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아름답게 기억하는 법
청초했던 너를 위해
학회 참석차 라스베이거스에 갔을 때 후배들을 따라 그랜드캐년 투어를 갔었다. 헬기를 이용하는 고가의 경로와 버스를 타고 가는 저 비용의 경로가 있었다. 헬기는 추락등의 사고가 무섭기도 했고, 버스를 타고 갈 때는 후버댐도 경유한다고 하여 우리는 버스를 선택했다. 나중에 돌아와서는 크게 후회했다. 대략 10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버스를 타야 했고, 여행 하루를 온전히 토해내야 했으므로. 물론 미국이란 나라의 광대함에 대해 간접적으로나마 느껴보는 경험이었으니 나름이 가치는 있다. 다음에는 꼭 헬기를 타야겠다는 깨달음은 온전히 나의 것이다.
장장 5시간 정도를 달려 도착한 그랜드캐년은 장관이었다. 맑은 사막의 공기 덕분에 거리감은 느껴지지 않았고, 상대적으로 거리감을 느낄 수 없었기에 좌우로 움직임에 비해 풍광의 변화는 이질적이었다. 계곡 아래 깊숙한 곳에 이동하는 일부 관리 차량은 성냥갑이 아닌 점처럼 보였다. 눈이 좋았던 우리 일행들이 볼 때에나 차량으로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랜드캐년을 이루고 있는 흙과 암벽은 그걸 바라보며 우리가 서있는 뷰포인트의 그것과 동일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엄청난 거리를 갖고 있어 닿으려 하여도 닿을 수 없는 위치에 있었기에 층층이 그라데이션을 이루면서 멋진 풍광을 만들었다. 같이 갔던 일행은 대자연의 웅장함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나는 그게 더 신기했다. 그 친구의 말대로 대자연의 웅장함 앞에 인간이 한없이 작아 보임에서 내면의 고민거리가 일순간 사소해 보이는 경험을 했다고 한다. 좋은 경험일 게다.
사진이 취미였던 시절, 제주도 용두암에 갔었다. 사진의 기본적인 구도와 기술들을 알고 있던 나는 그곳에서 적잖이 실망했다. 사진으로만 봐왔던 풍광이 내 눈앞에선 그리 아름다워 보이지 않아서였다. 물론 사진의 프래임을 어떻게 잡으면 멋진 모습이 나올지는 머릿속에 그려졌다. 그 정도였다. 그 후로 사진이라는 기록물은 믿지 않게 되었다. 작가의 의도에 따라 촬상을 그대로 기록한다는 사진도 변조와 꾸밈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버렸다랄까?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이다. 물론 요즘에는 각종 포샵 어플, AI프로필 사진에 의해 풍광뿐 아니라 사람의 얼굴 또한 위변조가 되는 수준의 시대이니 흔하디 흔한 판도라가 쌓아둔 택배 박스 정도인 듯하다.
첫사랑의 기억을 잊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있다. 모두는 아니겠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첫사랑과의 추억이 담긴 상징물을 품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해는 한다. 하지만 그들은 깨닫고 명확히 기억해야 하는 게 있다. 첫사랑을 그리워하는 것은 첫사랑의 그 대상이 아니라 미숙하고 나약했던, 첫사랑 그 시절의 자기 자신이란 것을. '가슴에 물들었던 그 멍들은 푸르른 젊음이었소'라는 김동률의 고백처럼. 첫사랑이 푸르렀던 것은 상대도, 그때의 상황도 아닌 풋풋했고 청초했던 자기 자신일 게다.
첫사랑을 아름답게 기억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절대적인 것은 아니겠지만 나는 기록을 지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첫사랑의 기억을 되짚어 나가다 보면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아픈 기억과 헤어졌던 상황도 떠오르기 마련. 기록을 지움으로써 기억의 실마리를 끊는 것이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리하여 마음껏 왜곡하고 편집하여 예뻤던 자기 자신만의 청초했던 모습만 기억하게 되리라.
지금도 과거의 기록들에 묻혀 첫사랑을 떠올리고 있다면, 차마 버리지 못한 첫사랑과의 기록물들이 있다면, 지우시라. 새로운 연인에 대한 예의 때문이 아니라 좋은 추억으로서 자기 자신을 기억하기 위해 그리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