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자씨의 수영복 차림을 보며 프랑스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예능 프로그램 <밥블레스유>에서 이영자 씨의 수영 장면이 화제가 되었다. 밥블레스유 팀이 단합대회 겸 수영장이 있는 숙소에 묵었다. “얘들아. 간다!”고 외친 이영자씨가 시원스럽게 물살을 가른다. 머리를 물에 넣지 않는 영법이 근사했다. 다들 환호했다. 송은이씨가 외쳤다. “우리 언니 멋지다. 짱이다.” 그 장면을 보고 다들 무슨 생각을 했나. 나는 “역시 사람은 수영을 해야 여행을 즐길 수 있다.” “더 미루지 말고 수영레슨 등록하자.” “수영복이 예쁘다. 어떤 브랜드일까”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좀 놀랬다. 화제가 된 것은 그녀의 몸이었다. 입수하기 전, 곧게 서서 한 손을 위로 들어올린 장면이 캡쳐돼서 SNS상에 돌아다녔다. 이게 그렇게 큰일이구나! 나올 수 있는 거의 모든 이야기가 나왔다. (사람들, 정말 부지런하다!)
다이어트와 지방흡입수술로 마녀사냥을 당한 그녀가 당당하게 몸을 드러냈다.
자신의 몸을 미워하고 학대하는 방식으로 자라난 한국여성들에게 용기를 줬다.
당장 민소매도 제대로 못 입는 ‘코르셋’ 찬 여성들에게 해방감을 느끼게 했다.
이런 건 주로 트위터 상의 이야기했다. 내가 구성한 타임라인의 양식있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네이버 댓글란과 카카오톡 채널의 찌라시 뉴스는 숨을 들이쉬고서야 클릭했다.
살이 쪘지만 참 예쁘게 쪘다. 울룩불룩 늘어진 살이 없다. 저렇게 찌기 힘든데.
저거 살 아니고 근육입니다. 제가 헬스 트레이너라서 알아요. (살이면 어때서요)
자세가 너무 당당하네요. 과시하는 건가요? (앉아서 입수했어야 했나?)
올여름에 이영자 따라한다고 수영장에 뚱녀들 우글거리겠네. 물 버렸다. (그냥 죽으세요)
실소가 터졌다. 여성의 몸은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도마에 오른다. 하물며 수영복 차림이라면, 밀리미터 단위로 몸은 재단된다. 무릎의 모양부터 겨드랑이 밑 살까지 구석구석.
대한민국의 보편적인 미의 기준을 충족하지 않는 여성이 수영복 위에 티셔츠나 바지를 입지 않았다는 사실만으로, 이렇게 화제가 될 수 있다니. 밥블레스유 회차가 방송된 2018년 8월 9일은 기록될 만했다. “영자 언니, 고마워요. 언니가 물놀이를 하는 장면이 좋아서 계속 돌려보고 있어요.”라는 글을 읽을 땐 가슴에 퍼렇게 멍이 드는 것 같았다. 슬펐다. 그 마음을 안다. 원하는 옷을 입고 원하는 자세를 하고 신나게 맘대로 놀아제끼는 자유가 꽤 귀하다는 것을 안다. 나는 여전히 한국에서는 비키니 수영복을 입지 않는다. 시선을 감당해낼 만큼 용기있지 않다. 단지 물놀이를 하기 위해 용기가 필요한 세상에 살고 있다.
B와 처음 프랑스에 놀러갔을 때, 그는 물놀이에 미친 사람 같았다. 보이는 물마다 뛰어들었다. 그럴 만했다. 한국에서 수영장을 갈 때마다 할머니들이 “외국인이라 머리가 작아서 수영모가 빠질 것 같다. 조심해라.” “왜 수경을 안 썼냐. 그러면 안 된다.”고 잔소리를 해서 조금 지쳐 있었다고 했다. 한번은 인천 바다가 수영하기에 좋은 줄 알고 수영복을 챙겨갔다가 슬퍼져서 조개구이에 소주만 먹고 돌아왔었다. (미안해, 진실을 말해 줄 걸 내가 깜빡했다)
보이는 호수마다 뛰어드는 뒷모습은 아름다웠다. 풍덩! 내가 한번도 해보지 못한 행동이라 나까지 시원해졌다. 수영복이 없어서 “음...”하더니 체크무늬 트렁크 차림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물에 젖으면 대충 수건으로 추스르고 따가운 햇볕 아래 좀 어슬렁거리면 되었다. 그 자유가 부럽다는 생각을 처음 했다. 속 모르는 B는 머리 위로 부서지는 햇살을 받으며 연신 손짓했다. “들어와. 물이 정말 시원해. 천국이야.” 괜찮다고 손을 내저으니 심각하게 한국어로 대답했다. “음. 의외로 재미없는 사람. 지루한 사람.”
프랑스 여름 영화 같은 자유는 그에게만 허용됐다. 누가 막는 것도 아닌데, 내가 거부했다. 팬티 라인 위로 뱃살이 보기 싫게 비어질 터였다. 최소한 살을 탄탄히 잡아줄 수 있는 고탄력 원피스 수영복이라야만 했다. 그렇게 서너 번의 황홀한 자유를 놓쳤다. 몸에 대한 강박은 놓아지질 않았다.
프랑스 가기 전엔 포에버 21에 들러 수영복 코너를 둘러 보았었다. 한국에선 어른이 되어 가족들과 수영하러 간 일이 없다. 남프랑스인들은 여름이면 물에서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므로, 분명히 호수와 바다를 숱하게 들를 테고 그 중에 원피스 수영복을 입은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키니 코너에 갔으나, ‘이걸 입기 위해서는 10킬로그램은 빼야 한다’는 생각만 쌓였다. 한 벌 한 벌 볼 때마다 강박만 쌓였다. 쇼핑은 스트레스가 되어 갔다.
반쯤 미칠 지경이 되어서 요가복 코너에 갔다. 요가용 브라탑과 데님 쇼츠를 사니 안심이 됐다. 집에서 입어보니, 브라탑 재질이 아주 두껍고 탄탄해서 뱃살을 일부 눌러주었다. 데님 쇼츠는 허리 위로 올라오는 하이 웨이스트 디자인.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비난으로부터. 마음 속 사감 선생으로부터. 내 마음에 들지 않는 팔다리까지 모조리 가릴 수는 없으니, 이 정도로 만족하자.
하루는 B의 누나 가족들과 바다 피크닉을 갔다. 프랑스 몽펠리에의 바닷가. 푸른 물빛은 하늘과 닮았다. 미풍이 온화하게 불어 차가운 물과 조화를 이뤘다. 억울할 지경이었다. 뭐야, 이 사람들은 뭐 이렇게 아름다운 걸 많이 가지고 있어?
주섬주섬 옷을 벗었다. 나는 안에 가슴골이 드러나는 원피스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실은 프랑스까지 가면서 영 구질구질한 것 같아 요가탑과 쇼츠를 내 방에 두고 왔다. 수영복이 없어서 어떡하냐며 나데쥬의 친구 레아가 빌려줬다. “괜찮아. 늦게 돌려줘도 돼. 수영복 열벌은 있어.” 생애 처음으로 남들 앞에서 클리비지를 보이는데, 아무렇지 않았다. 누구도 바라보지 않았다. 각자는 각자의 즐거움에 홈빡 빠져 있었다. 레아는 올해 60이 넘었다고 했다. 나이가 60이건 70이건 섹시한 수영복을 모을 자유가 있구나.
B의 누나 나데쥬는 뭘 입었는지 궁금했다. (바다에 가도 물놀이를 안하고 남의 복장을 체크하는 나의 한계여...) 끈으로 여미는 블랙 컬러의 장식없는 비키니. 꾸밈없는 게 그녀의 스타일이다. 배 부분에 흐릿하게 수술 자국이 보였다. 제왕절개 수술 자국인지 다른 수술 흉터인지, 자세히 보지는 않았다.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수술 자국에 개의치 않고 멋진 자세로 담배를 태웠다. 나라면? 수술자국을 가리는 하이 웨이스트 반바지를 입었겠지.
옷을 갈아입었다. 커다란 수건으로 서로의 몸을 가려주고 갈아입는 시간 동안, 자주 웃음이 터졌다. 바람이 불어 수건이 휙 날릴 때마다 다같이 웃었다. 수영복 차림이 이렇게 편할 수 있다는 왜 몰랐을까. 몸의 단점에 신경을 끄니까 즐거움에 신경을 쓰게 되었다. 비키니 수영복을 한아름 가져왔음 좋았겠다고 후회를 했다. 매년 여름과 겨울, 한달씩 프랑스에 머물 때마다 행복과 억울함이 교차한다. 그동안 스스로를 가두고 주변 눈치를 본 것에 대해 화가 났다. 이제라도 자유로워져서 기쁘기도 했다. ‘한 달 이민자’의 기분은 여러 조각으로 구성된 모자이크 같다.
그 바닷가가 너무 좋아서 나는 수영도 잊고 풍경을 눈에 새겨넣었다. 파라솔 아래 누군가는 화려한 천 한 장을 깔고 누워서 작고 가벼운 소설을 읽고 있다. 뒷편에는 백발이 아름다운 할머니가 새빨간 비키니를 입고 누워 있다. 비키니의 면적 바깥으로 셀룰라이트가 늘어져 있다. 그 셀룰라이트를 오래 쳐다보는 건, 그녀가 아니라 나다. 눈을 뗄 수가 없다. 나도 저 할머니처럼 자유롭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옆에 있는 할아버지도 마찬가지다. 소박한 수영복 위로는 배가 가볍게 늘어져 있는데, 개의치 않는다. 그뿐이다. 서로를 여유롭게 바라보며 담소를 나누는 두 사람을 바라보는데, 바라보는 것만으로 치유를 받는 느낌이 든다. 행복하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데, 행복하다. 한편으로 또 화가 이글이글 난다. 억울하다 내 인생. 어릴 적 바다에 놀러갔을 때, 엄마와 작은 엄마는 항상 원피스 수영복 위에 크고 헐렁한 티셔츠를 걸쳤다. 좀 더 나이가 들자 아쿠아로빅 수업 때 말고는 절대로 수영복을 입지 않았다.
저 멀리에는 한 엄마가 아이 여럿을 데리고 큰 바위를 넘는다. 아기 하나가 겁을 먹고 망설이자 엄마가 장군처럼 외친다. "할 수 있어. 엄마 봐. 엄마 했지? 그러니까 너도 할 수 있지?" 형제 자매들이 모두 응원한다. 불어로 뭐라고 뭐라고 하는데, 번역 없이도 다 알 것 같다. 사랑의 응원이다.
엄마는 키가 굉장히 크다. 우리나라였으면 “남자로 태어났으면 대단했겠네.” “그 여자 등치가 좀 있잖아.”했을 법한 체구다. 그녀는 흡사 아테네 여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양팔에 아이가 하나씩 매달려도 거뜬할 것처럼 멋지다. 그 장면이 한국에 돌아와서도 내내 떠올랐다.
한국에 와서는 그 바다를 떠올리며 못 입던 옷들을 입었다. 개의치 않고 민소매와 짧은 바지와 브라끈이 보이는 차림을 했다. 물론 한달을 못 갔다. 오랜만에 만난 엄마가 “팔뚝 가늘어 보이게” 사진을 찍어준다며 어깨를 과장되게 뒤로 뻗는 왜곡된 포즈를 시켰다. 안다. 그게 엄마의 사랑이란 것도. 친구가 브라끈을 당겨 옷 속으로 넣어 주었다. “붙이는 브라 있어. 남는 거 줄까.”
가슴골이 보이는 옷을 입을 땐 선글래스를 낀다. 뚫어지게 가슴을 보는 시선이 드러워서다. 우리에겐 한국어 인사 문장이 없나? ‘잘 지냈어요’라고만 물으면 찝찝해지는 바이러스가 전국에 도는 것인지. 오랜만에 만나면 몸에 대한 칭찬과 걱정으로 인사를 한다. 결혼하더니 살쪘네 (새댁에게 밥도 못 얻어먹나보네, 왜 그렇게 말랐어) 피곤해 보인다, 요즘 바쁜가 봐. 너도 늙었다 야, 야 오늘 화장 떴다. 뿌염해야겠다. 야, 넌 그대로다(세월 못 이긴다) 등등등등.
프랑스라고 바디 이슈가 없으랴. 몸매 품평이 없으랴. 그들이 사랑하는 여배우 중에 살찐 사람은 드물다. 갱스부르도 위페르도 소피 마르소도 아무튼 죄다 커피와 담배가 주식인 것처럼 말랐다. 그들도 ‘노력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자연스럽게 깡마른’ 여자를 아름답다고 여긴다. <프랑스 여자는 살찌지 않는다> 같은 책에서는 살찐 몸에 대한 그들의 강력한 거부를 읽을 수 있다. 몸무게가 늘면 점심에 소스 하나 없는 당근 샐러드 한통만 먹고 휘청거림을 참는 여성도 많다. 모든 여성은 아름답다고 하면서 ‘그렇지만 건강을 위해 살찌면 안된다’고 말하는 그 모순을 모르지 않는다. 멀리는 북유럽, 가깝게는 이웃나라 독일에 비해서는 몸매 강박이 더 있을 것이다.
외모 지상주의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날씬한 몸매를 이상화해서 다이어트하는 것은 여기나 저기나 다르지 않다. 그래도 타인의 몸매를 지적하거나 이상화된 몸매를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은 굉장히 무례하다고 생각된다. 보통보다 몸집이 큰 사위를 두고 “기름진 음식을 덜 먹는 게 어떠냐”고 말하는 B의 아버지는 모두에게 조언을 들었다. “아버지. 그 말은 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오랜만에 만난 B가 살이 쪘다고 느꼈는지 ‘요즘 운동은 하고 있니?’라고 물은 그는 아내에게 핀잔을 들었다. “식사 자리에서는 그런 이야기 좀 하지 말아요.”
프랑스 이야기를 더 하자면, 프랑스에서는 최근 인물을 포토샵한 사진에 그 사실을 명기해야 하는 법이 발표됐다. 신체 일부를 마르거나 비대하게 수정한 이미지에 ‘photographie retouchée’, 또는 ‘retouched photograph’ 문구를 의무적으로 표기해야 한다. 모델 보호 법안이다.
프랑스 보건복지부 장관 마리솔 투렌은 이렇게 말했다. “젊은 세대가 비현실적인 이미지에 노출될 경우 자존감 저하뿐만 아니라 심각한 건강 문제가 우려됩니다.” 프랑스 모델은 주기적으로 체질량지수 등이 기록된 건강진단서를 보건당국에 제출해야 한다. 건강진단서를 발급받지 않은 모델을 기용한 에이전시는 약 1억원에 달하는 벌금형 혹은 최대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는다. 루이비통 모엣헤네시 등 패션기업도 강화된 헌장을 발표했다. 한국 기준 44 사이즈에 미달하는 패션모델은 이들 기업의 브랜드와 일할 수 없다.
주름이 진 가슴을 드러낸 여자들, 브라끈을 내보인 여자들, 다리의 흉터가 있든 말든 드러낸 여자들, 성성하게 틈이 생긴 머리에 굳이 ‘뽕’을 넣지 않는 여자들을 보며 마음이 좀 편했다. 프랑스에서 찍은 맨 얼굴, 정돈되지 않은 머리의 사진을 보고 내 친구들은 놀랐다고 했다. “00이 거기서 완전 자유인 됐어.”
그러니까, 한국에선 자유인이면 안 된다는 소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