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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은성 Aug 21. 2023

차디차 몸이 떨려 냉면 냉면 냉면

랜선미식회 시즌1

은성


차가워 너무나 속이 시려 너무나 이빨이 너무시려 냉면 냉면 냉면 가슴이 너무시려 냉면 냉면 냉면. 널보면 너무나 또 다시봐도 너무나 그래도 널 사랑해. 혹시 이 가사를 기억하시나요? 전국을 강타했던 박명수, 제시카 듀오의 <냉면>입니다. 프랑스에 살면서 여름마다 이 노래를 불렀어요. 아, 이빨과 가슴 시리고 싶다!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유럽에 없다는 사실은 유명하죠? 국수에 얼음이라? 서양분들은 좀 힘들어 하십니다. 유럽에도 여름이니까 차가운 것을 먹는다는 개념은 있지만, 그래봐야 가스파초 정도? 토마토를 비롯한 야채를 갈아 차게 식혀 먹는 냉스프인 가스파초는 '음료가 짭짤하다고?'를 용인하기 어려워하는 제게는 금지 품목 같았어요. 그러니, 여름에는 식당에 가고 싶지 않았답니다. 


저는 차가운 면 애호가예요. 물냉면, 비빔냉면, 메밀소바, 냉소면, 냉 멸치국수, 들깨가루와 들기름과 김을 넣어 비빈 메밀국수…고루 애정합니다. 국수 먹으러 여행을 갑니다. 서울에선 먹지 못하는 부산의 물밀면과 비빔밀면 때문에 저는 부산에 갔어요. 구수한 메밀면에 김가루 잔뜩 뿌린 막국수 먹으러 강원도에 갔고요. 그뿐인가요. 진한 고기 육수로 승부하는 평양 냉면, 고기 완자를 곁들인 옥천 냉면, 육전과 각종 고명을 얹어 색색깔 화려한 진주냉면…. 


냉면만 해도 기막혀요. 지역별 냉면 특색에 대해 밤새 대화하는 파티를 열고파요. 하지만 프랑스에 살면서는 쓸쓸히 유튜브를 켜 ‘다시다로 만드는 냉면 육수’를 두세병 만들곤 했죠. 한인마트에서 공수한 소고기 다시다와 설탕, 간장, 식초를 섞어 만들면 김밥천국 물냉면 정도의 맛은 얼추 나는데요. 작년 여름 유럽의 이상 고온 속에서 에어컨도 없는 집에 좀비처럼 누워있다가 ‘냉면!’ 라고 소리치며 일어나게 해 준 건 바로 이 냉면국물이었습니다. 내게는 한인회보다 소중한 그 이름, 


냉.면. 


연주


찬국수! 제가 여름을 정말 못 견딘다고 이야기했던가요? 저는 일단 더우면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하고 ‘덥다’는 기억만 남는 뱀파이어 아이스크림과 같은 존재랍니다. 여름이 되면 일단 입맛도 별로 없어요.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다… 시원하게 후루룩 뭔가를 들이키고만 싶다… 그러니까 자꾸만 차가운 국수만 찾게 되죠. 

어릴 때는 여름이면 집에서 콩국수를 자주 먹었어요. 그런데 저는 콩비린내, 아니 생채소의 풋내에 전반적으로 약하거든요. 그래서 콩국물의 비린내에 학을 떼면서, 어째서 여름이 아닌 계절처럼 잔치국수를 해주지 않는 것인지 약간 엄마를 원망하곤 했어요. 그 더운 여름에 멸치국물을 내길 바라다니, 지금 생각하면 불효도 불효도 그런 불효가 없네요. 


그래도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아서 어쨌든 저한테는 메뉴를 정할 권한 같은 것 없었으니까요. 저를 뺀 모든 가족은 콩국수를 매우 좋아하고. 그렇다고 저 하나만을 위해서 엄마가 잔치국수를 따로 만들 수는 없죠.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무엇을 했는가? 저한테는 엄마가 간장국수를 만들어줬어요. 정말 별 거 아닌, 간장과 설탕과 참기름을 섞어서 콩국수용으로 잔뜩 삶아놓은 소면을 한 움큼 넣고 비벼주는 간장국수. 그런데 저는 그게 정말 너무너무 맛있는 거예요. 아마 그런 저의 반응을 보고 엄마도 ‘이거다!’ 싶었겠죠? 


그래서 그 다음부터 콩국수를 먹을 때면 항상 저한테는 따로 간장국수를 만들어 주셨어요. 그 이후로는 메뉴가 콩국수여도 저는 전혀 불만이 없었죠. 그리고 평소에는 간장국수를 해주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때만의 특식이나 마찬가지였어요. 지금은 낮에도 밤에도 갑자기 그 애기같은 국수를 먹고 싶어지면 혼자서 간장국수를 자주 만들곤 해요. 다진 마늘도 넣고, 식초도 넣어서. 아마 제가 제일 좋아하는 찬국수를 꼽자면 간장국수일 거예요.


물론 지금은 콩국수도 없어서 못 먹지만요. 제가 직접 콩국물을 내지는 않지만 동네 재래시장이나 시판 콩국물을 사다가 집에서 오이채를 쫑쫑 썰어서 올려 먹고요. 보통 그럴 때는 열무김치랑 구운 왕교자를 곁들이곤 해요. 이상하게 그 조합이 저한테는 제일 마음에 들더라고요. 아마 우리 집의 콩국수 기억은 이렇게 남게 될 것 같아요. 재래시장의 콩국물에, 열무김치와 구운 왕교자를 곁들인 여름 저녁 식사. 



은성


음식에 대한 친숙함과 애정도는 10분 안에 쓰는 글 길이로 짐작 가능한 걸까요. 디저트에 그닥 관심이 없는 제가 라이스푸딩 글 쓸 때 글쓰는 속도가 팍 느려졌었죠 하하. 찬국수에 대한 연주의 글 속도, 대단합니다! 여름을 못 견딘다는 연주가 ‘찬 걸 후루룩 들이키고만 싶을 뿐 입맛이 없다’는 말을 하니, 요즘 얼마나 지칠까 염려하게 되어요. 여름의 시작이 되면 한숨을 쉬는 엄마와 남동생에게 “넌 더위를 안 타서 좋겠다"는 부러움을 받으며 자랐거든요. ‘화덕증(?)이 나서 죽겠다, 가을만을 기다린다’는 엄마와 남동생은 아마도 태양인이나 태음인일까요? 


그 때문에 어린시절 여름날 점심은 거의 엄마표 물냉면이었어요. 80년대생인 제 유년기에는 시판 육수 따위 없었기에, 설탕과 식초와 다시다와 간장 같은 걸 레시피 따위 없이 오직 감으로 휘리릭딱딱 섞어 만든 홈메이드 냉면 육수가 기가 막혔어요. 저건 마법이다, 연금술이다….감탄했던 추억입니다. 여름날 저녁이면 내일의 냉면을 위해, 드라마를 보면서 젖은 냉면 가닥을 떼던 엄마 모습이 떠올라요. 덩어리째로 파는 냉면을 손으로 비벼 한 가닥씩 떼어내는 노동. 


연주


흠, 저는 소음인이고 사주에는 화가 부족한 사람인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더위를 타는 것일까요? 더위를 조금 더 견딜 수 있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는 해요. 여름이 되면 낙이 별로 없거든요. 밖에 나가기에도 제약이 많이 따르고, 제가 좋아하는 캠핑에서도 마음껏 돌아다니기에는 조금 위험하게 느껴지기도 해요. 어째서 여름은 존재해야 하는 것일까. 이유가 있다면 여름 음식 정도이겠죠. 수박과 복숭아, 자두와 포도, 그리고 냉면. 


냉면을 집에서 만들어 먹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는 굉장히 놀랐어요. 솔직히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상한 일이죠? 생각해보면 마트에서 ‘풀무원 메밀 소바’처럼 초기의 밀키트 형식으로 많이들 팔고 있는데도요. 그런 시판 육수로도 한 번도 만들어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엄마도 집에서 냉면을 만들어준 적은 한 번도 없었고요. 


그래서 냉면 면을 덩어리째로 파는지도, 그걸 손으로 비벼서 한 가닥씩 떼어내야 한다는 것도 몰랐어요. 제가 좋아하는 음식 명상의 일종인 것 같아요. 저는 여유로운 시간에 무언가 영상을 틀어놓고 바닥에 퍼질러 앉아서 식재료를 갈무리하고 나면 속이 시원해지거든요. 완두콩을 깍지에서 까서 콩만 모으거나, 삶은 닭가슴살을 결대로 아주 곱게 찢거나. 그런 모습 중 하나가 은성에게는 냉면 면을 한 가닥씩 떼어내는 순간이었던 거죠. 신기해요. 


은성

여름은 존재해야 해요! 여름 저녁 테라스에서의 아페로가 얼마나 좋은데요! 연주를 꼭 여름의 프랑스로 초대해 낮의 뜨거움이 사라진 저녁 무렵에 차가운 로제와인을 따라주어야만 하겠습니다. 저의 “왜 살고 있지?” 사진 폴더에는 그 사진들이 가득하다고요. 


음식명상이란 표현을 우리 엄마에게 전해주면 굉장히 기뻐하실 거예요. “더운데 왜 그렇게 반찬을 해대!” “그냥 떼어진 면 사먹지! 손 아프게!” 라고 걱정을 하는 딸에게 엄마는 이렇게 답해요. “너도 힘든데 글 쓰잖아.” 맞아요. 요리를 좋아하는 아버지에게 태어나 요리를 업으로 살아가는 형제자매를 둔 엄마에게 요리란 고단한 살림이 아니라 놀이인 거죠. 


그리고 명상이기도 하겠죠. 머리가 복잡할 때 냉면 가닥을 손으로 비벼 떼어내거나 콩나물을 다듬는 행위가 명상이란 사실은 제가 이민자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어요. 고단하고 때로는 위험한 외부로부터 나를 이동시켜 집안에 앉혀, 무언가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반복노동을 하는 일이 마음의 평온을 가져다 둔다는 사실을요. 프랑스 이민자로 살면서 마음에 생채기가 난 날에는, 재료를 하나하나 썰고 볶아 김밥을 말던 기억이 나네요. 


그나저나 냉면은 원래 집에서 만들어 먹는다는 개념입니다 제게는. 얼마 전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육쌈냉면’에 달려가 물냉면과 숯불고기 세트를 먹었는데, 물론 맛있었지만 해외살이로 외식 입맛에 약해진 제 혀에는 너무 자극적이었기에 집냉면이 그리웠어요. 집냉면은 재료의 응용력도 재미요소예요. 요즘 오이가 하나에 천오백원이래요? 그러면 집냉면에는 오이채 말고 양배추채가 수북히 올라갑니다. 


엊그제 엄마집에서 집냉면 콤보를 먹었어요. 떡갈비와 깻잎 쌈, 그리고 오이와 파프리카 채 등을 올린 물냉면. 10년 만에 출옥한 올드보이처럼, 냉면을 마셨습니다. 지금도 그때의 찬란한 환희가 떠올라요. 맛있다는 말로는 부족했습니다. 



“너는 냉면에 만두가 좋으니?”
너는 000이 좋으니, 란 엄마의 말투는 ‘나는 그걸 안 좋아한다’는 의미. 
“냉면에 돼지갈비 올려먹기, 떡갈비 한 조각 입에 넣고 냉면 국물 마시기가 더 좋아. 만두보다는.”


먹으면서 먹는 이야기 하기는 우리집 가풍입니다. 이런 식으로 음식 릴레이를 하고 하고 또 하며 여름이 깊어가요. 이날은 집냉면 포인트를 여쭈었는데 이렇습니다. 
“시판육수에 참기름 추가하여라. 그러면 시판 육수의 쌔한 맛을 참기름이 사악 감싸주어 고급스러운 맛이 난다. 참기름 양은 절대 많지 않게. 참기름 국이 되면 그날 냉면 망하는 거다. 
참깨를 뿌리면 너희들이 어릴 땐 싫어했는데 요즘은 너희가 좋아한다. 
냉면은 면 삶기가 중요하다. 담갔다 뺀다는 느낌으로 삶아야지, 푹 삶으면 그날 냉면은 망한다. 
얼음을 꼭 띄워야 면이 탱탱한 채로 끝까지 먹을 수 있다.” 



듣기엔 재밌었지만 다음날 제가 만든 냉면은 네 맛도 내 맛도 아니었어요. 손맛은 레시피 적기로는 배울 수가 없고, 직접 요리하면서 옆에서 지도를 받아야만 하는데…젊은 우리는 일하느라 바빠 그럴 시간과 에너지가 없네요. 


연주


맞아요. 어린 시절의 추억의 요리는 가끔 엄마한테 레시피를 달라고 하는데(고등어찌개처럼), 엄마가 해준 것과 똑같은 맛이 나지는 않아요. 그래도 어떻게든 맛을 내기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제가 가미한 변형적인 요소가 들어간 다른 음식이 되는 거죠. 근데 그걸 계속 먹다보면, 원래 있던 추억과 지금의 만족감이 뒤섞이면서 마치 이것이 내가 먹던 그 음식이었던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같아요. 그러다가 이제 집에 가서 엄마가 해준 ‘정통’ ‘바로 그 맛’을 느끼면 허허 지금까지 내가 먹던 것은…. 원효대사 해골물이었던가? 싶은 거죠. 


그게 음식이 대대로 내려오면서 변해가는 과정인 것 같아요. 예전에 본 음식 에세이에서 나만의 요리 노트를 가진 시어머니 이야기를 본 적이 있는데, 80년대에 처음 만들었던 때에는 로스트 치킨에 마가린을 썼지만 점점 버터로 바뀌고 들어가는 허브나 사용한 오븐도 변해가는 기록이 그대로 남아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과거의 그 맛과는 분명히 다르겠지만, 지금은 이것이 정답이라고 느껴지는 맛. 어떤 면에서는 서글프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냥 그게 인생인 것일까요? 


작가소개 
프랑스 알비의 은성 작가와 한국 서울의 연주 작가, 이들의 공통점은 글쓰기로 최대 출력의 도파민을 얻는다는 것! 쓰는 사람만큼 보는 사람도 즐거운, 도파민 힐링을 선사하는 작가 듀오의 탄생.


랜선미식회는 이번 8화를 마지막으로 1시즌을 마무리합니다. 
돌아오는 9월에 2시즌으로 찾아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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