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은성 Jul 20. 2018

만인의 연인은 언제나 우울하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에게 적당한 사랑을 돌려주면서 살면 된다

나는 네가 신경 쓰인다. 오늘도 너는 새벽같이 집에서 나와 책상에 동그마니 앉아있다. 얇은 피부에선 금세라도 우울의 물방울이 뚝뚝 떨어질 것 같다. 눈물이 터지기 전, 일촉즉발의 상태로 너는 내내 앉아 있다.

진한 커피를 끓이려는데 한 컵 마실래. 냉장고에 자두 있는데 보았어? 아침밥은 챙겨먹었니. 이도 저도 아니면 물이라도 마실래. 수분이 부족하면 우울해진대.      


잔뜩 얇아져 있는 너에게 어떤 말이 생채기가 될지 몰라, 나는 계속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권한다. 대답은 들리지 않는다. 나는 안절부절 못한다. 아마도 너는 원하는 게 없을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알지 못해서 우울한 것으로 보인다. 원하는 것을 제때 알지 못하면, 사람은 언제나 안절부절한 상태로 살아가게 된다. 안절부절하게 우울하다, 지금의 너는.      



몇 개월이 지났다. 지금 나는 너를 미워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답답하고 안타까운 감정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 징그럽게 미워하는 것 같지는 않다. 세상에나. 이 글을 쓰는 것조차 힘이 들어서, 사흘째 붙잡고만 있다. 내가 너를 많이 좋아했기 때문에, 좋아했던 만큼의 미움이 가시지를 않는다. 모두가 너를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이 마음을 어디에도 말할 수는 없다.    

  

너는 어떤 부탁도 다 들어주는 사람이다. 네가 할 수 있다면 도와주고 아니라면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서라도 해결해 주려는 사람이다. 길에서 떡볶이를 파는 할머니와 금세 친구가 된다. 정신없이 시끄러운 모임 가운데 동그마니 외로운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진 게 너다. 그때 나는 진심으로 너의 세심한 다정에 감탄했었다. 무거운 짐을 들고 문을 열 때 가장 먼저 달려 나오는 사람은 언제나 너였다. 씩씩하게 짐을 나눠드는 너는 살가운 삼촌 같았다. 내 친구가 널 만나 한 시간만 이야기를 한다면, 나보다 너를 더 좋아하게 될 것이다. 모두가 너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너는 모두에게 사랑받기를 바랬다. 모든 것에 예스라고 말했다. 스스로에게 ‘네가 진짜 그것을 원하니?’라고 물을 겨를 없이, 밝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도 그게 좋아’라고 말했다. 

파티를 하자, 공부 모임을 만들자, 소풍을 가자고 말하면 언제나 박수를 쳐 주었다. ‘정말 재밌겠다, 진짜 신날 거야, 너무 좋을 거야. 네가 하고 싶은 일이면 재밌고 신나고 좋을 거야’라고 말해주는 목소리는 숲의 멜로디 같았다. 시작에 앞서 긴장한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앞으로의 걸음에 싱그러운 기운을 불어넣어주었다. 그 멜로디를 들으면 개선장군처럼 힘이 솟았다. 세상만사에 확신이 늘 부족한 나는 가끔은 너같은 인공지능 로봇을 사고 싶었다. 내가 뭘 하든 응원해주는 신나는 우쭈쭈 로봇.



네가 같이할 거라고 생각해 나는 첫걸음을 뗄 수 있었다. 뚜벅뚜벅뚜벅 걸어가 기다리는데, 기다려도 기다려도 너는 오지 않았다. 모든 것에 모른척했다. 예스도 노도 하지 않았다. 모든 질문에 그냥 웃었다. 용기를 내어 의견을 물으면 ‘잘 모르겠어’라고 말했다. 가장 괴로웠을 때에는 애드빌을 하루에 세 알씩 먹었다. 화가 나서 그녀를 미워하니, 내 마음 속에서 너는 착한 피해자가 되었다. “뭐야. 나만 맨날 욱하네. 쟤는 평화로운데.” 혼자 술을 마셨다.


술에 취하자, 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연락을 받지 못해 괴로운 게 아니었다. 나와 함께 해주지 않아 괴로운 게 아니었다. 가장 괴로운 마음이 무엇인지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우리는 친한 게 아니었어. 우리는 친구가 아니었나 봐. 일방적인 관계였나 봐."

창피하고 서글펐다.


모임과 파티와 소풍이 시작되기 두어 시간 전에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미안해. 급한 일이 생겨서 못 갈 것 같아.”

언젠가부터 심장이 쿵, 하기 보다는 쓴웃음이 나왔다. 너 사실은 전혀 오고 싶지 않았잖아, 오지 않고 싶다는 마음은 네 마음이니까 어제도 그제도 알고 있었잖아, 아예 처음부터 이렇게 말했으면 좋았잖아. ‘너를 응원해. 잘 할 거야. 나는 못 갈 것 같지만, 멀리서 응원할게’ 라고 말했다면 서로가 좋았잖아!     





그런 모든 말은 마음 속 비밀 폴더에 넣어두었다. 만인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늘 yes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분명히 내 말에 상처를 입을 것 같았다. 매정한 사람으로 보이기 싶지 않아서 모든 약속과 모든 부탁과 모든 애정에 은은한 미소로 화답하는 네게 상처를 입힐 것 같았다. 타인에 대한 배려 없이 제 하고 싶은 말을 폭포수처럼 쏟아붓는 사람이라고 미워할 것 같았다. (그 미움을 절대 언어로 전하지 않을 것 같다는 점이 가장 무서웠다)     


마음 속으로는 숱한 대화를 나누었다.     


불편한 거 있어?

아니. 그런 거 아닌데.

거짓말 하지마. 네 행동이 다 말하잖아? 눈도 잘 안 마주치고, 약속도 한번도 안 지키고, 전화도 안 받고.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야.

말을 해 줘. 잘못 있으면 고칠게(애원)

(....)

그럼, 편해 지금 너는? 아니잖아?

괜찮아.

뭐가 괜찮아? 너 불편하잖아!

너무 공격하지마. 나 힘들어.      


혼자 수없이 시뮬레이션을 해보며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 사람들은 모두 나에게 화를 내지. 난 너무 외로워.” 익숙한 안정감이 느껴졌다. 착한 피해자가 되면 안심을 하는 거로구나.      



하지 못한 말이 쌓여서 텁텁하게 고였다. 너를 바라보는 내 눈도 텁텁해졌다. 흐릿해졌다. 시야가 흐려지니 관심이 줄어들었다. 네 단점에 대해 편하게 털어놓을 수 없는 관계가 되면 너의 장점도 잊어버리게 된다. 하지 못한 말은 일기장에만 수북히 적어두었다.      


우리, 이제 ‘정없는 사람’이란 말을 무서워 하지 말기로 하자. 

갈등을 피하기 위해 친절함을 가장하지 말기로 하자.

인생은 그렇게 대충 살기엔 너무 소중하다.


모두의 사랑을 받고 싶어서, 곁에 있는 사람을 서운케 하지 말자.

모두의 사랑이란 건 허상이니까.


모두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다가는 박살이 나고만다.

타인에게 무리해서 잘해주는 사람은 언젠가 무너지고 만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에게,

적당한 사랑을 돌려주면서 살면 된다.


그거면, 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