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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슈 Aug 09. 2020

바보 같은 질문은 없어요

질문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게 만든 말씀

'?'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동시에 무서워하는 문장부호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구부러진 저 문장부호가 원망스러운 순간은 모두에게 참 많다. 질문을 하는 것, 받는 것 모두 쉬운일이 아니다. 의미있는 질문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과 어려운 질문이 아닐까 두려운 긴장감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 내가 늘 가장 큰 영감님(가장 큰 영감을 주신 분) 중 한 분으로 여기는 대학 전공 교수님은 물음표에 가치를 부여해주고 두려워하지 않게 용기를 주신 분이다. 이 분은 캐나다 사람이고, 중동 현대사를 가르치는 분이셨다. 교수가 아니었다면 영화감독이 되었을 거라 하신 만큼 자유롭고, 창의적이고 새로움에 열려있는 분이셨다. 교수님의 수업방식도 현대 이슈와 연결지어 질문거리를 생각해보는 식이었고 그와중에 유머까지 있어 웃다가 끝나는 수업이었다. 그렇지만 단 하나의 문제는 모든 수업이 영어로, 그것도 질문과 토론으로 이루어져 학생들이 부담이 크고 거의 교환학생들이 듣는다는 점이었다. 나 역시 첫 수업 문을 여는 순간부터 난관이었다.


  첫 수업, 문을 여니 반 이상이 외국인이었고 당황스러워서 다시 닫았다. 일단 수강정정을 하더라도 교수님 싸인이 필요해 앉게 되었는데, 오리엔테이션에서 커리큘럼, 유머, 분위기 모든게 다 좋았지만 질문과 토론으로 이루어진 완벽히 선진적 수업방식이 너무 챌린징했다.  끝에는 자기소개까지 하라고 하셨고 나는 이 수업이 정말 재미있을 것 같지만 어학 실력이 부족해 드랍해야할 것 같다고 아주 솔직히 말했다. 다들 웃고 넘어갔고 교수님도 부담갖지 말라고 하셨지만 마음에 걸려 수업이 끝나고 인사라도 하러가니 어렵게 수업할 생각은 없으니 한두번 더 들어보는게 어떠냐고 하셨다. 좀 더 도전하는 한 학기를 맞이할지, 평화롭게 보낼지 관문에서 일주일을 고민했다. 지금은 아무일도 아닌 것 같지만 그땐 첨예한 내적 갈등을 하다가, 불행하게도 호기심이 너무 큰 나는 도전을 택했다.

  역시 쉽지 않았다. 학술적 용어도 어려웠고 전체가 질문과 대답인 수업 환경 자체가 부담이었다. 한국어여도 그렇게 바로바로 질문하고 토론하면 너무 힘들것 같았다. 외국인들을 어떻게 그렇게 교육을 잘 받았는지 질문을 아주 척척했다. 교수님이 부담을 주신 것도 아닌데 내가 그 자리에 있는게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싸. 교수님은 누가 질문을 해도, 왜 저런 질문을 하지 싶은 질문을 해도 그 모든 코멘트를 의미있게 만들어주셨다.


"바보같은 질문은 없어요(There is no silly question). 나도 모든 걸 아는게 아니고, 우리 수업은 답이 없어도 질문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답을 같이 찾는 과정이에요. 더 물어보세요."


그리고 덧붙이는 농담

"근데 6시전까지. 저 밥먹으러 가야하거든요. 아마 다들 원하시겠지만."


질문을 할 때는 항상 좋고, 멋지고, 훌륭한 질문에 고맙다고 하셨고 평가 없이 모든 의견을 받아주는 것도 수업 전체를 부드럽고 따뜻하게 만들어주셨다. 발표에 있어서도 대본을 다 써서 그냥 읽기밖에 안했는데도 발표를 한 것 자체를 칭찬해주고 내용에 대해 세심한 피드백을 주셨다. 잘했어요, 식의 칭찬이 아니라 어떤 포인트에서 뭘 잘했고 이렇게 하면 더 잘 할 수 있다는 식의 말씀이 엄청난 동기부여였다. 수업방식도 창의적이었다. 처음에 그 주의 이슈에 대해서 정리해주시는 것도 좋았고, 전시회에 같이 필드 트립을 갔다가 이태원 중동 식당에도 갔었다. 동아리를 하는 것 같이 재미있는 추억이었다.


  한 학기가 쉽지 않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배워서 그 다음 수업도 들었고 그때는 정말 떨리지만 질문도 한번 해보고, 그 작은일을 또 크게 칭찬해주시니 또다른 질문을 하게 되고, 발표도 대본 없이 준비해서 하게 되었다. 처음엔 20분 발표를 100시간도 넘게 준비했는데 점점 줄어들어 발표가 편해졌다. 대학에서 배워야하는게 이런 용기와 스스로 생각지 못했던 한계를 깨는 거라면 영감님과 이 수업은 나한테 대학 공부의 큰 의미를 주었고 나라는 사람의 성장에 있어 큰 변곡점이었다.  


  질문과 발표가 두려웠던 첫 이유는 평가받는다는 의식 때문인 것 같다. 궁금한게 모르는 것으로 비춰질까 두려운 순간 호기심의 문을 닫게 된다.  대학 이전까지 교육에서도 평가에 대한 부담이 있었고 이 방식 자체의 낯섦때문에 거부감을 갖게 된 것 같다. 한번 그 벽을 깨고 나니, 질문을 하는 것에 대해 편안해졌다. 그 질문할 수 있는 힘이 나에게 한동안 많은 생동감을 주었다. 졸업 후 미국에서 인턴을 할 땐 큰 포럼이든, 국회의원 앞이든 평가받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고 아무 질문이나 정말 재밌게 했다. 누군가 바보로 보았을지 몰라도 나 스스로는 참 자유롭고 행복했다.


    요즘 일을 하며 그 때 나의 도전과 배움, 사고의 자유로움이 참 그리운 이유는 그와 반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중, 고등학교로 돌아간 것 같고 환경, 그리고 나자신의 생각 자체도 스스로 그 벽에 가두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질문이든 하라고 하지만 모두가 바쁜 와중에 질문하는게 두려웠고, 전에 알려줬던 것이라는 말을 들으면 나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더 알아보고 질문해야 하는지, 저런 질문을 왜하는지 싶진 않을지, 같은 걸 질문한적이 없는지, 메일에는 없는지 모든걸 생각하고 찾아보려다보니 시간만 지날때도 많았다. 그럴 때 느끼는 위축감과 막막함이 생각의 자유를 막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학교와 회사는 다르고, 한국과 미국은 다르고, 환경과 문화에 따라 나에게 있는 역할기대가 다르지만. 가끔씩은 그 교수님이 그립고, 우리나라와 우리 조직이 조금 더 질문 우호적이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으면, 나역시 내가 영향을 줄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이 이야기를 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바보같은 질문은 없다는 걸. 질문은 몰라서가 아니라 궁금해서 하는 것이라고. 오히려 질문하기를 포기하는 순간을 두려워해야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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