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카페 '레이지커피'에서
게으름. 성실함을 가장 큰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내게 게으름이란 공존하고 싶지 않은 단어이다. 항상 수많은 체크리스트와 함께하는 일상이 익숙한 나이기에.
그런 일상의 체크리스트는 나에게 열정보다는 강박에 가깝다. 주변 사람들은 끊임없이 노력하고 성실하게 움직이는 내게 칭찬을 아끼지 않지만, 그런 칭찬에 머쓱하게 웃으면서도 양심에 찔릴 때가 간혹 있다. 목표를 세우고 차근차근 달려가는 열정 있는 사람보다는 움직이지 않으면 뒤처질 수 있다는 강박에 움직이는 수동적인 사람이니까.
여행을 갈 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아마 대학생 때 능동적으로 여행이라는 것을 다니며 생긴 습관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때만 해도 유럽에 또 언제 와보겠냐며 아침 7시에 일어나 밤 11시가 다 되어 들어오는 스케줄을 소화했다. 전 세계 여행객들이 머무는 게스트하우스에서 나는 가장 바지런한 사람이었다.
그런 내가 마음 편히 게을러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는 제주도이다. 비행기 1시간이면 금세 도착하기도 하고 직장인이 되어 경제적인 여유를 갖춘 덕분에 언제든 올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며 느끼는 여유일지도 모르겠지만, 높은 빌딩 숲이 익숙한 강남을 활보하는 직장인에게 제주도는 트임을 준다. 하늘을 보기 힘든 높은 건물 속에 닭장에 갇힌 새처럼 일과 삶을 살아내는 내게 제주에서의 시간은 쉼이다. 높지 않은 건물, 막히지 않는 도로, 잔잔한 파도,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풍경. 제주도에 오면 비행기 스케줄을 지키느라 바지런히 움직여야 할 때가 아니면 대게 여유로운 순간들이 함께한다.
제주시 한가운데에 위치한 레이지커피는 게으름을 지향한다. 방문객들이 마음껏 게을러지기를 바라며, 대부분의 좌석들이 평상처럼 신발을 벗고 앉을 수 있는 형태로 되어 있다. 금방이라도 떠날 수 있는 급박한 마음이 아닌, 나를 옥죄는 것들을 최대한 내려놓고 쉬어갔으면 하는 사장님의 마음이 담겨있는 인테리어가 아닐까 했다. 그리고 거기에 풍미가 가득한 필터커피와 한가롭게 돌아가는 실링 팬까지. 커피와 디저트에 집중하며 편안한 쉼을 가져갈 수 있는 곳. 아마 이중에 얻어걸린 것들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게으름을 위한 사장님의 진심에서 묻어 나오는 디테일들일 것이다.
게으름의 사전적 정의를 보면 게으름은 여유에서 오는 태도이다. '스스로 행하거나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하거나 발휘하기 싫어하는 것'. 능력이 있지만 행하지 않는, 어쩌면 능력과 여유를 동시에 찾겠다는 욕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누군가에겐 공존하고 싶지 않은 단어일 수 있는 게으름을 이렇게 한껏 미화하고 싶은 걸 보면 레이지커피에서의 시간들이 꽤 마음에 들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또, 이곳은 인상 깊었던 카페 '단단' 근처에 위치한 곳이다. 마침 레이지커피의 책장에 단단 사장님이 쓰신 책도 꽂혀있더랬다.) 그러고 보면 도시를 도망쳐 찾아오는 제주도에서 방문하는 곳들은 나의 바람을 담고 있는 것도 같았다. 단단해지고 여유로운 사람이 되고 싶은 바람. 내일의 나의 행선지에는 어떤 바람이 담겨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