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는 묻는다. 궁금하니까.질문은 공격이 아니야.
우리 엄마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있다. 엄마는 이성보다는 감정과 감각으로 세상을 헤쳐나가는 부류다. 사람을 볼 때에도 자신이 60년 동안 발전시켜 온 레이더를 윙, 하고 가동한다.
엄마: H는 발바닥 전체로 걷는 사람이더라. 멋있는 애 같아.
나: 발바닥? 그게 뭐야? (다른 데 카톡을 보내는 중이었다)
엄마: (자기 이론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을 반기면서) 발끝으로만 걷는 사람이 있구. 발을 직직 끄는 사람이 있어. 근데 걔는 발 전체에 힘을 주어서 걷더라. 아주 당당하게. 탁탁. 힘을 고르게 주어서. 탁탁.
나: ????????
엄마는 내가 했던 플리마켓에 왔다가 H를 처음 보았다. 초여름, 한껏 달아오른 옥상에서 얄팍한 조리를 신고서 단단단단, 걸어다니며 행사를 진행하던 그녀를 본 것이다. ‘엄마, 나는 어떻게 걸어?’ 물어보고 싶었지만, 기분이 나빠질까 봐 그만 두었다. 얕은 개울도 잘 건너지 못해 늘상 발을 모두 적시고 울었던 6살 짜리 꼬마로 나를 기억하기 때문에.
아무튼, 그 다음부터 나는 H의 발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 발의 움직임을 보다가 시선을 움직여 그의 말을 유심히 듣게 되었다. "궁금하면 물어봐야지"라는 말과 그때의 표정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한 점 거리낌없는 순수한 궁금함의 표정. 무구한 그 얼굴.
사람들은 보통 아무말이나 하니까, 정신없이 대화하던 중에 실수를 꽤나 많이 한다.
H는 대화 중에 뭔가 미심쩍으면 “응?” 이나 "왜?"라고 바로 표현한다. 보통은 이런 식이다. 상대의 말을 대충 듣기 때문에 그 실수를 눈치채지 못하거나, 아니면 상대가 민망할까봐 대충 넘어가고 봉합하곤 한다. 그런데 H에겐 그런 거 없다! 절대 없다! 대충 넘어가지 않고 꼭 물어보곤 한다. 잔잔한 수영장에 풍덩, 다이빙을 하듯 갑자기 물어본다. 수면 위로 물방울이 마구 튀어오른다.
"응, 그게 무슨 뜻이야? 응?"
"왜? 왜 그렇게 생각해?"
화를 내는 게 아니야. 질문은 공격이 아니야.
그냥 물어보는 거다. 궁금하니까요. 너를 알고 싶으니까요.
그렇게, 발에 힘을 주어 걷듯이 단,단,단,단 묻는다. 누군가는 그 질문에 약간 놀라거나 겁을 먹겠지만, H의 진심은 그냥 이런 것이다.
'응? 왜? 그게 무슨 뜻인지 잘 알고 싶어. 너를 잘 알고 싶어.'
아마 본인은 잘 의식하지 못하겠지만. 그건 어쩔 수 없이, 어떤 부단한 직업적 트레이닝에도 불구하고 (그의 직업은 인터뷰어다. 인터뷰이의 말을 수용하고 소화하되 ‘응?’이라고 되물으면 좀 위험하다)
절대로, 절대로 소멸되지 않은 고유의 성격일 것이다.
그런 건 몹시 소중하다. 어떤 ‘직업적 쪼’가 생겨도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무언가.
그런 걸 개성이라고 부른다. 고유함이라고 부른다.
누군가는 진지한 회의 중에 몰래 몰래 회의 참석자들을 모두 캐릭터로 그리는 버릇을 멈출 수 없고(내 남편) 누군가는 남의 이야기에 주책맞게도 곧잘 눈물을 흘린다(부끄럽게도 나다)
그런 개성이 나의 창작과 작업과 삶의 모토가 된다고 믿는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그렇게 하는. 누가 강요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비어져 나오는, 아주 본질적인 것.
아무튼, 물음표는 H 고유의 것이다.
“너무 궁금해. 저 세계는 뭘까? 뭐지? 뭔지 너무 너무 궁금하다.”
잘 알겠지만, 한국인들은 질문에 익숙하지 않다. 보통 이렇게 말한다.
“저...제가 잘 이해한 건지 모르겠지만....A라면 B일텐데 C라고 말씀하셔서 궁금해졌어요. 제 생각이 틀릴 수도 있겠지만....혹시 B가 맞는 것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길다. 너무 길다. H는 바로 물어본다.
“응? B 아니야?”
H와 익숙해지는 데에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처음엔 그저 예쁜 애라고 생각했다. 머리카락도 길고 풍성하고, 팔다리도 가늘고 길고, 그런데 그 와중에 키가 너무 크거나 지나치게 섹시하지는 않아서, 아주 안전하게 예뻤다. 그래서 안전하게 좋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다. 첫만남에 좀 무례한 칭찬을 했다.
“기자님. 결혼 전에 인기 많으셨겠어요!”
이게 무슨 소리야. 입이여 다물어라. 그런데 H는 얕은 바다의 웨이브를 으흠, 하고 타듯 아주 유연하게 넘어갔다. 어떤 말로 대꾸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데, 모두 다 함께 행복하게 웃었다. 그런 식으로 우리는 금세 친구가 되었다. 내 감정이 뭔지를 모르고, 입에서 나오는대로 아무 말이나 하고, 그래서 누가 “무슨 일이야?”라고 물으면 바로 눈물만 펑펑 쏟을만한 때에 늘 H가 곁에 있었다. (참고로 내 집안 내 별명은 ‘드라마 퀸’이다. 이틀에 한번 펑펑 운다)
어떻게 그렇게 타인의 말을 잘 들어줄 수 있을까. 슬퍼서 머리가 터질 것 같을 때면 나는 작업실로 달려갔다. H가 출근해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눈에 힘을 꼭 줘서 눈물을 참으며 합정행 버스를 탔다.
“울고 싶어. 이게 대체 무슨 마음인지 모르겠어.”
말을 갓 배운 아이가 말하듯, 아무런 말이나 할 때. 감정이 찰랑찰랑 넘쳐 버려서 술을 안 마시고도 취한 것 같을 때, H는 다 들어주었다. 누군가의 말을 잘 들어준다는 건 단지 귀를 열어서 되는 일은 아니다. 상대의 감정을 ‘발굴하듯이 탐험하듯이 채집하듯이’ 해야 한다. 상대의 숨은 감정, 상대가 전하고픈 메시지를 기어코 찾아내는 노력일 것이다. 엄청난 집중력이 요구된다. 그걸 다 해주었다, H는.
때때로 “응?”하면서 쉼표를 찍으면서도, (감정을 쏟아붓던 이는 이때 잠깐 제 정신을 차린다!) 계속 들어 주었다. 원고를 쓰기 위해 바쁘게 타자를 치다가도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성의껏 들어 주었다. 중간에 목이 말라 커피를 더 만들러 가고, 저녁 6시면 알람처럼 배가 고파서 컵라면에 물을 부으면서도 계속해서 계속해서 들어주었다. 정말 존경스러웠다.
H는 숨기지 못한다. 지루하면 하품을 한다. 조금 길게 하기도 한다. 그래도, 그럼에도 관심이 없는 이야기더라도 듣기 귀찮은 이야기더라도 끝까지 들어준다. 등산을 하듯, 상대가 숨긴 관심까지 열심히 헤아려야 하는 대화도 다 들어준다. 아마 사람을 좋아하는 힘일 것이다. 호기심의 힘일 것이다. 나만의 독특한 표현 구조를, 길고 지루하게 꼬여있는 맥락을 연결해 알아들어 주었다.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그랬다.
떠올려보니, 나는 그녀에게 대화를 다시 배웠다. “우리 작업실에서 함께 지내자”고 해서 처음 그녀의 공간에 발걸음을 했다. 일요일이면 나는 사람을 만나기 싫었다. ‘사람을 만날 땐 굉장히 사교적이어야 하고 에너지 텐션을 최대로 끌어올려야 하고, 사람을 안 만날 땐 쓰레기 모드로 지낸다’가 내 모토였다. 나를 홍보해서 일감을 따내야 하는 프리랜서 기자로서, 늘 연기하듯 살았다. 아침마다 베개에 귀를 묻은 채로 중얼거렸다. “나는 내가 아니다. 자기 홍보에 능한 누군가다”
원래 삶이 그렇게 이중적인 것일 줄로만 알았지. 내 일과 나에 대해 열정과 자신감을 두른 누군가를 실컷 연기하다 보면 해가 졌고 그러면 술을 마셨다. 나귀처럼 성실한 일꾼이니까 여기저기서 칭찬을 들었지만, 그저 남의 것 같았다. ‘행복하다’고 생각해 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숨을 제대로 쉬지 않은 채로 하루치 스케줄을 마친 뒤, 집에 오면 맥주를 땄다. 깡, 하는 소리에 숨이 쉬어졌다. 블로그에 기나긴 한탄일기를 썼다.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지 뭐야.
그런데 H가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가면을 쓰듯 살지 않아도 돼. 언니, 남의 말을 성의껏 잘 들어주는 척 하다가 여차하면 하품을 해도 된다. *물론, 대놓고 그렇게 말한 적은 없지만* 완벽하지 않아도 돼. 좀 허술해 도 돼. 허술해도 앞에서 대충 웃어주면 잘 모르더라니까, 하하하하.
그런 걸 보면서 느긋해졌다. 대충 살아도 삶이 대충이 되는 건 아니고, 대충 써도 그 글이 대충이 되는 건 아니고. 그런 걸 배웠다. 열심히 들어주다 "응? 뭔소리래~~~" 하는 바이브를 보면서, 편안해졌다. 완벽한 커리어우먼이거나 완벽한 쓰레기가 되지 않아도 된다는 걸 배웠다.
“버리면 또 얻게 돼. 일을 끊고 여행을 가면 너무 즐거워. 한국에 돌아오면 또 일이 와. 무서워하지 말고 가야 돼.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아. 떠난 만큼 행복해 있고.”
H의 말은 재봉틀로 오버로크를 치는 듯 단단하고 짜임새 있었다. 단단단단. H의 확신이 줄을 그을 때마다, 따라하고 싶어졌다. 대수롭지 않은 단순한 말이었는데, 나는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것 같았다.
H가 인도한 작업실에서 나는 꾸물꾸물 외국 남자를 만나 연애를 했다. 한국남자와 대화가 통하지 않아서 용기를 냈다. 대뜸 용감해지는 성격이라 대뜸 연애를 시작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조금 무서웠다. 나 어떡하지...어쩌다 저질렀지....
인터넷에서 읽은 포스팅에서는
“1호선 할아버지가 ‘양공주’라며 지팡이로 후려쳤네” “부모님이 지원을 끊고 선을 보라했네”
같은 글이 있었다. 나는 또 쭈굴쭈굴해졌다.
애인의 손을 잡고 농담을 하며 행복했던 밤, 술 냄새 자욱한 홍대 길에서 누군가 내 어깨를 치고 가기에 바라보니 돌아보며 씨익, 웃고 있었다. 그냥 어깨가 스친 걸 수도 있지만, 갑자기 무서워졌다. 안전하고 일반적인 세계에서 벗어났구나. 나는 일종의 소수자가 되었네. 공격을 받거나 항변을 해야 할 일도 생길 거야.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친구들에게 말했다. 내가 사랑하게 된 사람이 외국 사람이야.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어.
H는 와하하하, 양팔을 벌려 환영해 주었다.
“너무 궁금해! 언니가 고른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부침개 좋아할까? 오라 그래! 부침개 부쳐줄게!”
그렇게 또 다같이 친구가 되었다. 호기심과 환대의 힘으로. H가 지닌 물음표의 힘으로. 부침개의 힘으로. 사는 게 그토록 단순하고 해피할 수 있다는 걸 나는 H에게 배웠다. 우리는 부침개를 부쳐먹으며 다함께 친구가 되었다.
H의 응? 이나 왜? 를 들으며 나는 확신을 새겼다. 이게 믿음이라는 건가? 이런 게 내 인생에 있어도 되나? 그런데 H가 꽤나 돌쇠같은 인간이어서 나는 마구마구 마음을 놓았다. 단한번이라도 그러고 싶었는지도.
한번도 대충 넘어가지 않는 네가 "응원한다"라고 말해주는 거면 그건 진짜일 거야. 내 방향이 옳은 걸 거야. 너는 한번도 대충, 의미없이 말하지 않으니까. 네 말은 의미가 있으니까.
종종 생각한다. H가 당연하게 말하는 모든 것이 인생의 슬로건 같다.
하고 싶은 건 다 해봐야지. 한번 사는 인생.
여행만큼 좋은 게 어딨어.
여자들끼리 연대해야지.
밥은 먹고 해야지. 배고프면 아무 것도 못해.
자주 봐야 친해지지.
글을 못 써도 계속 써야지.
사람은 참 좋아. 아무리 상처받아도, 궁금하고 좋아.
나는 어느새 H를 맘 속 깊이 좋아하게 되었으므로, 나는 그 모든 당연한 말들을 좋아한다. 단 한 순간도 대충 좋은 척 하지 않고, 궁금하면 늘 물어보고, 이상하면 물어보기 때문에, 나는 H의 말을 다 믿는다.
그 말대로 살면, 모든 게 다 잘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