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지는 중입니다(스웨덴, 삶이 그래야 하는 모습)을 읽었다
툭, 하고 책이 끝나 버렸네요. 좋은 영화들이 늘 그렇듯 좋은 책도 그렇게 끝나죠. 책장 밖의 삶이 계속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처럼요. 어떤 글도 삶보다 아름다울 수 없다는 듯 그렇게, 끝나버리죠. 많은 사건이 벌어졌지만 실은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 아주 태연하게.
어젯밤에 애인이 오랜만에 많이 아팠어요. 무더위에 야외에서 일을 하느라 더위를 먹은 것 같아 시원한 매실차를 타주고 홑이불을 배에 덮어주었어요. 예전에 엄마가 했듯이 '배탈난다. 배는 꼭 덮어야 해. 발은 내놓더라도' 하면서.
곁에서 나는, 계속 망설이고 있었어요. 당신의 책을 더 읽고도 싶고 스탠드 전등 불빛이 그의 잠에 방해가 될 것 같기도 해서 안절부절. '작은 방에 가서 읽을게' 속삭이며 몸을 일으켰어요. '머물러. 이거 좋아. 네가 옆에 있는 게 좋아.' 자는 줄 알았던 그가 하는 말에 마음을 놓고, 침대에 누워 책을 더 읽기로 했죠.
아픈 사람을 내버려두고 책만 읽어도 될까, 차를 더 가져다 줘야 하나, 안아주어야 할까 안절부절하는 마음이 들 때마다, 페이지 한켠을 접으면서요. 외우고 싶은 문장이 자꾸만 나와서요.
'네가 책 읽는 걸 좋아해. 네가 책장 넘기는 소리를 좋아해. 가끔 숨을 몰아쉬는 것도 좋아. 마음이 평안해져.' 그가 잠결에 하는 말처럼 나직하게 말했어요. 맞아, 그랬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였지. 전에 내가 많이 아팠을 때 나도 혼자 있고 싶지 않았던 기억이 났어요.
애인이 나에게 먹일 야채죽에 넣을 당근과 양파를 썰며 콧노래를 부르거나, 내 곁에서 만화책을 읽다가 이해가 안되는지 이마를 찌푸리는 걸 볼 때면 잠깐 아픔을 잊을 수 있었어요. 서로의 곁에 머물면서, 동시에 다른 세계 속을 유영하는 걸 바라보는 걸 좋아해요. 그러면 삶도 덜 아픈 것 같아요.
당신도 그랬잖아요. 한때 가족이 되었던 남자를 잃은 뒤, 곁에 머물러 주는 친구들과 가족이 되었잖아요. 파이를 나누고 바베큐를 함께하고 당신의 정원 가지치기를 도와주고 선물이를 돌봐주고 당신이 고통에 빠져 밥을 먹지 못할 때 '당장 세 숟갈 더먹어!' 소리치는, 그렇게 곁에 늘 있어주는 친구들과 삶을 살아가죠.
책을 반쯤 읽었을 때 아주 오래전에 당신과 선물이의 이야기를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어요. 영화를 좋아하는 스노브적인 사람들이 모인 인터넷 게시판이었는데요, 하하. 그때는 '스웨덴'이라는 이름이 아주 멀게 느껴졌어요. 먼 곳에 사는 단단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었어요.
아, 그 땐 내가 언젠가 애인을 따라 프랑스에 거주하는 한국인 이민자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상상하지도 못했었네요. 남들과 조금 다른 인생을 살게 될지 꿈에도 몰랐어요. 당신도 이전에 그랬겠지요.
나도 참. 책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수다스럽게 내 얘기를 했네요. 이해해 주세요. 좋은 책은, 그렇잖아요. 도무지 빨리 읽어버릴 수가 없다구요. 읽다말고 나를 생각하고 읽다말고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게 되어서 시간이 좀 걸리죠. 그렇게, '삶은 이런 거야, 이렇게 살아야 해' 가르치는 책이 아니라, 작가가 솔직하게 자기 이야기를 펼쳐 보여주는 게 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해요. 마지막 챕터에서 당신의 식탁에 앉은 친구들 같은 그런 느낌이 드는 책이어야 하잖아요.
이건 역시 왕년의 D모 게시판 유저다운 스노브적인 태도일지도 모르겠지만요. 조언하고 훈계하는 책은 기가 막히게 냄새를 맡고 알라딘에 팔아버리죠.
들어요? 지금 당신 책이 좋은 책이란 말을 하고 있는 거에요. 여행을 가더라도 가방에 꼭 챙겨갈 거에요. 당신처럼 투명하게 단단해지고 싶어서요. 이건 저의 팬레터입니다. :)
당신의 아이 선물이가 하는 사랑스러운 말들을 읽으며 나는 한국말을 쓸 때의 애인을 떠올렸어요. 외국어를 처음 배운 사람과 아이들은 얼마나 비슷한지. 언어 사용에 능숙하지 않지만, 그 언어의 의미를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모국어 사용자처럼 뜻을 꼬아서 쓴다거나 관성적으로 쓰지 않는) 사랑스러움에 대해서요.
당신과 S가 나누는 사랑의 대화도 그랬죠. 단순한 문장들의 힘.
차 한 잔 할래요
무엇 때문에요
모든 것이요
하하, 아무 것도 아닌 걸요.
그렇지만, 따뜻해요.
사랑을 해 본 사람이라면, 행간의 스민 마음을 다 느낄 수 있죠. 화려한 수사, 긴 문장은 없어도요. 간단한 언어로도 진심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을.
반짝, 눈을 뜬 애인이 왠일로 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하네요. 마침 '살인달팽이의 위협'을 읽고 있었는데! '머다르스니겔이라고 하는 민달팽이를 머리를 잘라야...그래야 정원이 안전하대' 라고 말하니, 가드닝을 좋아하는 그가 그 책 참 유용한 책이라고 칭찬하며 다시 잠이 들었어요.
당신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미래는 우리가 알 수 없으니까, 요즘처럼 너무 달달해서 혀를 탁 치는 위로, 오늘은 감동해서 인스타에 찍어 올렸는데 내일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문장들이 인기를 얻는 때에 그럴 수 있을지 우리는 알 수가 없죠.
당신의 간결하고 쌉쌀한, 진짜 인생같은 글을 한 명이라도 더 읽었으면 좋겠다 싶어 조바심이 나요. 모르겠네요. 다만 내가 오래 사랑할 책이란 건 알겠어요. 내가 나중에 이민자로 살면서 고독해지면 샬롯의 숙제를 떠올리지 않을까요. '하루에 한시간 산책을 할 것, 하루에 하나 기쁜 일을 해서 에너지를 얻을 것(지금 당장 신디셔먼 전시회에 가세요!), 친구를 만나서 인간에 대한 믿음을 회복할 것' 같은 리스트요.
책 속에서 당신은 지독한 과정을 거쳐 이혼하고, 너무 행복하고 아름다워서 말로 옮기면 우습게 느껴질까봐 혼자 마음에 간직할 정도로 사랑했던 사람을 떠나 보내죠. 아이가 자폐란 사실을 알고 고통을 받고, 또 그 사실을 일상으로 받아들여요. 이야기를 읽으며 제가 좋아하는 드라마 '그래도 살아간다'를 떠올렸어요.
크나큰 고통을 겪은 후,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은 주인공들의 규칙적인 일상이에요. 여자는 고통을 적극적으로 끌어안는 선택을 해요. 자기 오빠 때문에 세상을 등진 여자의 아이를 키우러 시골로 가요. 남자는 가장 고통스러웠던 어린시절에 빌리고 평생 잊고 지냈던 비디오 테이프의 연체료를 드디어 갚아요. 그 장면이 얼마나 위로였는지.
좋은 것에 대해 쓰는 게, 욕하고 싶은 것에 대해 쓰는 것보다 천배는 더 어려워요. 이 글을 어떻게 마칠까요. 작가님의 수선스럽지 않지만 감동을 주고, 과시하지 않지만 힘있는 문장을 오래 볼 수 있기를 바라며. 선물이가 늘 까르르 웃기를, 바랍니다.
아무도 사라지지 않고, 늘 괜찮기를.
<괜찮아지는 중입니다>를 읽고 리뷰인지 일기인지 모를 글을 썼습니다. 듀나게시판 연재글이 아름다운 책이 되었다! 응원합니다. 과시와 자기노출의 시대에, 이런 숨긴 듯한 문장, 슬픔을 단단히 응축한 문장, 달지 않고 간결한 문장이라 너무 좋네요.
그래서 더 응원해요 이런 톤의 글도 좀 있어야죠. 한 줄 땋! 뙇! 똫! 캡쳐해 올리려고 해보니...컨텍스트를 다 읽어내야만 해당 문장의 울림이 커지는 스타일의 글이라. 대한민국 sns에 썩 어울리는 (인스타) 에세이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래서 좋다. 이민가면 들구 갈그야 ㅠㅠㅠㅠ
주어를 생략하지 않는, 앞뒤가 명확한, 그래서 번역투로 보일 수 있는 문체를 편집자님이 살리신 게 눈에 띄었어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이민자로 오래 살면 이런 문체가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집에서 영어(서툰)쓰다가 친구 만나거나 글 쓸 때 똑똑한 파파고처럼 말하는 1인으로 동질감도...
https://brunch.co.kr/magazine/happy-in-sweden
http://www.yes24.com/24/goods/61833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