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을 리젝트하기

by 소은성

유전이란 없어. 유전될 거라는 믿음 때문에 병이 ‘유전’되는 거지.


오헬이 대답한다.


나는 생각한다.


어쩌면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저렇게 빠르고 단호하게 답을 내놓지? 너도 대를 물려내려오는 기질이나 질병에 대해 오래 생각했니?


나는 그가 성년이 되자마자 아버지로부터 떨어져나와 군대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기억해낸다. 그는 이십대 내내 군대를 자신의 집으로 여기며 살아냈다.


에에,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칼같이 집을 나오니?

나는 거짓말하는 사람들을 싫어하니까.

에이, 아니야. 넌 그들과 비슷해지지 않았을 거야.


그는 혀를 앞니에 대고 쯧, 소리를 조그맣게 내면서 고개를 가로젓는다. 프랑스인다운 제스처.


아버지의 중독 이슈와 반복되는 거짓말을 한 명의 자녀가, 또 다른 자녀가 닮아가는 것을 보는 건 괴로웠다고 그는 말한다.


나는 거짓말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을 괴로워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 싫은 것과, 거짓말을 일삼는 사람들을 보는 것을 고통스러워하기.

두 가지는 다르다.


그날 저녁식사가 거의 마무리되자 기어이 나는 중요한 이야기를 꺼냈다.


요즘 알 수 없는 어지러움에 시달려. 땅이 흔들려. 가만히 서 있기가 힘들어. 걸으면 세상이 핑핑 도는 것 같아.


그는 손목에 찬 은색 시계를 슬쩍 보았다. 그는 중요한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시계를 본다. 남에게 내 걱정을 전할 때 상대의 부담을 염려하는 나는 긴장이 된다. 혹시 지금 집에 가려던 건 아닐지, 오늘 밤에 나누기에는 부담스러운 주제일지 짚어본다. 그러다, 그는 한 시간에도 여러 번 시계를 보는 습관이 있다는 점을 기억해낸다. 그는 늘 시계를 보는 사람이다. 나는 거부당하기 전에 '아니야, 괜찮아, 원한 적 없어' 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잠깐, 강박행동 혹은 강박의식에 대해 떠들기.


이 떠듦에는 목적이 있다. 애초에 내가 왜 오헬에게 나의 거대한 걱정비밀을 고백하고 싶어졌는가와 연결되기 때문이다. 강박이 없는 사람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았는데 그건 누군가에게 불쌍한 사람이 되는 게 싫을만큼 마음이 약해져서다.


그는 아마 더 긴 대화를 위해 펍으로 자리를 옮길지, 이 레스토랑에서 맥주를 한 잔 더 시킬지 생각한지 모른다. 또는 자신이 긴장될 때나, 아니면 일부러 긴장을 해야 할 때 시간을 확인하는 습관이 있는지도 모른다.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사는 기분을 느끼며 살아간다. 대화 중에 떠오르는 어느 아침의 대화. 나는 그에게 로보트 같다고 말했다.


그래? 기분 좋다. 될 수 있으면 좋겠다. 나는 꼭 로봇이 되고 싶어.


그는 아침 루틴에 따라 여러 가지 행동을 하면서 말했었다.


기상-전기주전자 버튼 누르기-물이 끓기 전까지 원두 갈기-주전자가 소리를 내면-> 커피를 내리기-> 어제와 같은 속도로 마시기-> 마시는 동안에는 말을 하지 않기-> 커피잔을 씻어 건조대에 두기-> 어제 밤에 내일 아침의 일로 정해놓은 것을 정한 시간에 시작하기.


완벽해,

하고 한숨 돌리기.


다음 루틴을 시작하기.


시계에 맞춰 행동할 때 그는 편안함을 느낀다.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 자신만의 시공간에서 멜팅다운하는 것이 그는 두렵다고 했다.


이렇게(온몸을 소파에 기대고 살바도르 달리의 그림 속 시계처럼 흘러내리며) 되어서 몇 시간을 내 몸에 갇혀 보내버린다고.


그는 모든 일과가 정해진 군대에서 나와 자신의 집에서 살기 시작했을 때 그 달리 시계인 채로 일년을 보냈다고 말한다.



나는 잊어버리는 것이 두렵다.

삶을 쉬지 않고 활자화해나갈 때 나는 편안함을 느낀다.


우리 둘은 대칭이다.


모든 대화 상황에 녹음기와 기자수첩과 볼펜을 들고 임하고 싶은 나의 강박.


그의 강박은 도형. 어여쁘고 반듯한 도형을 만들기.


맥북과 마우스와 수첩은 반드시 올바른 각도로 놓여야만 하고, 인터넷 창은 5개 이상 열려있으면 안 되고, 모든 클라이언트의 폴더가 즉시 정돈되어야 하고, 16시에는 여러 맛의 초콜릿들을 사들고 와서 먹어야 한다. 그런 습관이 때로 몹시 좌절스럽다고 그는 지난번에 말했었다.


초콜렛 먹을 때는 전혀 좌절스러워 보이지 않던데?

초콜렛을 누가 싫어해?


지난번에 그가 내보인 좌절감 덕에 나는 오늘 내 취약함을 내 보일 수 있다. 그가 전형적인 사람이 아니어서, 나는 나의 기이한 두려움을 고백할 수가 있다.


로봇이 되고 싶은 사람과 책이 되고 싶은 사람이 대화를 이어간다.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킨 뒤 말했다. 영어를 사용한다.


외가 여자들의 병이 나에게 유전될까 봐 두려워.


한국어로 말한다면 이랬을 것이다. 도무지 짧게 말할 수가 없다.


“나이가 드니까 소심해져. 대물림이 무서워. 개인이 그 대를 끊을 수 있겠어? 나는 스폰지야. 약해 빠졌어. 앞에 앉은 이의 모든 걸 흡수해 자기 걸로 삼는다고. 밝음이든 어둠이든 나는 다 흡수해 버린다고!


그런 내가 내 집 여자들의 병을 거부할 힘이 있겠어?


이모도 엄마도 완벽하게 미치지 않기 위해서 아픈 거야. 그들은 차라리 몸이 찢기도록 아픈 여자가 되어 늙기를 택했어. 죽거나 미치는 것보다는 아픈 게 나으니까 그것도 그들이 선택한 삶인 거야.


그러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회의적이 되었어. 며칠째 세상이 빙빙 도는 것 같아. 어깨에 귀신이 올라앉은 것 같아. 굿을 하고 싶을 정도로. 내가 샤먼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너무 아파. 그


런데 내가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면,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안 아파!

그러니 이건 분명 꾀병이거나 신병인 거야!”


한국어로 말하는 나는 꾀병, 신병, 무병, 유전 등의 단어를 가져와버린다.


신체화 증상이라고는 해도 어떻게 이렇게 아플까. 70대 30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이 미치는 영향이 70, 정말로 몸이 아픈 게 30이라고. 그렇다면 ‘정말 아픈 것’이란 뭘까?


어디까지가 트라우마나 우울이 몸을 아프게 하는 부분일까. 병의 원인을 환경오염 등의 외부요인과 마음이 주는 내부요인 등으로 칼같이 나눌 수 있을까. 상한 것을 먹으면 배가 아프다. 그건 마음의 영향이 전혀 없나? 불편한 마음으로 먹으면 그 상한 음식은 제 힘을 발휘한다. 나는 약간은 맛이 가버린 음식을 여러 번 먹고도 무사했다. 맛있게 삼켰다. 그때는 마음이 건강했나.


나는 탁자를 바라본다. 나의 한국어는 내 뇌 속에서 부글거릴 뿐, 탁자에는 침묵 뿐이다.


그는 흔들림 없이 대화를 이어간다. 어떤 책에서 이 성향은 <소통에 어려움을 겪음>이라고 나온다. 종종 그는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신념과 이론에 기반한 이야기로 상대를 움직이고 싶을 때, 절대로 중간에 멈추지 않는다. 그럴 때 그의 눈앞에 아무도 없는 듯도 하다. 혹은 눈앞에 있는 이만 세상에 존재하는 듯 하다. 100퍼센트의 집중과 100퍼센트의 비현실감을 동시에 지닌다.


말의 트랜스 상태.


보통은 그 트랜스 앞에서 당황하거나 경계를 만든다.


나는 트랜스를 좋아하고 그걸 다룰 줄 안다.


이 병이 유전일 거라고 믿는 그 마음이 유전 아닐까. 잘못된 운명을 끊지 못하고 받아들이는 그 마음의 상태가 유전인 건 아닐까.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나는 반드시 그 병에 걸릴 것이다, 나는 그들처럼 살게 될 것이다* 계속 계속 생각하면, 그런 병에 걸리고 그들처럼 살게 되는 것. 사람들이 그런 걸 운명이라고 부르는 건 아닐까. 그렇지만 너는 거절했잖아. 너는 한번, 너의 가족과 나라를 거절했잖아.


(그는 ‘리젝트’란 영어 단어를 쓰고는 그게 맞는지 싶어 고개를 갸웃한다)


의자를 뒤로 빼고 일어서며 나는 더이상 어지럽지 않다는 것을 눈치챈다. 그의 말을 더 듣고 싶어 나는 아직 좀 어지러운 척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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