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은성 Jul 19. 2018

스몰토크는 다정해야 해서 어렵다

마음의 온도를 대화의 온도로 정확히 변환하기 위하여

무뚝뚝함은 소심함과 서투름의 콜라보다. 살가운 배려에 깜짝 놀라 움츠렸던 순간들이 많았다.      


1.

자는 척 하는 게 특기다. 밤샘 마감을 하다가 소파에서 쪽잠을 붙인 내게 이불을 끌어내려 덮어주는 선배가 있었다. 발이 나왔네, 속삭이면서. 눈을 뜨고 싶었지만 또 자는 척을 했다. 잔정 앞에서 나는 늘 수줍다. 못 들은 척 한다.

 

2.

H는 멋쟁이였다. 옷도 멋을 내어 입었지만 말도 멋을 잘 부렸다. 어떤 밤에 그가 물었다.

“저녁밥은 오른쪽으로 씹었어요, 왼쪽으로 씹었어요?”

나는 무도회에 한 번도 나가보지 않아 사교란 것을 모르는 시골 소녀처럼 툭, 하고 답했다.

“어? 오른쪽?”

귀여우려고 작정했느냐고 그는 물었다.

“아니. 진짜 오른쪽이라니까요.”

정직한 00씨네, 하고 그는 계속 웃었다.


추운 밤이 되면 그 순간을 곱씹었다. 살가움이었구나, 하고 늦된 아이처럼 깨달았다. 몇 명이냐고 묻는 식당 주인의 질문에 검지 하나를 들어올릴 때면 그 대화를 떠올렸다. 어적거리는 쌀밥을 씹으며 되내었다. 오른쪽, 왼쪽, 오른쪽, 왼쪽. 양쪽으로 고루 씹으면 나는 쉽게 즐거워졌다. 옹송그린 어깨를 폈다. 지금 나는 혼자지만 나에게도 다정한 사람이 있어.      


3.

전화 통화를 여전히 두려워한다. 누군가 내 통화를 들으면 한국어를 외국어로 배운 사람인 줄 알지도 모른다. 이런 식이었다. 클라이언트였던 디자이너 팀장님과의 통화였다.

“밥은 먹었어요?”

“(2초 정도의 pause) 아니오, 샌드위치 먹었어요.”


팀장님은 당황을 노련하게 숨기고 대답해 주셨다. “에이. 밥을 먹어야지.”

가끔은 말했다. “00씨는 말을 참 재미있게 해.”

그 ‘재미있다’가 ‘조금 이상하다’ ‘서투르다’와의 유의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누군가에 대해 “재미있는 사람이네.” 라고 말하는 것은 상대가 비사교적이어서 서로 어색해지고 싶지 않을 때 쓰는 대화 테크닉이란 건 아주 나중에 알았다.      


잘 지내냐고 물으면 ‘내가 잘 지내는가? 내가 지내는 게 well이 맞는가, 아닌가' 스스로에게 물었다. 상대와의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요즘의 내 상태에 대해 갑자기 궁금해졌다. “아니오. 그럭저럭이요.” 상대는 당황해서 화제를 바꾸기도 했다.


“어떻게 지내요?”  누가 물으면 이러기도 했다.

“네? 어떻게? 음...설명하기 좀 미묘한데요.” 바쁘시죠, 란 말은 현대 한국어 대화에서 “헬로, 하와유?”다. “아임 파인. 땡큐”로 관성적으로 대답하고 본론 넘어가면 된다는 소리다. 그때마다 나는 천치처럼 이랬다. “네?! 글쎄요. 이게 바쁜 건지 아닌 건지 모르겠네요.”      


4.

스몰토크는 다정해야 해서 어렵다. 실은 ‘점심 드셨어요, 잘 지내세요, 여행 잘 다녀오셨어요, 날씨가 덥죠’ 같은 말들이 ‘스몰토크’란 것은 학습을 통해 알았다. 어릴 때부터 '눈치'로 뭘 아는 경우가 없었다. 뭐든 공부했다. 스몰토크 학원은 없을까, 찾아보다 스피치 학원 커리큘럼을 알아본 적도 있다.


목례 정도만 나누는 옆 부서 사람과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학원 수강을 마치고 나왔는데 얼굴만 아는 사람과 같은 방향으로 가야 할 때면 크게 당황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엔, 반대 방향으로 갔다. 그가 떠났는지를 보고 제 방향으로 돌아왔다. 부끄러워 볼에 홍조를 띈 초보 스파이처럼.      


5.

만화책을 많이 좋아했던 시절이 있었다. 길을 걸으며 두꺼운 그래픽노블을 읽고 있거나 그 책의 내용을 곱씹고 있을 때 길에서 우연히 지인을 만나면, 곤란했다. 못 본 척했다. 몹시 곤란했다. 아니, 왜 니가 거기서 나와.


미소를 짓고 인사를 나누어야 하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만화책 속 언어세계에 있는데 현실세계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니, 당혹스럽구만. "여어!"라고 할 수는 없잖아.


가끔은 로봇처럼 말했다. “나 지금 책 읽고 있었어서.” (입이여, 닫혀라!) 반대끼리 끌리기 마련이라 내 친구들은 모두 다정하고 능숙했다. ‘어쩌라고?’ 라고 하지 않아줘서 고마워. 내게 웃어주었다.

“재밌어 보인다. 책을 좋아하나 보네. 그럼 내일 봐!”  


그동안 다들 고마워. 나의 다정한 다이애나 배리.




6.

넷플릭스 <빨간 머리 앤>에서는 오랜 고아원 생활로 인해 일반적인 사교적 대화를 알지 못해 입만 열면 책 속 이야기를 쏟아붓는 씬이 나온다. 앤에게 공감할 문학소녀, 만화광은 나뿐이 아닐 것이다.    

  

7.

우리집은 작은 방을 에어비앤비로 활용하고, 나는 아침나절이면 마루에서 글을 쓴다. 게스트가 욕실이나 주방에 가려면 마루에 있는 나와 인사를 나누어야 한다. 덜컥. 문고리를 돌리는 소리가 나면 나는 순간 긴장하고 인사할 준비를 한다.


스테레오 타입을 말하자면, 유러피언은 주로 사교적이다. 지금 서울이 너무 덥다거나 너무 춥다거나 그도 아니면 날씨가 정말 좋다, 언제나 이렇게 날씨가 좋으냐고 질문을 한다. 커피를 끓이러 나왔던 한 런던 남자는 내 EBS 영어회화 책을 보고는 “영어공부하세요?”라고 스몰토크를 시작했다가 30분동안 서서 이야기를 나눴다. 멋진 옷을 보거나 좋은 선물을 받았을 때 awesome 대신 lovely를 남발하면 영국식 영어로 보일 거라는 것과, 그의 애인이 한국인이며 그래서 그 남자가 가장 재밌어 하는 한국어는 “주글래?”라는 정보까지 알게 되었다.


그가 떠나고 나는 자신감이 붙었다. “스몰토크 넘나 재밌는 것!”

덜컥. 다음 게스트는 일본인이었다. 빛의 속도로 현관까지 진출해 부리나케 신발을 신고 현관문을 닫고 나갔다. 나는 그를 이해했다. 너도 방문 앞에서부터 속도를 준비했지? 스몰토크를 피하기 위해.      



살가움과 다정함 앞에서 나는 늘 부끄러웠다. 사교적인 대화 앞에서 나는 언제나 점자처럼 더듬거렸다. 마음의 온도를 대화의 온도로 정확히 변환할 줄 아는 사람들을 여럿 만나오면서, 많이 나아졌다.


그래도 여전히 무뚝뚝하다. 그래서 이해한다. 안아줄 때면 '더워'라고 말하는 너. 생일케이크와 '사랑하는 누구누구누구' 라고 부르는 생일 축하노래 앞에서 언제나 무뚝뚝해지는 너. "누가 멋지지? 누구지?" 내가 외치면 "나!"라고 외치고는 민망한 듯 웃는 너를 모두 이해한다. 나도 그랬어서.

                 

여전히 서툴러서, 좋아하는 마음을 전하려고 하다가 제대로 된 표현을 하지 못하고 집에 와 이렇게 또 일기를 쓰곤 한다. 나와 비슷한 모두들. 이 시를 함께 읽자.


하고 싶은 말은 닿을 수 없는 곳에서 반짝인다. 전당포 안의 은그릇처럼.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사월과 침묵> 중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