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각오

::::: 심리학 공부하는 수의사

by 은수

최근 어떤 미국인이 쓴 펫로스에 관한 책을 보았다. 같이 삶을 공유했던 반려동물의 죽음에 힘겨워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한 말캉말캉한 말들로 가득했다. 어찌 되었건 베스트셀러이기도 하고 그 책으로 도움을 받았다는 사람도 많으니 그걸로 된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난 그 책을 보며 공포가 밀려왔다. 반려동물이 죽고, 이후 저제상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표현이 있었다. 우려의 수준을 넘어 온몸에 닭살이 돋아나는 서늘함이 느껴졌다. '그렇게 말해서는 안될 텐데'라는 말이 나도 모르게 나왔다.


최근 많은 웹툰 작가나 글 쓰는 사람, 타인을 위로하는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 펫로스가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는 죽은 강아지가 저승 앞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는 표현은, 사실 매우 위험하다. 아마도 위에서 말한 그 책을 시작으로 우리나라에 퍼져 있는 것 같다. 그들이 사용하는 말은 '반려동물과의 인연이 죽음으로서 끝난 게 아니라 앞으로도 더 있다'는 연속의 의미로 사용하는 표현이다. 분명 단절이라는 현상을 관념에서나마 끝이 아니라 지속성이 있다 말하는 것이기에 많은 경우 위로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모르핀 같은 것이다. 실례로 "평생을 집에서 나만 기다리고 있었던 그 강아지가 또다시 언제일지 모르는 내가 가는 그때까지 낯선 천국 앞에서 기다리게 할 수는 없다"라고 하며 자기 목숨을 끊어낸 보호자를 겪어본 사람이라면 그 모르핀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말인지 이해할 것이다. 모르핀이나 사이비 종교가 일정 부분 효과가 있다고 하여 그대로 방치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나의 닭살과 공포의 근원은 그때 삶을 끊어냈던 어떤 보호자를 겪어본 입장에서 나온다.


고양이 임상을 배우기 위해 고양이 전문 병원을 하는 선배 병원에서 근무한 적이 있었다. 명의가 있는 곳에는 사망률이 높다고 한다. 그만큼 아플만한 중대질환의 환자가 많다 보니 사망률이 높은 것이다. 그 병원도 참 많은 고양이들이 죽어 갔다. 그래서일까? 기쁨보다는 항상 슬픔이 잔잔하게 깔리는 병원의 분위기는 어찌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고양이계에서는 명의로 불렸던 그 선배에게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그중에 가장 큰 것 하나가 보호자에 대한 위로였다. 불교신자였던 그 선배는 울고 있는 고양이 보호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내가 종교인은 아니어서 정말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지만 혹시라도 저승이 있다면 오늘은 이 친구가 이승에서는 떠나간 날이지만, 저승에서는 생일일 겁니다. 충분히 아파하고, 충분히 그리워하고, 충분히 슬퍼하되 그래도 잠시 시간을 내어 웃으면서 생일 축하한다고 말해줄 수 있지 않을까요? 자기 생일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슬퍼하기만 한다면 생일이 참 우울할 것 같으니까요"


쿵 하는 마음이 내 가슴을 쳤다. 저거다. 반려동물을 잃은 보호자의 마음을 다독이는 것은 저승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서구인들의 관념에 깔린 종말 개념이 아니라 삶이 순환한다는 동양의 연속된 관념으로 표현해 주는 것. 실제로 그리 말해준 보호자는 눈물 콧물 얼굴에 범벅이 되었지만 식어가는 반려동물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그의 귓가에 '생일 축하해, 거기서는 아프지 말고 잘 살아, 그리고 또 만나'라는 말들을 한다. 나는 보호자 마음 치유의 시작이라고 여긴다. 오랜 병환을 옆에서 최선을 다하고 반려동물을 떠나보낸 보호자들에게 항상 그리 말해줬다.


영화 'A Dog's Purpose'를 본 후로 반려동물을 잃은 지 꽤 되었는데도 상실감에 마음 아파하는 보호자들에게는 그런 말들을 해주고 있다.


"혹시 그 친구가 환생을 하여 당신 주변에 있을 때, 자기 때문에 몰골이 말이 아니게 슬퍼하고 있는 지금의 모습보다, 예쁘게 빛나는 모습에 또다시 삶을 같이 살아가고 싶게 아름다운 모습인 게 더 좋지 않을까요? 혹, 환생 같은 건 없고 위에서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부족함으로 보호자분이 힘겨워한다 생각에 그 친구는 얼마나 자책을 할까요? 지금 위에서 보고 있을 그 친구를 위해서라도 마음 추스르시고, 밥 잘 먹고, 그 친구가 볼세라 밝게 웃는 모습 연습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그 친구도 거기서 마음 편하게 개껌하나 흥나게 뜯지 않을까요?"


어느 날 후배에게 전화가 왔다. 중성화 수술한 강아지가 보호자 요청으로 퇴원했다고 한다. 그 후에 보호자가 전화도 안 받고 재검도 안 와서 다른 병원 갔나 했단다. 그런데 몇 주 지나서 강아지가 죽었다며 후배가 강아지 죽였다고 소송을 걸겠다고 한단다. 그러면서 병원으로 건달 같은 이들을 데리고 왔단다. 소송을 할 거면 경찰서를 갈 것이지 건달 같은 친구들은 왜 데려왔담? 병약미 있어 보이는 후배는 최근 몇 년 동안 다양한 보호자들에게 시달려서 정신력이 바닥을 치고 있던 터에 또다시 일이 터진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에게 전화를 했었다. 한때는 그 친구의 말을 들어주고 대신 육두문자를 날려주는 게 내 일과이기도 했다. 학교 다닐 때부터 착하디 착한 성품의 후배였기에 육두문자를 진심을 담아 사용하지 못하는 친구였기에 일종의 대리욕설이라고 할까? 후배뿐 아니라 전공이 수의 영상이고 파트타임으로 주로 일을 하다 보니 이젠 보호자를 상대하기보다 원장님과 수의사들 만을 상대한다. 여러 원장님, 수의사들의 인생과 경영상의 어려움에 대해 상담 아닌 상담을 많이 해주고 있다. 위로해 주기도 하고 공감해주기도 하며, 대신 격하게 화를 내주기도 한다. 우스개로 병원을 위한 토템의 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이런 모든 나의 행위가 두려워지는 순간이 있었다. '잘하고 있는 걸까?'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에 대해 잘 모르는 나 같은 사람이 보호자나 동료 수의사들의 마음에 터치를 하고 방향을 바꿔주는 일들이 과연 정당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저 술자리 푸념과 위로처럼 가볍게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누군가의 자살로 이어질 수도 있는 가벼운 말의 책임은 누가 질 수 있겠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심리상담을 업으로 삼겠다는 것은 아니다. 계속해서 이렇게 누군가의 마음을 읽고 방향을 바꿔주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전문가 수준의 지식이 있어야겠다는 자각이 들었다. 각성이자 반성이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심리학 공부를 그것도 늦깎이 대학생이 되어 진득하게 공부하고자 한다. 어디가 될지는 몰라도 사이버대학에 편입을 하여 목표를 잡고 공부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수의사이면서 그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사람들의 말들도 있었지만, 그래야 내가 뱉은 말 한마디에 책임을 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고질적인 게으름으로 각오에 그칠지도 모르는 생각이지만 이 글을 올림으로서 마음의 각오를 다질 짐 하나를 올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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