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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은성 Aug 17. 2018

갑작스러운 선의가 우리를 구원한다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 때,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다

누군가에게 선의를 보일 때, 친절하게 대할 때 용기가 필요하다. 관성을 따라서 아무런 행동도 안하고 앉아 있을 때, 어쩐지 겸연쩍어 그냥 앉아있을 때 내 기억 속 사람들을 떠올린다. 그들과 같은 편이 되는 기분으로 벌떡 일어나 선의를 꺼낸다.



1

미얀마 어느 공항 바깥의 허름한 식당이다. 나와 I는 음식을 네 개나 시켰다. “언제 또 오겠냐,”가 단골 멘트다. 두 명이니까 두 개를 시켰다. I가 먼저 “야.”하고 부른다. 언제 또 오겠냐, 이것도 시켜보자. 서버가 주문을 받으러 오면, 나도  I를 기쁘게 하고 싶어 하나를 더 고른다. 저것도 주세요. 요리 이름을 모르니 나머지 3개와 영 다르게 생긴 사진을 짚는다.      


4개의 접시가 도착하자 I의 얼굴이 흐뭇해진다. “이야. 많다. 너무 좋다.”

흰살 생선을 살만 발라내어 이름 모를 푸성귀와 소스로 볶아낸 것, 빨갛고 노란 채소를 새알 초콜릿 만하게 썰어서 조려낸 것 등이 우루루 놓였다. 미얀마 사람들은 불교의 영향으로 탐식을 하지 않는대, 그래서 채소 요리가 발달했나 봐, 불교 짱 좋다 등등 전혀 논리적이지 않은 아무말을 하며 먹기 시작한다.  

    

미얀마 공항에서는 출발 시간이 지켜지는 일이 별로 없었다.그래서 마음을 놓고 열심히 먹었다. 저 멀리 공항 안을 들여다보니, 시장판이다.  말이 공항이지 우리나라 시골 버스 터미널같다. 직원이 사람 머릿 수를 손가락으로 세면서 하나, 둘, 셋 중얼거리는 게 보인다. “저 분, 아까도 셌는데 헷갈리나 봐, 또 세네.”


티켓으로 체크하면 될 텐데 검지 손가락으로 하낫둘셋넷, 세는 모습은 어쩐지 안도감을 준다. 행여 늦더라도 저 사람들이 우릴 버리고 그냥 갈 리가 없다고 무작정 믿어버리고 시계도 보지 않고 밥을 먹는다.

     

“야 이게 뭐라고 일케 맛있냐. 존나 맛있다.”

맛있을 때만 비속어를 쓰는 내 친구가 귀엽다. I의 여행에서 음식은 너무 중요하다. "북유럽에 갔을 때 맹물하고 검은빵만 먹고 추운 방안에 누워있었어. 학교에서 숙소랑 비행기 표만 사 준 여행인데, 내가 그걸 왜 갔지. 아, 선진문물 보려고 갔지. 그런데 돈 없으면 선진문물 못 봐. 선진밥도 못 먹어. 배고프고 어디 먼데 갈 돈은 없고, 매일 부두에 나가서 배 오가는 것 보고 있었다니까."

 I의 말을 들으며 "그래서...하나 더 시키란 소리인가..." 생각한다. 냠냠냠.


 짭짤한 소스가 자작하게 남아있는 게 아까워 푸스스한 흰쌀밥 한 공기를 더 시킨다. 금방이라도 스모 대회에 나갈 것처럼 우리는 묵묵히 먹는다. 저 멀리서 작고 마른 남자 직원이 달려 온다.      


“시간을 잊지 마세요. 걱정이 되어서 왔어요.”

“네. 다 먹었어요!”

우리는 어쩐지 유치원생처럼 입 모아 대답한다. 직원을 안심시키기 위해 대답을 우렁차게 하자. 다시 소스에 비빈 밥을 열심히 퍼먹는다. 이제는 어쩐지 의무감에 먹는 듯 하다. 10분쯤 지났는데 못내 걱정스러운지 그 직원이 땡볕 아래로 다시 걸어온다.

“야, 또 온다. 이제 진짜 그만 먹자.”


직원은 화를 내는 대신 겸연쩍은 미소를 짓는다.

“제가 잘 기억하고 있을게요. 걱정 마세요.”

친구는 밥과 채소를 양볼에 가득 넣고 또 울려고 한다. I는 바간과 양곤을 도는 내내 줄곧 울먹거린다. 한국이 싫었던 걸까.

“야. 존나 감동적이야. 사람들 너무 고맙다.”


남 직원은 돌아간 뒤로도 공항 안에서 우리를 계속 바라보고 있다.

저 돼지사람들, 버리고 가면 안 돼, 꼭 지키자, 다짐하는 듯 보인다.     


갑자기 한국에 돌아가는 게 몹시 두려워졌다.


2

추운 밤에 술을 마시면 여지없이 천식 혹은 과호흡증이 왔다. 대체 어쩌자고, 비닐 봉지를 백 속에 넣어다니며 술 약속을 챙겼는지 모르겠지만. 경미한 알콜중독자들이 흔히 그러듯 이렇게 다짐하며 구두를 신곤 했다. “딱 석 잔만 즐겁게 마시고, 그 다음부터는 물이다.”


강남역에서 일산으로 가는 좌석버스에 올랐다. 차가운 맥주가 2000cc쯤 출렁이는 위는 추위에 몹시 약했다. 한기가 몸에 스미자 커다란 맥주 강이 범람할 듯 출렁출렁. 이 버스는 창문이 없고 설 자리도 없이 빼곡하고 히터에서 뿜어지는 열기는 모든 피부를 찢어지게 할 듯 세고 뜨겁다. 창문 없는 버스는 천식인에게 공포스럽다.


천식인지 과호흡증인지, 아무튼 눈앞이 핑 돌았다. 스웨터 아래로 땀이 맺혔다.

“어디 아픈가 봐요. 이 자리에 앉아요.”

어디선가 콜린 퍼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체크무늬 스웨터에 셔츠를 받쳐입었다. 헤링본 재킷. 이 사람은 나직한 목소리도 소설책에 밑줄 그은 것 같은 단정한 말투도 옷차림까지도 영국영화에서 걸어나온 것 같다. 보통 50대 남자가 자리를 양보하는 일은 드문데. 낯빛을 보고 아픈지 아닌지 섬세하게 알아보는 일은 드문데....이거 꿈인가. 많이 취했나 내가.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 와중에 거절을 했다.


“얼굴이 창백한데요. 쓰러지겠어요.”

아니, 왜 또 거절을 했지. 나도 참, 나 때문에 미치겠다. 기절할 것처럼 혼미한 상태로 계속 안 앉겠다고 했다.

“그럼, 일단 앉았다가 괜찮아지면 말해줘요.”


그제서야 앉았다. 5분쯤 지났나 싶은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눈이....떠지지 않는다. 집인가? 내 침대인가?

“괜찮으세요?”

도르릉. 내가 코를 고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린다. 그런데 잠이 안 깬다.

진짜 아팠는데...취한 거 아닌데....아팠는데....변명을 할 수가 없다.


아저씨가 안심하는 것 같다. 창피하다. 내릴 때까지 눈뜨지 말아야지.

   

3

애인이 된 지 반년도 안 되었을 때 B와 프랑스에 갔다. 마침 파리에 온 M과 조우했다. "그냥 오고 싶어서 표 사서 왔어요." 너울거리는 동남아 팬츠를 입은 M이 웃었다. 24시간 째 깨어있다는 M이 우릴 만나러 몇 블럭을 걸어 온 것이 반갑고, 신기했다. 전화도 안 되는데 길에서 물어 물어 우리 숙소로 와서는, 창 밑에서 "선배!"라고 외쳤다. "아, 진짜. 10번은 불렀어요. 귀가 막혔어요?" 우리는 6층에 있었는데 마침 인터폰이 고장났다 (고장난지 100년쯤 된 것 같았다)


우리는 KTX매거진 사무실에서 만난 사이인데 어떻게 파리를 걷고 있냐. 헝클어진 머리칼에 잔뜩 부어서는. 이히히히히,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피곤한 M을 숙소로 돌려보내는 게 선의일까, 비프 스테이크에 와인을 사주는 게 선의일까. M을 만나자마자 단숨에 반해버린 B는 당연한 듯이 '밥도 먹고 디저트도 먹고 차도 마셔야지'라고 했다. 내 귀에 속삭였다. "괜찮다고 하면 뮤지엄도 함께 가자."


지하철에 갔다. 우리끼리 한국어로 오랜만에 이야기하느라 난리통인 사이 B가 사라졌다. 스마트폰이 안 되는 게 어색해서 여행 중에 B가 사라질 때마다 나는 잔뜩 긴장한다. 5분쯤 지났나, 저 멀리서 의기양양 걸어오는 B. 멀지도 않은데 손을 흔들흔들 마구마구 흔들면서. 그는 길을 물어보는 여행자를 데리고 굳이 출구까지 걸어가서 벽에 붙은 지도를 보고 설명해 주고 왔다. "와, 저 뿌듯한 표정 봐. 막 골반까지 뿌듯해. 선배, 저 사람 디게 디게 좋은 사람이에요."


영화를 보러 가다가도 길거리에 흩어진 병이나 캔 따위를 꼭 한데 모으고, 지하철에서는 절대로 앉지 않는 ("나는 건강하니까!") B를 보며 종종 M의 말을 떠올린다. 그래도 교회 전단지 같은 걸 다 받아와서 백년 내내 백팩 속에 넣고 다니는 건 그만 했음 좋겠어.....



4

나의 선의는 보다 '분노'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버스 기사가 휘청거리는 할머니에게 "노인네! 좀 앉아! 사고 나면 책임질거야!" 소리를 지를 때는 이어폰을 빼고 맞받아친다. "기사님, 소리 지르지 마세요." 실은 "무례하게 행동하지 말라"고 번역투처럼 판관처럼 소리치고 싶다. 처음엔 심장이 입 밖으로 나올 것처럼 떨렸는데, 한번 두번 하다 보니 할 만하다. 할머니 귀에 내 소리가 더 시끄러울지 몰라 민망하긴 한데, 소리지르는 걸 별로 안 해봐서 볼륨 조절이 아직 어렵다.


한번은 외국인 여성 분이 길에서 아기의 왼팔을 잡고 울부짖고 있었다. 남편과 시모로 보이는 사람들이 아기의 오른쪽 팔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이년 이거 독하네. 얘 인생 니가 책임질 거야. 어미도 아닌 게 발악이야." 길거리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무슨 일이야 무슨 관계일까 누가 나쁜 사람일까 관찰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는 겁이 더 많을 때라 다가가기도 무서웠다. 맞으면 나만 아픈데 내일 면접이라서 얼굴에 상처 나면 안 되는데 저 여자가 미친 여자고 남자랑 나이든 여자가 좋은 편이면 어쩌지, 수만가지 생각이 스쳐갔다. 그래도 젊은 여자의 곁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가서 서면 다들 와 주겠지.내 생각이 틀린 거면 사과하면 된다.


나도 모르게 달려가서 소리를 질렀다. "아기 아파요! 아기 다쳐요! 하지 마세요. 아기 울잖아요! 지금 손 놓으세요. 당장! 하지 마세요." 당황하면 무엇이라고 말할지 문장이 안 만들어진다. 방언같은 말을 아무렇게나 한다. 사람들이 하나 둘 모였다. 누군가는 사진을 찍는 척하고 경찰에 전화를 했다. 누군가 택시를 세워 아기와 엄마를 태웠다. 남자와 시모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욕을 하기 시작했다.


그 엄마가 아기에게 나쁜 사람인지 아닌지 의견은 있을 수 없지만,


알게 뭐야. 모르면 약자 편을 들면 된다


한번은 좌석버스가 과속을 해서 계속 삐삐 소리가 났다. 옆자리 분들도 불안해 하는 게 보였다. "기사님, 속도 줄이세요." 용기를 내어 개미소리만하게 말했는데 마침 기사님 뒷자리였다. 기사님은 들었지만 대꾸를 안 했다. 다른 남자분이 소리를 높였다. "사고 난 후에 후회하면 됩니까 안됩니까. 사고 난 뒤에는 아무 것도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버스 안이 곧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되었다. 세월호 사고가 난지 한달 뒤였다. 뒷자리 아주머니도 말했다. "아까부터 심장이 뛰어서 견딜 수가 없어요. 무서워 죽겠어요. 제발 조심 좀 하세요." 아주머니의 목소리는 절규 같았다. 속으로 모두 울고 있었다.


5

낯선 나라에서 살게 된다면 한국의 어디가 그리울까. 심심한 날이면 리스트를 만들어본다. 망원시장 순대국집, 광화문 대로와 교보문고, 호수공원, 제비다방...그 중에는 상수동 이리카페도 있다. 여름이면 커다란 창이 모두 열려 있다. 생맥주에 올리브, 치즈 안주를 시켜 놓고 신나 소설 따위를 여름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계산대 아래는 붓글씨로 ‘마음’이라고 써 있다. 모두가 마음 아래에서 술과 안주를 주문한다. 3호선 버터플라이와 허클베리핀에서 드럼을 쳤던 분이 사장이라 그런지, 뮤지션들이 특히 많다. 곡을 쓰거나 기타를 치거나 음악 칼럼을 쓰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촛불집회 때에 알게 된 사실인데, 홈리스 분들은 음악을 좋아하신다. 뚱기둥둥 흥겨운 곳이면 꼭 누군가 나타나 어깨춤을 추곤 했다. 하긴, 누가 음악을 싫어할까. 함께 부르고 춤추고 싶지만 자제할 뿐이지. 그 밤엔 다섯 명의 사람들이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8월에서 9월로 넘어가는 계절,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부는 여름밤에 잘 어울리는 노래였다.


활짝 열린 문으로 주머니가 아주 많은 겨울 패딩 조끼를 입은 분이 들어오셨다. 훅, 하고 끼치는 냄새에 놀라서 올려다 보았다. “노래 잘한다. 잘한다. 잘한다.” 박수를 치며 기타맨 옆으로 가는 걸 보고, 내가 괜히 초조해졌다. 어쩌나, 좋은 분위기 다 망쳤네.     


한참 바라보았다. 다섯 명의 멤버가 여섯 명이 되어 하모니를 이루는 모습을. 사람들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당황한 티를 전혀 내지 않았다. 아저씨가 음정에 브레이크를 걸 때마다 기타맨은 코드를 잽싸게 바꾸는 것 같았다. 친구들은 더 크게 박수를 치고, 몇 배 더 크게 웃었다. 행여나 아저씨의 흥이 사라지지 않도록. 그런 건 처음 보았다.      


언젠가 글을 쓰게 되면, 저런 글을 써야지, 하고 수첩에 메모를 했다.      



무엇이든 쓰게 됩니다. 매일 쓰면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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