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인의 베스트프렌드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8월의 여름은 아침부터 녹진하다. 가벼운 홑이불일지언정 두 발로 힘껏 박차야 비로소 커피를 끓이러 갈 힘이 모인다. “얍!”하고 자동로봇처럼 일어난 뒤 주방으로 간다. 6인용 모카포트를 꺼낸다. 크리스마스에 B의 남동생이 선물해 준 것이다. 모카포트의 차갑고 매끈한 표면을 만지니 크리스마스 무드가 떠올라 기분이 나아진다. 옴폭한 용기에 커피가루를 수북히 채워 넣고 가스 불에 올린다.
진하게 추출된 에스프레소를 홀짝 마셔버리려다가, 조금 더 정성을 들이기로 한다. 절반은 아네모네가 그려진 작은 도자컵에, 절반은 호가든이라고 새겨진 커다란 유리커에 부었다. 핫 에스프레소는 아침에 주입해야 하는 엔진오일 같은 것이다. 여름은 여름이니까 대여섯개의 투명한 각얼음 위로 에스프레소를 흘려내려 아이스 에스프레소도 만들어야만 한다. 여름날의 진지하고 엄숙한 의식.
오른손에 유리컵을 왼손에 도자컵을 쥔다. 턱밑에 줌파 라히리의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를 끼운다. 거실의 탁자까지 살금살금 걸어간다. 아이스 에스프레소의 표면이 찰랑찰랑.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은 스스로를 보며 기분이 금세 좋아졌다. 아, 여름은 참 좋아.
무더위에 일찌감치 잠을 깬 샬리가 마루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
“노란 포장 커피를 마셔보고 있어. 이거 괜찮은데?”
샬리는 남프랑스 남자다. 어제 서울에 도착했고, 밤에는 한강에서 캔맥주를 잔뜩 마시고 돌아왔다. 취한 그는 어쩐지 자꾸만 한국 편의점에 가려고 했다. 딱히 살 것도 없었는데. 반년은 머물 것처럼 면봉 한 통과 맥심 모카골드를 한 박스 사왔다. 커피 상자에는 연핑크로 ‘라이트’라고 씌어 있다.
“좀 싱겁지 않아? 설탕이 절반도 안 들어있거든. 건강에 유의하는 할아버지나 마시는 건데.”
놀리고 싶어서 과장을 했더니, 그는 일부러 깜짝 놀란 척 하며 허허허 웃는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커피니까 한번은 꼭 마셔보고 싶었어.”
샬리가 한국 커피를 진지하게 음미하는 걸 보고 호감이 생겼다. 현지 음식이 맛있던 그저 그렇던, 샬리처럼 목적없이 여행 온 사람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맛이 없으면 맛이 없어서 재미가 생겨난다. 그럼에도 왜 현지 사람들이 그걸 좋아하는지 이유를 탐구하면 물음표가 팝팝 터져서 흥미롭잖아! 운좋게도 그 음식이 맛있다면 럭키. 두세 박스 사서 가족에게 나누어 주면 된다. 그들을 만날 적마다 두고두고 한국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러면 여행 추억은 즐거운 꽈배기처럼 꼬이고 늘어진다.
샬리는 내일 아침에도 맥심 커피를 마실까. 커피는 아직 잔에 절반이나 남아 있었다.
다음 날부터 매일 아침 샬리가 물어보았다.
“차가운 커피도 만들었어?”
뜨거운 커피만 가지고 올 때 물어보았다.
“오늘은 더워서 뜨거운 커피는 안 마시는구나.”
차가운 커피만 가지고 올 때 물어보았다.
샬리는 B의 대학시절 친구다. 우리 집에서 2주 동안 지낸다. 그가 내 커피 취향에 대해 심심한 말들을 하는 건 그가 심심한 사람이라서가 아닌 걸 안다. 우리는 프랑스에서 두 번, 한국에서 한번 맥주를 마신 사이다. 우리가 서로 서먹서먹할 이유는 별만큼 무수하지.
한국식으로 하면 나는 뼛속까지 문과고 샬리는 이과 중의 이과니까. 게다가 샬리는 나의 한참 동생 뻘이다. 다섯 살이나 차이가 난다. 언어도 문제다. 그의 프랑스 악센트 영어와 나의 한국어 악센트 영어는 종종 허공에서 맴맴 돈다. 한번 두 번 세 번 되묻다가 민망해지면, 헤헤 웃어버린다.
샬리도 그런가 보다. 자꾸 실없이 웃는다. 실없이 웃다가도 ‘앗, 내가 너무 실없어 보이나’ 하는 염려는 하지 않는다. 나의 실없음이 너에 대한 간절한 호의라는 걸 서로 잘 알기 때문에.
“오늘은 뭐 할거야? 무슈 드망쥬.”
나는 아직 그가 어색해서 자꾸만 농담을 한다. 그의 성은 드망쥬다. Demange에서 mange는 프랑스어로 ‘먹다’라는 동사다. 친구들끼리 종종 샬리를 놀릴 때, 드-망쥬라고 부르는 걸 보았다. 그걸 보고 나도 어색할 때마다 그를 뮤슈 드망쥬라고 부른다. 샬리는 그때마다 ‘네가 그렇게 부르는 걸 좋아해’라고 답해준다. 심심한 농담과 심심한 리액션 사이로, 평화가 흐른다. 보통 애인의 동성친구와는 이 정도면 적당하지.
헤헤, 소리가 피어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샬리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정말 깜짝 놀랐다. 지금은 일요일 오전이고, 나는 런드리 카페에서 빨래를 돌려놓고 글을 쓰고 있다.
“베트남 샌드위치를 사러 나왔어. B가 ‘하노이 바게트’ 지도를 그려줬는데 오늘은 문을 닫았네.”
샌드위치는 못 사게 생겼으니, 빨래 바구니라도 들어주어야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겠다며 그는 세탁기를 바라보고 우뚝 서 있다. B는 늦잠을 즐기고 있으니 굳이 그에게 묻지도 않고, 구글맵에서 빨래방을 검색해 찾아왔을 것이다.
나는 기꺼이 무거운 런드리 백을 내어준다. 친구가 호의를 베풀면 조금도 거절의 기색을 비치지 말아야 한다는 게 내 신조다. 이럴 때 뻔뻔하면 기분이 확 피어난다.
한가로운 여행자를 곁에 두면 덩달아 여유가 생긴다. 우리의 오전 스케줄은 빨래 뿐이니, 채 건조하지 못한 청바지 같은 것은 쨍쨍한 햇볕 아래 널어두고서 커피를 한 잔 더 만든다. 쓰다만 워드창을 다시 열고, 괜히 샬리를 떠본다.
“이번 책에 너도 한 챕터 넣어줄게. 어때?”
누군가와 친구가 되고 싶으면 나는 곧잘 수줍다. 그럴 땐 일 핑계를 대고 엉뚱한 질문을 던지곤 한다. 인터뷰라는 핑계를 좋아하는 이유다. 늦잠꾸러기 B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며 몇 가지를 물어보았다. 룰은 오직 하나. 생각하지 말고, 1초 안에 답하는 것.
좋아하는 단어는 무엇입니까?
I don’t know
다시 진지하게 말해주세요, 무슈 드망쥬.
justice (공정함)
heroisme (용맹)
égalité (평등)
fraternité(유대감)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입니까?
모든 고기! 로스트 비프(오븐에 구운 쇠고기), daube (고기 스튜)
좋아하는 밴드는?
좋은 질문이야! 퀸, 오아시스, 더 하이브스.
너의 친구 B의 좋은 점을 단어 하나로 말해주세요.
호기심이 많다는 것. (이건 B에게 말하지 말아 줘)
내년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요?
일 잘하고 싶어. 한참 동안 일하지 못했잖아. 바라는 건 그것 뿐이야. 진짜로. 내 일에 능숙해지는 걸 바래. (샬리는 욱하는 마음에 하루 만에 퇴사를 한 뒤, 생각보다 너무 길게 2년 넘도록 쉬었다. 조금 슬프게 들렸다)
평소엔 보통 무엇을 합니까?
요즘에는 조금 슬펐어요. 이제는 괜찮아. 한국에 와서 친구도 만났고.
신이 있다고 칩시다. 그 신이 너에게 선물을 주겠다고 하면? 뭘 달라고 할 거에요?
응? 왜 나야?
왜 선물을 주는 거야?
오케이, 메르씨. 고마워요.
당신은 신에게 질문하고 따지느라 선물 고를 시간이 끝났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싫은 것은?
misère (비참함)
마지막 질문이야. 스스로에게 무엇을 물어보고 싶어?
샬리, 너 지금 뭐 하고 있어? 나는 널 진짜 모르겠어.
하나 더. 누군가와 친구나 연인이 되고 싶으면 무엇을 하는 편이야?
진짜 대화. 자꾸 대화 하려고 해. 대화에 서투르니까, 더 그런 것 같아. 계속 이야기를 하려고 해.
내 글이 만약 책이 되어 나온다면, 한국어를 알아볼 수 있도록 Demange라고 원고 끝에 새겨주겠다고 약속했다. 책 한 권을 모두 훑어도 아는 단어를 찾을 순 없겠지만, 그 책 속에 너의 성이 들어있다는 사실만은 기뻐해 달라고 했다.
애초에 샬리에 대해 글로 쓸 계획은 없었지만. 눈을 마주보고 이야기하다 보니, 어떻게든 책에 넣고 싶어졌다. 10분 동안의 인터뷰가 몇시간 동안 맥주를 마시며 실없는 이야기를 나눈 것보다 반짝였다. 눈빛은 스킨십만큼 힘이 있으니까. 여러 가지를 알게 되었고, 알게 되니 왠지 샬리가 좋아졌다.
자기 이름을 부를 때마다 샬리는 고개를 15도 정도 굽히며 눈빛을 빛내는 버릇이 있었다. “으흥?” 하면서. 영웅서사물을 좋아하는 사람답게 정의나 공정함 같은 단어를 내뱉을 때 어색해하지 않았다. 그는 다함께 술을 마시고 밤골목을 걸을 때마다 소란스러웠다. 마마무 노래를 따라부르고 춤을 추고 쉴새없이 농담을 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인간 유튜브 같았다.
눈을 마주보고 질문을 던지자 그는 대뜸 수줍고 진지해졌다. 좋아. 나는 수줍고 진지한 사람에게 몹시 약하다. 친해질 수 있다는 용기가 샘솟는다.
다음날, 퇴근을 하고 이리카페에 가서 B와 샬리를 만났다. 피곤을 무릅쓰고 갔는데, '여어' 하더니 달려나와 비쥬를 해 주었다. 우리 아침에 만났잖아, 바보야. 맥주를 단 한 잔만 마셨을 뿐인데, 샬리는 나를 너무 반가워했다. 비쥬 한번에 마음이 녹았다. 피곤하냐는 질문에 "전혀! 친구를 만나는데 피로란 없지!"라고 히어로처럼 외쳤다. 다함께 하하하 웃었다.
열흘 동안 우리는 내내 농담을 했다. 졸졸졸, 시끄러운 농담의 시냇물 사이에서, 그 일요일의 대화를 떠올렸다. 농담 주머니가 터진 듯한 샬리를 보면서, 그가 내 애인이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열흘 안에 헤어졌을 것 같았다.
'평소에 나는 내내 슬퍼'라는 대답을 떠올렸다.
그가 프랑스에 돌아가서, 홀로 지내는 작은 집에서 명랑하길 바랐다.
'대화를 잘 하지 못하니까 진짜 대화를 하고 싶어서 계속 말을 해'라는 대답을 떠올렸다.
언제나 미소를 짓고 있는 그를 진짜로 폭소하게 만들 애인이 생기기를 바랐다.
샬리가 떠나기 전날 밤, 별건 아니지만 눈을 보며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무슈 드망쥬, 라고 불렀다.
언제나처럼 "으흥~"하면서 샬리가 고개를 15도 내밀었다.
"Whenever, whereever you have free airbnb, free food, free friend."
프리 프렌드란 말에 또 다함께 와하하 웃었다.
"우리는 세계를 떠돌며 살게 될 거야. 그러니까 나와 B가 한국에 살건 프랑스나 캐나다로 이주하건 지구에 어디건, 꼭 놀러와. 언제 어디서건 너에겐 공짜 식사와 공짜 숙소, 공짜 친구가 있어. 언제든 환영이야. 개의치 말고 와. 여행하고 싶으면."
대답이 뭐였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샬리는 새벽에 공항으로 떠나고, 내가 용케 일어나더라도 졸려서 이 말을 잊어버릴 것 같았다. 할말을 다 하고서야, 속시원하게 자러갔다.
다음날 아침, 샬리의 짐을 보고 깜짝 놀랐다. 커다랗고, 게다가 천이 다 헤어져서 제대로 잠기지 않는 백팩이 하나. 헌들헌들, 망원시장에 장 보러 가는 모양새로 공항철도를 타러 갔다. 우리는 내일 또 볼 것처럼 가볍게 작별인사를 했다. 잘가, 또와.
만남도, 작별도 모두 실없고 심심했다. 그런 사이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