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한가운데 내 이름을 적고 시작된 변화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 오그라드는 당신에게.

by eunskang

어린 시절의 나는 감정에 섬세하고 표정이 다양한 아이였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좋게 말하면 섬세한 거였지만, 실상은 예민한 아이였던 것 같다.


나 역시도 스스로를 돌아보면 감각에 민감하고 느끼는 감정의 폭이 넓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생활을 하며 만나는 사람들의 목소리의 힘, 자주 사용하는 단어, 말투, 눈빛만 보아도 그 사람의 성향이 금방 느껴진다. 아마도 남들보다 조금 더 빠르고, 조금 더 섬세하게 감지하는 편인 것 같다.


그러다 보니 각기 다른 성향의 사람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 역시 달라진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여리고 섬세해 쉽게 상처받는 사람 앞에서는 말과 행동, 표정 하나까지 조심하게 되었고 어디에서나 꼭 마주치게 되는 무례한 사람 앞에서는 의도적으로 눈을 더 마주치고, 정확하고 간결한 언어와 단단한 말투를 사용하는 나를 발견했다.


그 과정에서 이런 의문이 들었다.

‘진짜 내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그 질문은 나의 어린 시절까지 데려갔다. 초등학교 저학년 이전의 기억은 흐릿해져 부모님께 여쭤보았다.

“어릴 때 나는 어땠어?”


돌아온 대답은 신기하게도 지금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표정이 다양하고 감각에 예민하며, 남에게 큰 관심이 없고 귀찮음이 많은 아이였다는 이야기였다.


그중 하나의 일화를 들려주셨다.

부모님은 유치원 때부터 지금까지 맞벌이를 하셨고, 엄마는 그 시절부터 줄곧 옷가게를 운영하고 계신다. 그래서 유치원에서 하원한 후에는 늘 엄마 가게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날도 하원을 하고 가게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나를 유독 예뻐해 주셨던 유치원 선생님께서 내가 보고 싶다며 가게에 들르셨다고 한다. 엄마는 “재은이가 지금 낮잠을 자고 있는데요…”라고 말씀드렸지만 선생님은 “그럼 얼굴만이라도 보고 가도 될까요?”하시며 자고 있는 내 얼굴을 귀여워하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계셨다고 한다. 그 인기척에 내가 잠에서 깼고 자다 깬 것이 귀찮았는지 선생님을 가만히 째려보았다고 한다.


이 일화 하나만 들어도 어린 시절의 내가 어떤 성향의 아이였는지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성장하면서도 그런 기질은 종종 느껴졌다. 선생님이 나를 지나치게 예뻐해 주시면 부담스러웠고, 친구가 과도하게 집착하면 거부감이 들었다. 부모님이 나를 통제하려 할 때는 숨이 막히듯 답답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어릴 때부터 독립적이고 할 말은 해야 한다는 성향이 강했던 것 같다. 그런 내가 사회생활을

하며 상대에 따라 표정을 숨기고 하고 싶은 말을 삼키며 살아가다 보니 ‘나의 진짜 모습은 무엇인가’에 대한 혼란이 찾아왔다.


그러던 중 SNS에서 우연히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라는 글을 보게 되었다. 따라 해보고 싶었지만 정작 내가 어떤 사람인지조차 알지 못한 채 거울을 보며 “예쁘다, 잘하고 있다.”라고 말해 주는 일은 두루뭉술하게 느껴졌고 손발이

오그라들었다.


그리하여 내가 어떤 사람인지 먼저 알아보기로 했다. 우선 A4 용지 한 장을 꺼내 종이 한가운데 내 이름을 적고 이름을 중심으로 가지치기하듯 선을 뻗어 나가며 나의 마인드맵을 완성했다.


그 한 장의 종이 안에는 행복했던 나와 무기력했던 나, 사랑했던 사람과 증오했던 사람, 좋아하는 장소와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장소, 감사했던 순간과 상처받았던 순간, 잘하는 것과 부족한 것, 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숫자까지 그때

떠오른 나에 대한 모든 것을 적어 내려갔다.


그리고는 종이에 적힌 단어를 하나씩 바라보며 그 안에 담긴 기억들을 꺼내 보기 시작했다. 굳이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순간들도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피하지 않기로 했다.

'이미 지나간 일이니 괜찮다.'라고 나 자신을 다독이며 말이다. 그 순간 깨달았다. 나는 이미 과거의 나를 위로해 줄 수 있을 만큼 성장해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깨달음은 과거 어딘가에 멈춰 있던 또 다른 나에게 커다란 위로가 되어주었다.


그제야 알게 되었다. 스스로를 사랑한다는 것은 거창한 행위가 아니라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해 주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내 이야기에 진심으로 귀 기울여 주는 것, 그리고 이제는 괜찮다고 말해 주는 것. 그거면 충분했다.


그 이후,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도 조금씩 달라졌다. 회피하고 싶었던 과거는 하루하루를 잘 견뎌낸 나의 자랑거리가 되었고, 남에게 의지하지 않으려 돌아가는 길을 택했던 순간은 나를 더 단단하게 성장시킨 밑거름이 되어 주었으며 가난했던 어린 시절은 현재를 성실히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그래서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힘든 시기를 지나오고 있다면 이 말을 꼭 전해주고 싶다.


미래의 당신은 오늘을 버텨낸 자신을 분명 자랑스럽게 여기게 될 것이라고.

수,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