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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은성 Jul 04. 2018

코팅된 거짓말 대신 덤덤한 진심을

대화 중에 몰래 녹음 버튼을 누르곤 했다

B와 대화하고 있노라면, 그랬다. 아직 채 끝나지도 않은 그 순간이 벌써부터 그리워졌다. 천천히, 하지만 열심히 나누는 이야기. 왜 목소리는 사진으로 찍을 수가 없을까. 녹음 버튼을 누르면 탐정처럼 보일지도 몰라. 저장강박증 환자처럼 보일지도 몰라. 내 귀에 가 닿는 소리가 휘발되는 게 아까워 휴대폰의 녹음 버튼을 누르고 싶어지는 마음을 몇번이나 참았다. '인생에서 중요한 건 단지 이야기인 것 같아.'


B와 헤어져 다른 사람들을 만나면 조심스레 하품을 숨겼다. 너 빼고는 전부 시시해.


이야기가 너무 좋아서 입을 맞추는 순간을 조금 미루고 싶을 정도로. 그랬다.



그는 말수가 적었다. 쌀의 티를 고르듯, 말을 아주 세심하게 골라서 했다. 고르고 고르다 결국 하지 않는 말도 많았다. 병목현상처럼, 할 말이 넘칠 땐 오히려 침묵을 택했다. "정말 중요한 말은, 떠오르는대로 바로 내뱉으면 안돼. 왜냐면, 중요한 말이니까."


살면서 말 잘한다는 소리는 단 한번도 듣지 않았을 사람. 내가 프랑스의 토론문화, 살롱문화에 대해 묻자 그는 골똘해졌었다.

"우리는 대화를 사랑하지. 그런데 가끔은 좀 어지러웠어.  사람들이 모두 함께 큰 소리로 토론을 하면 흐름을 쫓아갈 수가 없었어. 너무 빠르거든. 다른 사람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자기 할 말을 시작하는 사람도 아주 많아. 덥썩 꼬리잡기를 하듯 대화가 이어지고, 이어지고. 나는 혼자 산책하면서 천천히 생각하고 결론짓는 것에 더 익숙해."  


사람들은 흔히 말재주가 좋은 사람을 부러워하지만, 결국 대화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따로 있다. 말수가 적어도 진짜 마음이 느껴지는 사람. 수다스럽지는 않지만 꼭 해야 하는 말을 제대로 하는 사람. 정확한 순간에 정확히 말을 멈출 수 있는 사람이 더 매혹적이다.


그가 뭘 좋다고 하면 그건 진짜 좋아보인다. 빈말을 할 바엔 침묵을 택하는 사람이 그이기 때문에, 깊고 단단한 신뢰가 생겼다.




그와 처음 대화를 시작했을 때, 어땠더라. 나는 내 몸과 마음을 돌볼 시간이 없이 살고 있었다. 어제는 강원도 오늘은 전라도. 전국을 돌아다니며 절과 산, 바다와 물고기 같은 것을 촬영했고 돌아와 글로 썼다. 더울 때 가장 더운 곳을 추울 때 가장 추운 곳을 취재해야 하는 것이 여행기자의 서러운 데스티니.


나는 여행기자의 체력은 택도 없으면서 여행 글쓰기를 좋아하는 모순적 존재였다. 자정께 집에 돌아오면 피로 때문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눈이 감기는데도 억지로 맥주를 마셨다. 짠 것과 찬 술을 잔뜩 먹어서 더 어지러워지면 그제야 잘 수 있었다. 고혈압과 천식이 생겼다. 공허와 불안을 누그러뜨리는 영양제를 검색했다.


글쓰기가, 싫어졌다. 내 마음에 와 닿지 않는 풍경과 음식을 그럴싸하게 포장해 써내고 그 글이 좋은 평을 받은 날이면, 시니컬해졌다. '나는 하필 거짓말에 재주가 있나 봐' 자조했다. 그럴 때 그를 만났다. 화려한 거짓말 대신 시시한 진심을 말해도 되는 사람.





그는 열심히 질문했다.


"지금 무엇에 대해 쓰고 있어요?"

"오늘은 무엇을 찍으러 여행을 떠나요?"

"오늘 먹어본 음식은 맛있었어요?"

"오늘 경주의 풍경은 아름다웠어요?"

"어떤 작가를 좋아하세요?"


처음엔 재미없게 답했다.


오늘은 왕복 9시간 동안 버스를 타요. 너무 피곤할 거예요.

험한 산에 올라가야 되어서 등산화를 신어요. 발이 아플 거에요.

새벽 5시 기차를 타야 돼요. 오늘은 아주 일찍 자야 해요.


한국인이 얼마나 오래 일하는지 얼마나 고되게 사는지 써 보냈다. 누가 좋아지면 나는 응석을 부린다. 누가 마음에 들어오면 나는 그의 막내가 되고 싶다. 힘들겠다, 힘내라, 고생한다, 좋게 생각해라 같은 답이 올 거라 생각했다. 그런 말 대신 그는 창의적인 질문들을 조심스레 써 보냈다. 오늘은 어떤 질문이 올까 기다리느라 바다에 가건 산에 오르건 스마트폰을 꼭 쥐고 다녔다.



지난번에 야생동물에 대해 쓴다고 했잖아요. 그 말을 듣고 나도 야생동물에 대한 유튜브를 봤어요.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관심이 있으면 링크를 보내드릴까요?

어제 복어에 대해 쓴다고 했잖아요. 복어는 대체 어떤 맛이 나요? 어떤 맛이길래 위험하지만 먹는 것인지 몹시 궁금해요.

당신의 문장을 꼭 읽어보고 싶어요. 나는 지금 한국어를 배워요. 초보자예요. 하지만 언젠가 읽을 수 있을 거에요. 한 10년 후? (웃음)


굳이 힘내라는 말이나 근사한 응원을 보내지 않았는데, 카톡 메세지를 받으면 마음이 산뜻해졌다.



누가 좋아지면 길에 자주 멈춰서게 된다. 메세지를 천천히 여러 번 읽고 신중하게 답을 써 보냈다. 주문진에 촬영갔던 날, 빨간 모자를 쓰고 대게 경매를 하는 아저씨들의 손동작(얼마를 부르는지 비밀스럽게 손으로 표시한다)을 사진 찍어 보냈다.

"와. 점퍼 안에 숨긴 손동작이 귀여워요. 나도 빨간 모자 쓴 남자들을 좋아해요.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이 링크가 즐거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가 보낸 링크는 웨스 앤더슨의 영화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생활>의 뮤비 클립이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PSqRmk3WSk




현실에선 박카스 두 병을 원샷하고 짠내를 맡으며 뛰어다니는데도, 마음은 환상 속을 퐁당퐁당 플로팅. 경기도에 사는 30대 후반 짠내나는 기자가 아니라, 한국의 명물 울진대게를 소중한 기록으로 남기는 저널리스트로 느껴졌다. 바쁜 일상도 즐거운 것 같았다. 경매 아저씨들이 사랑스러워 보였다. 아, 귀엽다 저 빨간 모자들.




나는 질문으로 먹고살았다. 이 지역은 뭐가 유명한가요, 여행 오니까 기분이 어떠세요, 이 음식은 어떤 효능이 있나요. 궁금한 게 없어도 가끔은 궁금한 척 직업적 액팅을 했다. 알잖아요, 배우들도 입금되면 자기 캐릭터를 더 사랑하게 될 거야.


누군가가 내가 매일 하는 일에 대해 진심으로 물어봐 주니까, 매일 단정하게 살고 싶어졌다. 내가 좀 멋있는 것 같잖아. 그가 자꾸 나를 작가라고 부르니까, 작가인 것 같았다. 출장인데 여행 business trip이라고 불러주니, 여행가인 것 같았다. 누가 좋으면 나는 그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애를 쓴다. 멋진 풍경에 대해 전하려고 시집을 뒤적였다. 복어와 전복이 어떤 맛인지 실감나게 전하고 싶어서 눈을 감고 먹어보았다. 다시, 글을 잘 쓰고 싶어졌다. 10년 후에 정말 그가 내 문장의 모든 결을 이해할 수 있을 지도 모르니까.


그럴싸한 답변을 보내고 싶어서, 열심히 살았다. 누군가 진심으로 관심을 기울이면 사람은 해내기 어려운 일도 거뜬하게 해낸다.


인터뷰어로 오래 일하면서는, 완전하고 흠이 없는 대화를 꿈꿨다. 틈 없고 논리 정연하고 체계적이며 자연스러운 대화가 평생에 한번은 있을거야. over the rainbow. 프랑스 영화에서 와인으로 입술을 적시며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은 완벽한 대화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거 아니구나. 좋은 대화에 대단한 화술이 필요하지 않다는 진리를 매일 깨닫는다.


질문은 쉽지 않다.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만이 질문이라면, 얼마나 삭막할까. 네가 잘하는 것, 네가 말하고 싶어하는 것에 대해 물어보면 대화는 찬란해진다. 내 질문으로 네가 멋지고 아름다워지도록.





우리는 이제 한집에 산다. 집에 돌아가면, 전등을 켜듯 반짝 하고 그의 질문이 나를 반긴다.

오늘 잘 지냈어?

응, 글도 많이 쓰고 네가 싸 준 점심도 아주 맛있었어. 행복했어.


오늘 하루 행복했냐고 매일 물어봐 주니까, 매일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덤덤한 듯 반복되는 질문과 답이 참 좋다. 대단하지 않은 것을 매일 묻고 답하며 우리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겠지.  허리는 좀 어때요. 아이고. 나는 또 다리가 쑤셔. 저녁은 뭘 먹고 싶어요. 저녁 먹고 밤산책을 할까요. 왜냐하면 사랑하는 사람과 나란히 걷고 싶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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