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이 되면 나의 누이는 잡채를 한다. 매 명절 때마다. 지금은 작고하신 어머니께서 매회 잡채를 하셨기 때문일 게다. 그 기억에 익숙한 홀로 되신 아버지를 위한 일종의 의식 같은 것이 되었다. 나름 깊고 디테일한 효도의 일환이다. 외식을 하여도 집에 들어오면 다른 건 몰라도 항상 잡채를 한다. 첫째 누이는 재료를 썰고, 나는 볶고, 둘째 누이는 버무린다. 나의 아내와 매형, 조카 놈들은 손대면 안 된다. 우리들의 약속한 적 없는 의식이기에. 어머니는 명절뿐 아니라 내가 집에 갈 때마다 잡채를 하셨다. 쫄깃한 당면의 양은 최소한으로 하고 각종 야채, 고기를 송송 썰어 볶다가 참기름과 간장에 버물거린 잡채의 맛은 좋았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네가 좋아하는 잡채 해 놓았다"라고 하셨다. 그 말씀을 하실 때마다 나는 "사위 사랑은 장모라더니 제가 아니라 매형이 좋아하는 잡채겠지요"라고 말했다. 잡채뿐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음식을 있으면 잘 먹지만 막상 없으면 찾아 먹지도 않는 나는, 여느 아들놈들 중 하나 일뿐이었으니.
일본 애니메이션 "공각기동대"에서는 사람이란 객체의 정의에 대한 중요한 개념을 소개한다. 사람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이 모여 껍질 즉, 쉘을 구성한다. 쉘들의 사이에 존재하는 빈 공간에 해당하는 고스트가 나라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런 요소들이 적층 되어 쌓이면 비로소 3차원의 다면적으로 구성된 내가 완성된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인간을 규정하는 것은 항상 어렵고, 상황에 따라, 사람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는 것인 듯하다.
또 다른 일본 만화 원피스에서는 "사람이 언제 죽는다고 생각하나? 사람들에게서 잊혔을 때다"라는 대사가 있다. 그렇다. 나를 구성하는 기억에는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뿐 아니라 내 주변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주변인의 기억도 중요한 요소라는 의미일 게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자신만의 세계에서 만들어진 미화되고 왜곡된 기억만으로는 나를 정의할 수 없다. 팔은 안으로 굽고, 사람은 자기 방어적인 동물이니까.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있던 나에 대한 이미지를 모두 조합되고 적층 하였을 때 비로소 다면적이고 입체적인 고스트인 내가 완성될 것이다.
오랜만에 오래된 친구를 만났다.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와 예전 흘러갔던 추억을 되짚는 시간이었다. 나이가 들어가면 미래를 꿈꾸는 이야기 보다 과거를 추억하는 시간이 길어진다고 하지 않던가. 그러다 보면 "너 예전에 이랬잖아" 하는 식의 대화가 잦아질 수밖에 없다. 몇 해 전만 해도 "내가 언제"라고 날 선 반문을 했을지 모르지만 이제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거나 왜곡 편집되어 버렸던 모습을 다른 종류에 화폭에 다른 관점에서 기록해 주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한다. 간혹 부끄러운 흑역사도 튀어나올 수 있으나 어쩌겠는가. 그것들이 모두 모였을 때 과거의 고스트인 그때의 나를 접할 수 있는 것을. 흘러가버린 과거를 변화시킬 수 없으니 과거의 고스트 또한 변화시킬 수는 없고, 다만 어여삐 바라봐 주는 것이 그때의 나를 위한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가 아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