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은성 May 21. 2018

예쁜 표정이 아니어도  

 그는 찡그리고 무뚝뚝하고 폭소를 터뜨리는 나를 열심히 촬영했다. 

엄마는 '나이트 삐끼'에게 내 차림새를 변명했다 

‘샴푸 나이트, 마두역 8번 출구’라고 쓰인 명함을 나에게 주는 남자에게 엄마가 겸연쩍게 웃으며 말했다.     

아이고. 지금 얘가 꾸미지도 않았는데...몸이 안 좋아가지고 대충 하고 나왔는데...

대상포진 진단을 받고 본가에 쉬러 간 날이었다. ‘뻐꾸기’란 닉네임을 지닌 나이트클럽 호객꾼(이 직업의 정확한 명칭이 뭔지는 모르겠다)에게 엄마가 내 부족한 차림새를 변명했다. 딸이 깔끔하게 꾸미고 하고 나오지 못한 이유를 그에게 설명해 주고 있었다! 남자는 계속 실실 웃으면서 “여기 물이 좋아요. 오늘 꼭 오세요.”라며 우리 뒤를 따라 1미터 정도 걸었다. 비도 오고 전단도 잔뜩 남고 짜증나는데 재밌다, 싶었을까.

     

나와 뻐꾸기 사이의 엄마는 곤란한 건지 웃음이 나오는지 모를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얼결에 당황해서 나온 우스개 소리였을 거다. 잘 안다. 기분이 상하지는 않았다. 나도 속으로는 쿡쿡 웃고 있었다. 그녀의 속마음을 상상했다. ‘쟤는 아무리 아파도 어쩜 저렇게 추레하게 하고 밖에 나왔을까’라는 한탄과 ‘그래도 내 딸이 아직 나이트 전단을 받을 외모는 되는군’ 라는 안도감 사이의 어딘가일까?





어릴 때는 외모 평가에 곧잘 마음을 다치곤 했다. 가장 잘 나온 셀피를 골라 포토샵을 하고 "조명빨이 좋았다" 정도의 겸양표현을 써서 올렸던 '싸이월드' 시절에 특히 그랬다. 셀피에 달리는 조회수와 댓글을 1분 간격으로 체크할 때는 그랬다. 지금은...누가 나를 '못생긴 사람'으로 부른다고 해도 웃고 말 것 같다. "그래요?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는군요!"라고 말할 테지. '못나져서' 편해졌다. 그렇게 변했다. 이제는 엄마가 딸의 외모에 대해 걱정하는 것에 덤덤해졌다고 쓰기 위해, 말이 길었다.


너무도 이해한다. 엄마에게 어떠한 악의도 없으며,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도 엄마의 책임이 아니란 걸. 딸이 엄마의 자아반영이며 결과물이며 성적표며, 그래서 딸이 예쁘고 영리하고 '시집을 잘가지 않으면' 몽땅 엄마 탓이 되어버린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는 건 엄마에게도 시험같은 일이라는 걸. 그래서 그냥 실없이 웃고 말았다. 3시간 전 엄마가 나를 본 순간부터 나를 '면역'시켜서, 어렵지 않기도 했다. 

"피부가 상했다, 푸석푸석하다, 오른쪽 뺨에 난 건 뾰루지니?(뾰루지가 난 줄도 몰랐다) 집에 가서 내 마스크팩을 해라, 오늘 너무 대충 입고 왔다!"  


그리고...엄마를 만난 3시간 동안 줄곧 “음...이 대사들을 다 모아서 ‘우리 엄마를 누가 말려!-전형적인 코리안 맘’이란 에피소드로 넷플릭스에 론칭해야겠어”란 생각을 하느라 정신이 팔렸기 때문에.      





문득 친구 이야기가 떠올랐다. 제왕절개를 한 친구가 가까스로 옷을 갈아입는데 늘어진 뱃살을 본 엄마가 “너 퇴원하자마자 다이어트 해야겠다”라고 말했다고 했다. ‘기분이 상하긴 했는데...화를 내도 좋을지 아닐지 모르겠다’고 친구는 말했다. 

바로 전날 목숨을 걸고 아이를 출산한 딸을 두고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다이어트라니 황당하고 섭섭했지만, 자신이 화를 낸다면 분명 엄마는 이렇게 말할 게 분명하기에 그냥 넘어갔다고 했다.      

“누가 너 수술한 거 맘 아프지 않대? 기특하고 대견하고 안쓰럽고, 가슴이 찢어지지! 그런데, 그건 그거고, 뱃살은 빼야 되는 거잖아. 엄마가 딸한테 그런 말도 못해?"     




“완벽하게 꾸민 상태, 흠이 하나도 없이 다듬어진 상태가 가장 아름답다”는 강박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났다‘고 쓰고 싶지만, 아쉽게도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나는 의존적인 사람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어떤 모습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하면 쉽게 긍정한다. 만약 불행하게도, 누군가와 사랑에 빠져 버렸는데 그가 풀메이크업을 하고 연약해보이는 표정을 짓기만을 원하는 사람이라면....1달 정도는 그런 모습을 연출할 것 같다. 


그래서 B의 도움을 좀 받았다. 외모를 바라보는 색다른 시선을 B가 건네줬다, 연애편지처럼. 우리가 만나기 시작할 무렵, 그가 찍은 사진을 보았을 때의 충격이란. “Beautiful!”이라며 보여 준 사진들을 받아들고 말문이 막혔다.      




‘이 사진 속 네가 정말 아름답다’는 말은, 농담인 줄 알았다. 적어도 K-뷰티적 기준으로 보면 모조리 망친 사진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과감하게 delete되고 휴지통에 버려질 사진들이었다. 태어나 자라면서 흠으로 지적 받아온 모든 요소들을 그는 아주 정성껏 부각시켜 찍어 놓았더라고!     


튀어나온 입술, 지나치게 넓은 이마, 작은 키에 비해 큰 얼굴, 자주 뾰루퉁해지는 표정, 집중할 때 찡그려지는 미간, 무뚝뚝해서 가끔은 ‘무서운 표정 하지 마’ 핀잔을 듣곤 했던 분위기. 그 모든 못난이 요소가 한 컷에 들어가게 찍은 사진도 있어서 '와, 이것도 재주라면 재주네.'하고 감탄했다. 엄마는 그가 프랑스 여행 중 날 찍은 사진을 보고 까르르 웃으며 “니 애인 니 안티냐”라며 웃곤 했다.      


한국에서 태어난 이상, 얼굴에서 완벽하지 못한 부분은 그야말로 공.공.평.가 대상이었다. 친한 사람들은  ‘오리’라고 놀리곤 했다. 입이 나왔단 소리다. 두 번 본 사람이 진지하게 “코를 세워. 그럼 입이 들어가 보여. 너는 코만 세우면 대박 날 얼굴이야.”라고 한 적도 있다. 지하철에서 우연히 3년 만에 만난 사람이 “아직도 주근깨 제거 시술 안 했니?” 라며 나를 게으른 사람 취급한 적도 있다. 피부과 명함도 지갑에 꽂아주고 갔다. 



도무지 방심할 수가 없었다. 하나를 고치면 다른 걸 지적받았다. 완벽이란 없었다. 체중을 10킬로그램 뺀 적이 있다. 당연히 지치고 피곤해 보인다는 말을 들었다. 한 줌의 악의도 없이 이런 말을 한 친구도 있다. "광대가 너무 튀어나와서 고집세 보여. 키이라 나이틀리 안 예쁠 때 같다.딱 2킬로만 찌워." (살 빼본 사람은 안다. 다이어트 후, 아주 조금만 찌우자고 마음 먹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쓰나미가 몰려온다)


피부가 흴 땐 창백해 보인다는 말을 들었고 좀 태우고 나니까 ‘너는 피부 흰 게 장점이었는데...’라고 말하더라. 바람이 불어 이마가 넓게 드러날 때마다 엄마는 머리칼에 손가락을 끼워 공기를 넣곤 했지. “이렇게 해야 얼굴이 작아 보여.” 참, 나 좋다는 남자가 생기면 엄마는 영락없이 이렇게 진단했었다. “새침하게 살짝만 웃었나 보구나. 너는 이가 다 보이게 웃으면 안 예뻐. 무표정해도 안 예쁘고. 입꼬리를 올려서 살며시 웃으면 아주 예쁘지.”    


코는 낮으면 안 되고 너무 뾰족해도 안 되고, 이마는 너무 좁아도 넓어도 안 되고, 안 웃으면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많이 웃어도 안 되고!      




나를 지치게 한 말들을 떠올리며, 다시 사진을 보았다. 액션 영화나 코미디 영화의 스틸 컷 같았다면 적당한 표현일까. “이토록 표정이 다채로운 사람이었구나 내가. 뒤늦게 배우나 될까?” 중얼거렸더니 그가 웃었다. “나중에 내가 영화를 만들 거예요. 주인공 시켜 줄게요.”      


사진 속의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았다. 웃는 일 말고는 세상에 중요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웃는 사람. 긴장도 걱정도 후회도 열망도, 아무 것도 없이 그저 웃기에만 최선을 다하는 사람.  울때도 찡그릴 때도 화낼 때도 그랬다. 순간의 감정이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보였다. 인생의 희노애락을 얼굴로 표현하려고 애쓰는 부류. 

"나는 언제나...화났다고 입 좀 삐죽대지 말라는 말을 들었고 웃음은 참지를 못해서 사회생활에 방해되는 얼굴을 가졌다고 생각했어."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는 동안 그는 계속 몰래 몰래 내 사진을 찍었다. 카메라를 눈치 채고 서둘러 입을 다물고 입꼬리를 올리면 절대로 셔터를 눌러주지 않았다. "재미없어요!" 하면서. 

그는 내가 살아움직일 때  사진을 찍고 싶구나, 싶어서 그렇게 뛰놀았다.  


그냥 재미있게 마구 놀았다. 흥이 나면 춤을 추고 슬프면 엉엉 울고 화가 나면 삿대질을 했다. 바다에 가면 바람을 맞으며 뛰다가 머리칼이 얼굴을 온통 가리고, 놀다가 모래가 잔뜩 묻고, 놀고 나니 배가 고파 음식을 입에 잔뜩 물고 행복해 했다.

2년 후 사진첩은 총천연색이 되었다. 사진을 보면 그 순간과 순간의 감정이 선명하게 떠오르지만 sns에 올리기는 좀 어려운, 아주 다이내믹한. 


나는 "언어 대신 표정으로 소통한다"라는 제목을 그 사진첩에 붙여주고 싶었다. 그가 한 시시한 프랑스 농담에 눈을 >_< 모양으로 감고 이가 쏟아지도록 웃고, 원고가 안 풀려서 눈꼬리가 잔뜩 올라가 있고, 12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짜증이 잔뜩 나서 길바닥에 죽은 파리처럼 널부러져 있고, 스테이크가 나오길 기다리며 기대감에 부풀어 있고, 뭔가를 궁리하고 해결하느라 미간을 힘껏 찌푸린 내가 있었다.         

  



엄마는 '남의 집 딸들'처럼 화사하게 꾸미지도 상냥한 표정을 짓지도 않는 딸을 보고는 "그래. 서양남자랑 결혼한 여자들보면 한국 여자인데도 무뚝뚝하더라. 잘 웃지도 않고. 자기 할 말 하고. 화장도 잘 안하고."라며 칭찬인지 포기인지 모를 말을 한다. 


(모르겠다. 외모에 관한 글은 어떻게 써도 욕먹기 좋은 글이라서, 쓰면서 계속 망설였다. 글을 쓰다만 채 아주 오래 묻어두었다. 하지만 글을 어딘가에 올리는 순간, 그 글은 내 것이 아니고, 살아움직이며, 돌아와 더 좋은 글로 완성되도록 만든다는 진리를 믿고 후루룩 마무리지어 버리려 한다.)


지금은...내가 좋아하는 일을 할 때 물리적, 정신적으로 방해가 되지 않는 외모 상태면 충분하다. 크리스마스나 생일처럼 특별한 날이라면 꽃무늬가 흐드러진 파란 드레스를 꺼내 입겠지만,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부슬거리는 머리를 한데 모아 묶고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어도 괜찮다. 내가 지금 집중하고 있는 아름다움은 글 속에 많으니까. 그리고, 굳게 다문 입술과 찡그린 미간이 아름답지 않을 건 뭔가.


하지만 전에 풀메이크업에 스커트를 입고 다닐 때 만났던 사람을 오랜만에 만날 때는 서둘러 “귀찮아서 요새 안 꾸미고 다녀.”라고 말해버리는 경우도 있다. 한국에 사는 이상, 외모 강박으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운 개인이 있을까.      


완벽하고 깔끔한 외모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나는 여전히 오락가락한다. 다만 지금 이렇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얼마 전 쓴 일기 중에서 몇 줄 옮긴다. 이 마음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노력하는 중이다. '세상의 잣대에 맞춰 완벽하게 아름답지 않아도 된다, 그런 아름다움이 가져다 주는 이득을 여러 가지 알고 있지만, 나다움을 포기해야 한다면 거부할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프랑스의 고부갈등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