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일 년에 세 차례 우리는 한 집에서 오래 지냈어요. 한 번은 성산동 저희 집에서, 두 번은 남프랑스 산골 시댁의 돌집에서. 눈뜨면 마주치는데 계속 불편하게 지내는 것도 아무나 못하겠더라고요. 매일 기합이 딱 들어가서 눈치 보거나 경계하거나 하며 지내는 게 더 어렵겠더라고요?
매끼 신선한 텃밭 채소로 혀가 녹을 것처럼 맛있는 요리를 해주고, 손수 바느질한 냅킨을 내 쪽에 놓아주고, "애는 언제 가질 건지 남편 아침은 챙겨주는지" 같은 질문을 일절 안 하는 사람을 미워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하루 어색하고 하루 친하고, 그 하루가 이틀로 사흘로 길어지는 식으로 우리는 서서히 가까워졌습니다.
남프랑스, 특히 지방 쪽은 굉장히 가족적이에요. 여름이면 한 집에서 스물이 넘는 대가족이 휴가를 보내는 것도 일반적이고요. 집도 산중턱에 있어서 차 없이는 못 나오니, 왠만하면 세끼를 다 함께 먹으며 지냈습니다. 영화를 보거나 책, 신문을 읽어도 거실에서 다함께 머물기도 했고요.
게다가 프랑스 식탁에선 라디오나 텔레비전도 없이, 오직 대화, 대화, 대화 뿐이에요! 불어는 못하지만, 혼자 접시만 바라볼 수는 없으니(내가 수다 떠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데! 나빼고 대화하게 둘 순 없지!) 손짓 발짓으로 대화에 참여하곤 했습니다. 제 보디랭귀지에 웃음이 자주 터졌죠.
처음엔 의아했는데 지금은 잘 알 것 같아요. 내가 왜 그녀를 좋아하게 됐는지, 그 이유를. 저는 원래 재촉하면 멀리 도망가요. 도미니크는 저를 기다려줬어요. 한번도 재촉하지 않았죠. 사춘기 아이를 둔 좋은 엄마처럼, 조용히 기다렸습니다. 제가 물어본다면 이렇게 대답할 것 같아요. “우리는 알게 된지 얼마 되지 않았잖아. 친해지기를 천천히 기다리는 건 너무 당연하잖아.”
또 있어요. 그녀는 아무것도 가르치려 들지 않았어요. 그녀가 잘하는 요리나 재봉에 대해 내가 물어보면 (기다렸다는 듯) 굉장히 기뻐하며 아주 상세하게 가르쳐 주었지만, 제가 질문하기 전에 먼저 가르쳐 준 적이 없어요. 그게 쉽지 않은 일이란 걸 저는 알아요. 돌아보니, '시어머니'라는 존재가 '며느리'란 존재인 나를 평가하거나 가르치려고 하지 않는다는 확신이 제게 필요했던 것 같아요. “누구도 너를 공격하지 않아.”라는 확신을 다지고 안심하기 위한 여러번의 휴가가.
어쩌면 그녀에게도, 저와의 관계가 쉽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어떤 언어도 통하지 않는, 스마트폰을 좋아하고, 가끔 방에서 훌쩍훌쩍 울고, 일주일에 한 번은 매운 라면을 아주 소중하게 먹고, 한국에선 글을 쓰며 산다는, 갑자기 자신의 아들이 사랑에 빠져버린 검은 머리 여자. 처음 만나는 존재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몰라서, 그냥 할 수 있는 만큼만 친절하고 할 수 있는 만큼만 친해졌을 수도 있을 거에요. (언어가 통하지 않으니 속속들이 마음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건 처음엔 그냥 아들의 친구 정도로 나를 대했다는 것, 그게 제게 중요했어요.
누군가에 대해 ‘귀엽다’고 느끼면 마음은 무장해제 되어 버리잖아요? 집안일에 완벽을 기하는 그녀의 성격과 도도한 외모 때문에 여전히 허물없이 대하지는 못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도미니크가 너무 귀엽게 느껴지는 거에요! 한국 아버지들 아침밥 찾듯이 시아버지는 빵에 심하게 집착하십니다. 하루 대화 중 많은 부분이 ‘빵’이었어요.
“아니! 새 바게트가 없다니 이렇게 큰일이!”
“빵....빵이 없네....빵을 사왔어야 하는데...”
“빵이 눅눅해졌군. 이건 새들을를 위한 밥이다! (빵가루로 부숴서 새들에게 훠이훠이 뿌림)”
시아버지의 빵타령이 이어질 때마다 ‘안 들린다 안 들린다’는 표정으로 콧노래를 부르는 도미니크. 웃음이 터졌어요. 불편한 건 절대로 안 하는 시아버지가 안전벨트를 안 매서 차에서 계속 경고음이 날 때도, 그녀는 이어폰을 끼고 샹송을 부르더라고요. “엄마가 요새 노래교실 다니셔서 시도 때도 없이 노래 부르셔....”라며 남편은 계면쩍어 했지만, 저는 그 순간의 공기가 참 좋았어요. ‘아아, 은근히 귀여운 사람이야...’
한번 마음이 열리면 그 다음엔 그저 그 흐름을 지켜보면 돼요. 마음이, 관계가 어느 방향으로 갈지는 내가 정하는 게 아니죠. 태어나 처음 맺어본 관계인 ‘시어머니’, 그 파리 출신 여성에 대해 나는 친구처럼 느끼기 시작했어요. 그녀의 개성을 관찰하고 그것에 대해 조근조근 생각했어요.
자신의 남편을 여전히 아주 많이 사랑하는 것, 뭔가 설명할 때 나처럼 묘사를 많이 하고 손 제스처를 활발하게 사용하는 특성, 잠옷을 입고 스도쿠를 푸는 취미를, 나와 이야기하기 위해서 영어공부를 하다가 “나이가 너무 들어서 머리가 안 돌아가” 낙담하다가, 점수가 잘 나오면 아이처럼 웃는 모습을 바라봤어요.
상대를 티 없이 바라보기, 나의 혼란을 타이르기. 긴 휴가 동안, 오직 그것만 했어요. 속으로 여러 번 나 스스로를 타이르면서요.
“친구 집에 놀러온 정도로만 행동하자. 도울 것은 돕고 신경 꺼도 된다. 여기서는 아무도 나를 사사건건 평가하지 않는다. 아무도 내가 과일을 잘 깎는지 감시하지 않는다. 아무도 내가 손끝이 여문지 아닌지 논하지 않는다. 아무도 나에게 아들 낳으라고 하지 않는다. 브래지어를 차든 안 차든 혀를 차지 않는다. 저거 봐 도미니크도 안 했어 흑흑흑....”
쓰다보니 또 눈물이 날 것 같아요. 고된 시집살이로 건강을 다 망친 우리 엄마가, 왜 그렇게 떠올랐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게 놀랍도록 자연스러워졌어요. 내 친구의 엄마라면, 내가 참하고 싹싹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엄마! 배고파요. 라면 끓여주세요!” 해도 되잖아요? 흥이 나면 박수를 치고 요리가 맛있으면 춤을 추는 나를 그냥 재밌어해 주겠죠. 나에게는 그 정도의 ‘거리’가 필요했던 것 같아요.
‘아, 나는 현명하고 싹싹한 며느리가 아니어도 괜찮구나.’
‘어딘가에 갈 때 내가 시어머니의 수행비서가 되지 않아도 되는구나.’
어느덧 나는 나답게 행동하기 시작했어요. 며느리라는 ‘역할’이 아니라, 그냥 김은성답게. 함께 미술관에 가든 시장에 가든 어머니를 ‘모시고’ 다니기 보다는, 친구처럼 나란히 걸으며 작품에 대한 감상을 나눴어요. 괜스레 그녀의 책장도 궁금해졌어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책들이 여러 권이더라고요.
“나도 <연인>을 여러 번 읽었어요. 어떤 문장을 좋아하는지 손으로 짚어 주세요. 궁금해요.”
그녀는 영어에 서툴고 나는 불어를 못하지만, 통역 없이도 대화는 굴러갔어요. 갑자기 그녀와 함께 하고 싶은 게 많아졌습니다.
‘나는 글쓰기를 좋아하니까 책 이야기를 나누면 되는 거야. 시어머니와 꼭 해야 하는 대화 주제란 없어. 시어머니와 이런 관계가 될 수도 있구나. 아아...사는 게 너무 너무 신나고 재밌다!’
다음 휴가에는 프랑스 요리를 배우고 싶단 핑계로 그녀와 단둘이만 부엌에 자주 머물렀어요. 공통된 언어가 없어도 자주 웃음이 팝콘처럼 튀었어요. 다다음 휴가에는 그녀의 단골 패브릭 숍에 따라갔습니다. 도미니크가 제가 사려는 분량의 두 배로 점원에게 말해주어서 카드 값이 많이 나오긴 했지만, 즐거웠어요.
내 마음의 추가 도미니크 쪽으로 훅 기울어진 순간이 있어요. 그녀의 예전 직업을 묻던 중이었는데, 대화를 끊고 갑자기 디저트를 가지러 부엌으로 가더라고요. 언제나 지나칠 정도로 매너가 좋은 그녀였기에 굉장히 놀랐죠. 돌이켜보니, 세 아이를 위해 근무 시간이 적은 직업으로 바꾸던 때를 이야기하던 중이었습니다.
프랑스에선 아이들이 점심을 집에 들러 먹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는 일이 있었어요. 도미니크는 자연식 철학을 가진 시아버지가 원하는대로 점심때마다 집으로 돌아와 식사를 준비했던 거죠. ‘지금 내가 먹는 이 자연주의적 식탁은 그녀 삶에서 포기한 커리어의 뒷면이구나’ 생각했어요. 그녀는 서글픔일수도 후회일수도 있는 표정을 감추러 홀로 주방으로 향한 거였을 거예요.
“언젠가 내가 불어를 잘하게 되면 둘이 한잔 하면서 시아버지 흉을 1박 2일 캠프로 봐 주겠어!‘ 생각했습니다. 시어머니는 전 세계를 뒤흔든 68혁명 세대였고 페미니즘 단체를 오래 지원하기도 했죠. 젊었을 때는 이공계 연구원이었다가, 농부의 아내가 되면서 시골에 살게 되고 도서관 직원으로 커리어를 바꾸고 세 자녀를 자연식으로 키운 엄마. 복잡한 마음이 들었어요. 그녀를 한 명의 여성, 나와 다른 시절을 산 여성으로 바라보게 됐습니다.
사람이 역할로 존재할 때, 그 역할에 따른 의무를 성실히 수행해야 할 때, 그리고 그 의무 수행을 감시받을 때 굉장히 불행해집니다. 시어머니와의 관계도 처음엔 그랬습니다. 그러다가,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할 도리만 다 하는’ 관계, 서먹하긴 하지만 나쁘지는 않은 관계 정도라도 유지하자고 계획을 세운 순간, 희한하게 마음이 편해졌던 건 왤까요.
의무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좋은 사람이라는 이유로 친구가 되고 싶어졌다는 게 기뻤어요.
인간에게 사춘기가 오면 그 존재는 방황을 시작해요. 그건 세상에 묻는 거라고 해요. “나는 누구에요? 나는 어떤 존재에요?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해요?” 아기가 커서 소년, 소녀가 되기까지 그 존재는 자신의 존재의미를 물을 필요가 없어요. 그냥 성장해 나가죠. 그러다 십대가 되어서 머릿속에 물음표가 가득차면 평소와 다른 이상한 행동을 하게 돼요. 스스로에게 화가 나기도 하고 세상을 미워하기도 합니다.
돌이켜 보니 나는 ‘고부관계 사춘기’를 홀로 격렬히 앓았던 것 같아요. 누군가는 ‘며느라기’ 시기에 눈치를 심하게 보고 의무를 떠안으며 곱고 싹싹한 며느리가 되려고 과도한 노력을 하기도 하죠. 저는 그 지향에 대한 반감과 의무감 사이에서 갈팡질팡 했던 것 같아요. 이런 고민에 오래 잠겨 있었죠.
“내가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다고 해서 갑자기 그 남자의 가족들에게 ‘착한 며느리’의 전형이 되기는 정말 싫다. 그리고 여기는 한국이 아니니까 그럴 필요도 없다. 대체 그러면 난 무엇이 되어야 하는 걸까.”
이런 고민을 할 시간이 제게 주어져서 참 다행이었다고 생각해요.
이제 결론을 쓸게요. 저는 도미니크를 좋아하기 시작했어요. 싱겁게도 그냥 시간이 해결해 주었습니다. 만약 픽션이라면 관계의 양상이 변할 때 극적인 계기나 이유가 필요하겠죠? 하지만 우리 삶은 논픽션이라서, 관계는 어이없이 좋아지기도 나빠지기도 합니다. 하긴, 사랑도 그렇잖아요? 특별한 이유 없이, 시간이 흘러서 잉크처럼 스며드는 사랑도 있는 거니까.
그리고, 언제든 어떤 이유로든 관계가 나빠질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걱정하지는 않아요.
내가 '선택'한 관계니까, 언제든 어떤 이유로든
내가 다른 방향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것도 알고 있기 때문에.
모두 다, 괜찮아요. 쎄라비!
<프코부부>
글: 김은성 그림: 바티
프랑스어 모르는 한국여자, 한국어 배우는 프랑스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어느나라 말로 부르건 들은 척 안하는 고양이 미코와 한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국제부부의 생생한 삶을 담은 다큐적 에세이를 써 볼게요.
1 화요일마다 '더퍼스트미디어'에도 연재됩니다.
2 마감 있어야 굴러가는 인간...
원고 더 쓰고 싶어요. 편한 맘으로 원고 의뢰 주세요:) purplewater@hanmail.net
*5월 27일 일요일에 남편 바티와 작고 소박한 유기농 마켓을 열어요. 무농약 유기농 서양채소와 유기농 쿠키가 판매돼요. 페이스북 페이지 ‘소잎’ 검색해 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