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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은성 Jul 18. 2018

제주 귤처럼 상큼한 너의 거절 메세지

'거절할게'라고 제때 말해야 한다. 아프지 않기 위해서 

햇살이 선물 같은 날이었다. 아이보리와 연 베이지색으로 잘 정돈된 마루, 잎사귀가 도타운 화분도 보기 좋았다. 그녀가 좋아하는 톤이다. 화사하면서도 수선스럽지는 않은 것들로 자신을 둘러싼 채, Y는 피스타치오를 아주 열심히 까고 있었다. 


“언니, 이게 몇 달 전 태국여행 때 사온 거예요. 껍질 채 파는 게 더 좋은 거거든. 이제야 껍질 벗길 시간이 났지 뭐예요. (굉장한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 크게 웃었다) 서울에 있을 때도 시간은 있죠. 그런데 앉아서 피스타치오 껍질 깔 시간은 없어요.” 


글로 적으면 대수롭지 않은 말을 힘주어 하는 게 그녀의 특기다. 이거 정말 맛있죠, 이거 진짜 최고지 않아요, 와 이거 정말 대박이야. “그래. 괜찮네.” 같은 작업실을 쓰는 나와 H가 오전에 이렇게 대답하면 오후에 재차 물어본다. 

“다시 생각해도 이거 진짜 끝내주지 않아요?”

 

우리가 큰 소리로 '그럼그럼, 진짜 끝내준다, 네가 고른건데 당연하지'라고 대답하면 그제야 씩, 하고 웃는다. "언니들도 눈높네!" 그 말에 우리는 "Y처럼 살아야 해. 우리도 저렇게 살자"며 쏙덕거린다. 


그게 Y가 세상에 즐거움의 돋보기를 들이대는 방식이다. 좋고 좋고 좋고 너무 좋다,고 반복해서 말하면 기쁨은 더 크게 피어오른다. 좋은 것을 덜 말할 필요가 있나, 돈 드는 것도 아닌데. 그런 좋음의 속도로 Y는 피스타치오를 계속 깠다. “견과류 까는 거 왜 이렇게 재미져!” 긍정에너지로 까여 쌓여가는 피스타치오. 윤기가 흐르는 고소한 알맹이가 너 같았다. 너, 겨우내 먹을 양식을 양볼에 넣어서 바지런히 동굴로 향하는 작은 토끼처럼 보여. 

     


Y는 제주에 집을 얻어 살러 왔다. 서울에서도 잘나갔는데 제주에서도 잘나간다. 의미는 전혀 다르다. 서울에서는 9 to 5로 일했다. 데스크 워크를 마치면 저녁에는 클라이언트에게 식사를 대접하러 맛집으로 재출근했다. 피로할 적마다 씩 웃는 버릇이 있었다. 짜증을 내거나 찡그리거나 찌푸리면 행복이 달아날 것처럼, Y는 언제나 진심으로 미소를 지었다. 가끔 작업실의 작은 방 문을 열면 핑크색 요가매트에 외출복을 입고 누워있곤 했다. 폭 쓰러진 얼굴이 새하얬다. 


제주에서 Y는 노란색으로 보인다. 계란꽃같다. 일하는 틈틈이 쑥도 캐고 멸치도 말리고 견과류를 손질하고 그릭 요거트도 만든다. 일이 아닌 즐거운 것들을 캐내러 쏘다닌다. 성취도와 상관없이 그저 충만한 것들로 하루를 열심히 채운 뒤에 또 말한다. “아오. 사는 거 왜 이렇게 재미져!”     

 

5월에 나와 남편은 Y의 제주 집에 놀러갔었다. 그녀가 ‘인고의 요거트’를 만들어 말린 베리를 듬뿍 뿌려 차린 아침을 우걱우걱 먹으며 Y의 요거트 찬사를 들었다. 

“그릭 요거트 너무 맛있죠? 요게 완전 정성이에요. 면보에 요거트를 올려서 하룻밤 둬야 해요. 그걸 어떻게 기다려? 그런데 제주에서는 기다려져요. 요거트에 물이 다 빠지면 아주 쫀득하고 고소한 그릭 요거트가 돼요.(듣다 보니 당장 우유와 면보 사러 가고 싶어진다) 이것도 서울에서는 할 시간이 안나요. 시간이 있긴 한데. 알죠? 서울에서는 우리 늘 시간 없잖아요.”      


우리 부부는 배를 두드리며 사라봉으로 산책을 나갔다. “잠깐만!” 하더니 벽에 걸린 모자 두 개를 우리 머리에 각각 씌워 주는 Y. “언니, 제주 볕은 진짜 볕이야. 새카매져요. 주의해!” 

아마도 그녀의 애인 것일 군모는 큼지막해서 B의 고수머리가 쌈처럼 폭 싸였다. 모자가 커서 어색하면 안 써도 된다는 말에 B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저었다. “Y가 쓰라고 했잖아.”      


Y는 외할머니처럼 달다구리 주머니를 싸주었다. 팥소가 묻은 오메기떡, 초코바, 캔디, 강정이 수북했다. “누가 보면 멀리 여행가는 줄 알겠다”하고는 그것들을 낼롬낼롬 꺼내먹으며 언덕을 걸었다. 사라봉은 이름만큼 근사했다. 마을에 사라봉이 있다는 것은 거주 결정의 이유가 될 만했다. 오르는 길의 모양도 꽃도 새도 다 귀여워서, 뻔한 표현이지만 꽤 동화적이었다. 


봉우리에 올라 Y의 ‘페이보릿 의자’에 앉으니 제주 시내가 환하게 보였다. 좋은 장소에 가면 조급증이 낫곤 한다. 눈을 감으니 풀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사르륵 사르륵 했다. 머릿 속을 꽉 메웠던 것들을 다 버려도 될 것 같았다. 서울의 좋은 것에 ‘안녕’하고 짐을 꾸린 Y가 단숨에 이해되었다. 

“여기 매일 오르면, 누구도 부럽지 않겠다." 



한참 뛰놀다 보니 끼니 때가 되었다. 보말 칼국수 집에 함께 가자고 메시지를 보냈다. 답장을 받고 1초 정도 당황했다. 

“나는 집에 있을래. 씻고 못 나간다. 둘이 맛있게 먹어요.” 


아, 이토록 상큼한 거절. 단지 집에 있고 싶어서다. 외출을 하려면 선크림을 바르고, 파자마 바지를 청바지로 고쳐 입고, 신발에 발을 꿰는 수고를 해야 하니까? 거절을 한다. 거절 메시지에는 단 10초도 걸리지 않았다. “Y는 피스타치오를 더 까고 싶어서 밖에 나오지 않기로 했대.” 

B는 끄덕끄덕 했다. “그렇구나. Y는 피스타치오 까기를 좋아하는구나.”

Y는 전생에 다람쥐였나 봐, 하면서 우리는 웃었다.       




Y의 거절은 너무 상큼해서 따라하고 싶어진다. 때로는 '뭐 거절할 것 없나' 찾게 될 정도로, 유혹적이다. 젊은 사람이 야심이 없다는 걱정도, 너무 포기하고 사는 것 아니냐는 핀잔도 가벼웁게 거절했다. 거절의 이유를 구구하고 진지하게 설파하는 대신, 그녀는 자기 방식대로 말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힘주어 또 말한다.

“제주 진짜 너무 좋아요. 2주만 살아보세요. 집 알아보게 될 걸?” 


사라봉이 좋고 제주섬 구석구석 재밌는 게 많이 숨어있고 자신은 재밌는 걸 좋아한다는 이유로, 큰 성공과 더 많은 돈을 안 가져도 괜찮다고 말했다. 하긴 뭐 어때. 내 No에 상처받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야. 그렇지? 오전의 여유를 위해 칼국수 런치를 거절할 때와 비슷한 정도로 Y는 남과 비슷한 삶에 No라고 말했다. 상큼한 제주 귤처럼.      



나는 Y처럼 하지 못했다. 어정쩡하게 No인간이 되었다. 나는 서울에서 Y처럼 산다. 전원적이라고, 자연친화적이라고, 힙스터라고, 인생 즐기며 산다고 말해주는 사람도 있다. 남프랑스 시골농부 스타일인 남편 덕에(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느림보 인생을 살게 되었다. 하긴, 그덕에 큰 수술 안하고 살아남았는지도 모르겠다. B와 만나던 초반에 응급실을 몇번 갔다. 놀란 B는 내가 일을 많이 할 때마다 미간을 찌푸렸다. 사랑하는 사람이 찡그리는 건 싫으니까, 일을 하나 하나 줄였고 그러다 보니 반백수 인간이 되었다. 


산과 들을 쏘다니며 취재를 할 때에는 늘 고꾸라졌다. 1주일 일하고 1주일 아프기를 반복하면서도 버리지 못했다. 건강이 급속도로 안 좋아져서 달리는 버스에서 어지러움으로 뛰쳐내리기를 여러 달 한 뒤에야 일을 줄이고 휴식을 늘렸다. 건강을 위해 어느 정도의 수입을 포기했다. 이 부분이 가장 어려웠다. 스스로 쪼그라드는 기분, 미래에 대한 두려움, 루저가 된 기분이 사소하게 들었다. 

     

일을 많이 하면 병원비가 더 드니까 어쩔 수 없었지. 그래서 성공을 거절했지. 새벽같이 나가서 밤늦게 돌아오는 일정을 포기하니, 시간이 많았다. 집에서 텃밭 야채를 천천히 열심히 구워서 점심으로 먹고 산책을 할 수 있었다. 느슨하게 사는 생활에 적응하는 데에 시간이 필요했다. 내 안의 선생님이 너 정신 나갔냐구 자꾸 야단을 치셨다. 선생님과 자꾸 싸웠다. 잔소리 그만 하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모범생 병은 쉬이 낫지 않았다. 선생님이 계속 떠들었다.      

남들은 다 견디는데 왜 너만 아파? 

다른 기자들은 밤샘 해도 코피 한번 안 흘리는데 왜 넌 그 모양이야?

노년에 크게 후회한다. 잠은 죽어서도 잘 수 있다잖아. 

운동을 빡세게 하면 덜 아프지 않을까 (그러나 운동할 체력이 당장 없다)       


그게 몇 년을 갔다. 선천적으로 체력이 약한 사람은 평생 일을 적게 해야 한다는 자명한 사실을, 어디서도 배운 적이 없었다. (TMI: 27살에 내 콩팥이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의사말로는 괜찮다고 하는데, 콩팥 하나인 사람들 4명에 대해 들은 바 '모두 일 체력이 약하고 멀미가 심하며 쉽게 지친다'고 한다) 


아는 동년배들은 이제 밤샘을 하지 않는다. 크고 작은 병에 걸려 수술을 한 사람도 숱하다. 그런 것을 봐도 조바심이 멈추지 않았다. “아직 안 걸렸잖아. 게을러. 게을러서 핑계 대는 거야. 몸 사리지 마”   


            


욕심 많은 모범생은 오늘도 흔들린다. 마음 속 선생님도 지쳤는지 핀잔과 재촉의 소리는 꽤 누그러들었다. 

그래, 네 멋대로 살아라. 후회를 하든 말든. 

불안해질 때마다 작업실 벽에 붙은 글씨를 본다. 

'Y처럼 살자'


원하지 않는 것에 No라고 말하는 것.

굳이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 것.

빈 손에는, 원하는 것을 덥썩 쥐고, 그것을 아주 열심히 칭찬하며 사는 것. 


"언니, 행복이 별거 있어요? 좋은 사람들이랑 맛있는 거 먹으면 그게 행복이죠."

Y의 귤같은 목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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