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원장님이 내게 진료 예약을 옮기셨다. 이유는 보호자가 모 대학의 어학원 강사인데 한국말을 전혀 하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원장님보다는 젊다는 이유로, 영어를 하지 않겠냐는 이유로 그리하였다. 이런, 수의학 논문은 생존을 위해 잘 읽는 편이지만 나도 회화가 안 되는 여느 한국인일 뿐이었다. 지금도 여전히 외국인 앞에서는 과묵하고 묵묵한 사람일 뿐인데 원장님은 도망치듯 내게 패스를 하고 사라졌다. 배구를 해도 리시버나 토스가 강도를 약화시켜서 넘겨주는데 원장님은 강스파이크로 내게 공을 던진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자신 있는 한국어로 속으로 욕을 시원하게 해 주었다. 나는 인간미 있는 사람이니까.
어쩌겠는가. 페이의 삶이란 받아들일 밖에. 지금처럼 구글 번역기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라서 안 되는 영어라도 어떻게든 비벼볼 생각 밖에 없었다. 진료를 들어가고 문진을 하는데 내가 입에서 나올 수 있던 말들은 몇 마디 없었다. 간단한 인사를 하고, 내 영어가 짧아서 너네들의 말들을 다 이해할 수 없을 테니 최대한 니들이 쉬운 말로 설명해 달라고 부탁했다. 대신 시간은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이야기해보라고 했다. 그로부터 거의 삼십 분을 그들은 주저리주저리 이야기 했다. 데려온 강아지의 상태에 대한 이야기들을 잘 취합해서 가능한 질환 리스트와 검사를 설명했다. 물론 한국어로 설명하는 것에 비해 굉장히 축약된, 그래서 요점만 전달하는 수준이었다. 검사를 진행하고 검사 결과에 대해 간략히 설명을 해줬다.
검사에서 보이는 지표가 일어나는 원인들을 말하며 대화를 이어갔다. 아니, 묵언수행에 가까울 정도로 나는 조용히 했고 그네들이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다. 자기가 말하면서 자기가 감동하고, 울고, 웃다가 다시 설레어했다. 근 한 시간인가? 나의 퇴근시간은 진작에 잊어버리고 그들의 말들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 아래까지 쌓여있었으나 어쩌겠는가? 어차피 영어로 말하자니 생각해 보면 그리 큰 의미가 없는 말들이 대다수였다. 오히려 오해만 생길 것 같아 그들이 치는 굿거리장단에 맞춰 말들에 추임새만 넣어주었다. 같이 웃고, 안타까워하고 공감하는 제스처를 취해 줬다.
참 오래도 이야기했는지 그들도 그제야 시간의 흐름을 인지했나 보다.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하며 한국에 와서 지금까지 진료받아본 수의사 중에 가장 대화를 잘하는 수의사를 만났다며 치켜세워줬다. 내심 두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또 오면 어떡하지? 다시 말하지만 난 몇 마디 말을 하지 않았다. 몇몇 감탄사와 동의를 표시하는 단어 몇 개를 제외하면 열 줄도 채 되지 않은 문장밖에 말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최고의 진료였고 대화였다고 한다.
사람이 사람과 대화를 하는 상담이라는 부분에서 말을 잘하는 사람이란 결국 상대의 말을 얼마나 잘 들어주는가에 달려 있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였다. 특히 마음에 응어리져 있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은 고민과 상상을 한다. 걱정이 깊을수록 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지식과 경험을 총 동원하여 모든 가정을 하고 최악부터 최고까지 다양한 시나리오를 그려 놓고 있다. 그런 그들에게 내가 시나리오를 만들어 줄 필요가 없다. 그들이 한 번쯤 생각해 본 시나리오의 일부일 뿐일 테니. 그렇기에 말을 하기보다 그들이 만들어낸 수많은 시나리오중의 하나를 선택하여 동의만 해준다면 그들은 만족한다. 실제로 그게 답인 경우가 대부분 이기도 하다. 대화의 기술, 말의 기술은 결국 얼마나 주의 깊게 상대의 말을 잘 들어주느냐에 달린 게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