아주 크고 반짝반짝. 항상, 매일매일, 반지를 껴야지.
그는 넷째 손가락을 치켜든다.
돈 없어.
나는 내게 익숙한 농담을 한다.
그는 대답한다.
너도 돈 벌면 돼. 프랑스는 돈 벌기 정말 좋아.
돌연 격려를 받은 나는 어떤지 '고마워'라고 말한다.
"네가 반지를 끼고 있지 않아서 설렜었어. 결혼했다는 걸 알고 슬펐어."
몇달 후에 그는 조금 취해서 말한다.
나는 내게 익숙한 농담을 한다.
"미안해. 내가 너무 빨랐네."
농담은 내게 활력을 주지만, 그를 울먹울먹하게 만든다. 울먹울먹한 마음은 모든 것을 진담으로 믿도록 만든다. 유연성을 꺾어놓는다.
예상치 못하게 그는 내 어깨에 기대어 응석을 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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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내용은 내가 구겨버린 종이다. 종이 안에는 반지나 어깨, 체류증 등의 단어들이 한국어 글씨로 적혀 있다. 스프링 자국이 있는 종이는 불어초급반 공책 첫장이다. 나는 수업 내내 언젠가 글이 될 단어들을 적었다. 단어들은 머릿 속 혼돈을 돌보는 도구였다. 혼돈스러울 때 귀신같은 글씨를 적어내려가는 것은 오랜 습관이다.
옆자리 친구는 내가 그럴 때마다 호들갑스러운 칭찬으로 나를 혼돈 속에서 건져올린다.
너는 정말 열심히 공부해. 최고이다.
나는 양손의 엄지손가락을 세워 응답했다.
고마워. 나도 알고 있어.
너의 진담과 나의 농담은 부는 바람이 나뭇가지를 흔들듯 나의 침울을 어지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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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예술가 자아는 환영이었을까. 그녀는 떠났을까. 그녀는 내가 아니었을까. 방안에 갇혀, 광장을 돌아다니며 2020년에 중얼거렸다. 나는 장소들로 그녀를 찾아다닌다. 빨래방에서 카페에서 광장에서 기차역에서 교실에서 수퍼에서 그녀를 찾아다닌다. 커피값을 계산하던 중 실수로 원고 뭉치를 놔두고 나온 것처럼, 그녀를 찾아 도시 전체를 돌아다닌다. 이런 부주의한 행동은 평생에 걸쳐 내게 일어났었다. 친절한 사람이 원고 뭉치를 카페 주인에게 건네주고 '큰 안경을 쓴 동양인 여자의 것'이라고 말해주었을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언제나 다시 찾을 수 있다.
소은성 <친구들에게>는 한국을 떠나 프랑스 남부 작은 도시에 사는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매주 메일로 보내드리는 에세이 메일링입니다. 새로운 시즌 구독은 작가소개에서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에서 확인하실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