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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은성 Jul 03. 2018

대화의 빈자리는 허튼소리로 채워진다-2

할 말이 없으면 술이나 마시자, 이상한 소리 하지를 말고 

그는 왜 그랬을까.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어색해도 된다. 당연하지. 처음 만났잖아요? 대화는 어긋나도 되고 느려도 되고 흥이 나지 않아도 된다. 다시 말하지만, 처음 만났잖아요? 우리는 행사 진행자가 아니잖아요. 그냥 심심하고 덤덤하고 아무렇지 않은 대화여도 좋단 말이다. 흰 죽 같은 대화도 충분히 좋단 말이다. 우리는 쉬엄쉬엄 걷는 것처럼 바람에 땀을 식히는 것처럼 대화를 할 수도 있다. 강호동의 '아는 형님'처럼 폭소 강박적인 대화 말고. 


그가 떠난 후 상상했다. 그가 "뮤지컬 좋아하시는 분 있으세요?" 하고 다른 사람들의 답을 충분히 기다렸다면 우리는 각자 좋아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저는 뮤지컬 잘 몰라요, 저는 영화가 더 좋아요, 어떤 뮤지컬 좋아하세요, 그런 별 것 아닌 말들. 그가 낯가림을 감추지 못하고 남의 농담에 조용히 웃기나 했다면 나는 그를 못내 신경 썼을 것이다. 겉돌지 않도록 그의 곁에 앉아 이런 저런 농담을 건넸을 것이다. 우리는 친구가 되었을 수도 있다. 


뮤지컬의 어떤 점이 그렇게 끌리셨어요, 라고 물었을 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눈을 똥그랗게 뜨더니 "하-말로 다 못하죠."하고는 어떤 뮤지컬이 제작비를 얼마 들였다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숫자에 기대지 않고는 제 정신일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쉬지 않고 헛소리를 떠들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맨 정신으로 자신과 대면하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인다. 너라는 존재를 견딜 수가 없니? 



슬픈 일이다. 



대화의 빈자리를 참지 못하고 허튼소리를 하는 사람을 싫어한다. 어색해서 하는 소리, 분위기 좋게 하려고 하는 소리, '마'가 뜨는 걸 참지 못해서 하는 소리. 말실수는 대개 그럴 때 하게 된다. 언젠가 나를 인터뷰하겠다고 온 분이 긴장을 푼답시고 "오늘 화장이 잘 받으셨네요." 등의 소리를 하기에 10여 분 기다렸다가 테이블을 손으로 친 적이 있다. "본론으로 들어가시죠." 





그것 뿐이랴. 전국 팔도를 다니며 여행기자로 지내던 시절. 팔도의 벼라별 소리를 다 수집했다. 공무원의 차에 얻어타거나 문화해설사님의 설명을 듣거나 하다못해 유명한 절의 스님의 안내를 받을 때, 그들은 대화의 빈자리를 참지 못하고 무례를 저질렀다. 


(공무원의 차에서) 물어볼 게 있는데요. 여자 기자님들은 왜 결혼들을 늦게 하시나요. 


(마을 이장과 길을 걸으며) 이 나무가 뭐처럼 생겼죠? 둥글둥글 기다란 게. 아시겠죠? 여기자님들 이거 만지면 아들 낳으십니다.


(스님이 절을 소개하면서) 며느리 아이 가지게 해달라고 불공 드리러 오시는 어머님들이 많으세요. 기자님은 아이 있으신가요? 결혼을 안 하셨어요? 아니 왜요? 출산률 높이는 것이 애국인데. 애국 해야죠.


(오랫만에 만난 외주사 편집장) 몸이 부해졌네. 요즘 어디 아파?


(망원시장 청춘마트 점원이 나와 애인을 가리키며) 어머니, 아들 과일 좀 먹이세요. 


(난임병원 원장) 27-37 안에 난자 얼려야 돼요 기자님 나이가? 허억. 37? 올해가 마지노선이에요 인터뷰 온 김에 얼리고 가세요


돌아보니, 내가 '어색해서들 하시는 소리'라 명명한 소리는 그냥 성희롱과 무례 그 자체였다. 대화의 빈자리가 생기면 '옳거니, 좋은 기회군' 싶었던 것들은 아닐까. 내가 너무 너그러웠군.

 



말과 말 사이에 섬이 생길 때

요즘은 대화의 빈자리를 즐긴다. 대화를 하다 종종 나는 대화가 멈출 때를 기다린다. 말의 빈자리를 응시한다. 말과 말 사이 섬이 생길 때, 기쁘다. 커피 잔을 조용히 들어서 호르륵 마시며 나는 좀 응큼하게 즐거워한다. ‘이제 우리는 대화 중의 공백도 견딜 수 있는 사이가 되려나’ 하고서. 상대가 어색함을 뚫고서 조금은 조심스럽게 꺼내는 화제가 뭘까 궁금해도 하면서.      


그 화제가 오늘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의 새빨간 이슈라면 나는 스푼을 들어 식은 차를 빙빙 저으며 1퍼센트 낙담을 하고, 그게 아니라 나를 만나러 오던 길에서 본 혼자서 말을 하는 할머니나 그 곁에 고요히 서 있던 더러운 개에 대한 염려라면 1퍼센트 설레어한다. 게다가 그런 염려를 하는 자신을 좀 쑥스러워하며 한다면, 더욱 사랑스럽다.           


이런, 이런, 대화변태.      



구천을 떠도는 ‘빈 자리 채우기 위해 보태는 말’들에 대해 생각한다. 몇년 전, 택시 안의 빈 공기를 채우려고 난데없이  “세월호 유가족 문제 많지 않아요? 아니, 왜 나랏님한테 난리야. 보상금을 삼억 오천을 받으면 인제 조용히 좀 해야지. 뭣들 그리 시끄러운지!”라던 기사의 축축한 혀에 대하여.        


아무튼 나는 그 택시기사에게 “기사님, 저는 이 얘기는 안 하고 싶어요. 기사님과 견해가 좀 다르거든요.”라고 예의 바르게 1차 경고. 당연하게도 그는 사소하게 생긴 여자의 말에 끄떡도 않고 목소리를 더욱 더 높였고, 그날따라 아침밥을 먹고 나와 기운이 좋던 내가 소리를 질러 ‘빈 자리’를 만들었다는 이야기. 

“그마아아아아아안!” 

사극처럼 호령을 했더니 택시 안이 쩌러렁 울렸다. 놀랍게도 그는 “허허..,” 개미소리 만하게 웃으며 혀를 접었다는 이야기. “살펴가세요.” 내릴 때 되게 친절하시더라.      




소리지르지 않고도 대화의 빈자리를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오늘도 불가능한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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