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티어의 빙산모델
서연은 카톡을 보내고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뒤집어 놓았다. 진동이 울리기를 기다리며 창밖을 바라봤다. 마른 가지에 봄비가 맺히고 있었다. 이제 곧 새싹이 돋겠지.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그녀의 마음속에도 서서히 무언가 자라났다. 서운함.
"내가 파토냈는데 내가 왜 서운하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를 향한 질문에 서연은 피식 웃었다. 웃음 뒤에는 이상한 허탈함이 밀려왔다.
서연이 단체 채팅방에 보낸 마지막 메시지는 이러했다.
'다들 안녕? 좋은 소식이 있어서 공유할게. 내가 3년 동안 써온 단편소설들이 드디어 출판되기로 했어! 다음 달에 마감이라 요즘 매일 밤샘하면서 원고 다듬고 있어. 그래서 이번 주말 모임에는 참석하기 어려울 것 같아. 출판되면 제일 먼저 너희들에게 사인본 선물할게! ^^'
서연은 설렘으로 가득 찬 마음으로 친구들의 반응을 기다렸다. 축하와 응원의 메시지들이 쏟아질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아 그렇구나. 알겠어.' '모임 불참 확인했어요~' 단지 이 두 개의 답장뿐이었다. 소설집 출판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읽음 표시는 하나둘 늘어났지만, 더 이상의 답장은 없었다.
서연은 한참을 기다렸다. 적어도 "출판 축하해!" 정도의 한 마디는 기대했었다. 그녀가 이 소설집을 위해 3년 동안 밤새워 글을 쓰고, 퇴고하고, 출판사와 연락하며 준비해온 것을 알면서도 아무도 그녀의 성취에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창가에 앉아 비 내리는 풍경을 바라보며 서연은 자신의 복잡한 감정을 들여다보았다. 자신이 모임 불참을 알렸는데, 왜 이렇게 서운한 걸까. 서연의 가슴 한편에 서운함이 차올랐다.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성취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아무도 그것을 알아주지 않은 것 같았다.
그녀의 전 남자친구 준호가 생각났다. 1년 전, 그와의 관계가 힘들어질 때였다.
"우리 그만 만나자." 서연이 말했었다.
준호는 잠시 침묵했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 순간 서연의 가슴 한편이 무너져 내렸다. 준호가 자신을 붙잡아주길 바랐던 걸까? 적어도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물어봐주길 기대했던 걸까? 그때도 지금처럼 서운함이 밀려왔었다. 자신이 먼저 이별을 고했는데도, 쉽게 수긍하는 상대에게 섭섭함을 느꼈다.
창밖의 비가 조금 더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서연은 따뜻한 차 한 잔을 들고 소파에 몸을 묻었다.
"말하지 않은 기대가 실망을 낳는구나."
서연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여전히 단체 채팅방에는 새 메시지가 없었다. 잠시 무언가 더 보내볼까 고민했지만, 그만두었다. 대신 창가로 다가가 비 내리는 거리를 바라보았다.
"내가 이렇게 서운해하는 건, 누군가에게 특별한 존재로 여겨지길 바라는 마음 때문인 걸까?"
마치 빙산을 탐험하듯, 서연은 자신의 감정 아래로 더 깊이 잠수했다. 표면에 드러난 서운함은 단지 수면 위로 보이는 일각에 불과했다. 그 아래에는 더 깊고 본질적인 기대가 숨겨져 있었다.
"내 부재가 의미 있게 느껴지길 바랐던 거야. 내가 그 자리에 없으면 무언가 빈자리가 느껴지길 원했던 거지."
그리고 마침내, 감정 빙산의 가장 밑바닥에 도달했다. 그곳에는 단 하나의 본질적인 욕구가 자리하고 있었다.
"인정받고 싶었던 거야. 내가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내가 중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받고 싶었던 거야."
서연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느꼈던 모든 서운함과 실망감의 근원에는 결국 이 인정욕구가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준호와의 관계에서도, 소설집 출판 소식을 나눌 때도, 오늘 단체 채팅방에서도. 모든 상황에서 그녀는 "나는 당신에게 중요한 사람이에요"라는 확인을 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저녁이 되어, 서연은 오랜 친구 미나를 만났다.
"내가 오늘 깨달은 게 있어. 내가 서운했던 이유가 인정받고 싶었던 마음 때문이라는 거. 소설집 출판 소식을 전하면서 모임에 못 간다고 했을 때, 출판에 대해 아무도 언급도 안 했잖아. 그냥 '알겠어'라는 답변만 왔고. 그때 난 출판에 대한 축하를 바랐던 거야."
미나는 잠시 서연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그렇게 깊이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다니 놀라워. 그런데... 그 인정욕구를 충족시키는 방법은 생각해봤어?"
서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 사람들이 내 마음을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미나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들이 우리 마음을 읽어주길 바라지. 하지만 사실 우리 감정 빙산의 대부분은 수면 아래 있어서 다른 사람들은 볼 수 없어. 네가 정말 원하는 것을 표현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걸 알 수 없어."
서연의 눈이 커졌다. "그러니까 내가 인정받고 싶다면, 그것을 솔직하게 표현해야 한다는 거네?"
"맞아. 그리고 동시에," 미나가 생각에 잠겨 덧붙였다. "다른 사람들의 빙산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해. 우리는 보통 상대방의 수면 위에 떠 있는 행동만 보고 판단하지. 하지만 그들의 행동 아래에도 우리처럼 감정, 기대, 깊은 욕구가 있을 거야."
서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마치 준호가... 내 이별 통보에 쉽게 수긍했을 때. 나는 그가 나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석했지만, 어쩌면 그의 행동 아래에는 '상대방의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는 가치관이 있었을 수도 있겠네."
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해! 그리고 네 친구들이 출판 소식에 반응하지 않았을 때도, 어쩌면 그들은 단순히 메시지를 제대로 읽지 않았거나,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을 수도 있어. 그들의 빙산 아래에는 네가 생각한 것과는 다른 이유가 있었을 거야."
"진정한 연결은 서로의 빙산을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시작되는 거구나," 서연이 깨달음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내 욕구를 표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동시에 상대방의 빙산 아래도 들여다보려는 공감의 노력이 필요한 거야."
서연은 깊은 통찰을 느꼈다. 자신의 인정욕구를 발견한 것도 중요했지만, 그것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과 동시에 타인의 빙산도 이해하려는 노력이 진정한 관계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는 깨달음이 새롭게 다가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서연은 우산 아래로 비를 맞으며 걸었다.
'진짜 문제는 내가 원하는 것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했던 거야. 내 감정의 빙산을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았으니, 어떻게 그들이 수면 아래 있는 내 마음을 알 수 있었을까? 그리고 나도 다른 사람들의 빙산을 제대로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았던 거야.'
집에 도착해 젖은 옷을 갈아입고, 서연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단체 채팅방에는 여전히 새 메시지가 없었다.
망설임 끝에, 서연은 새 메시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자신의 감정 빙산을 더 솔직하게 드러내기로 했다.
'솔직히 말하면... 내 소설집 출판 소식을 전했을 때 아무도 반응해주지 않아서 조금 서운했어. 3년 동안 준비해온 일인데, 누군가 "축하해" 한마디만 해줬어도 정말 힘이 됐을 것 같아. 내가 이 길을 혼자 걷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너희들의 응원이 필요했던 것 같아.'
메시지를 다 쓰고 서연은 잠시 망설였다. 너무 솔직한 걸까? 하지만 더 이상 자신의 진짜 욕구를 숨기고 싶지 않았다. 심호흡을 한 뒤,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자신의 깊은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이렇게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 미처 몰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읽음' 표시가 하나둘 늘어났고, 곧 답장이 오기 시작했다.
'서연아, 미안해! 나 그날 너무 급하게 읽어서 출판 소식을 제대로 못 봤어. 정말 대단하다! 3년이나 준비했다니, 그 열정이 놀라워.'
'나도 너무 미안해. 그 내용을 완전히 놓쳤네. 정말 축하해! 출간되면 제일 먼저 사서 읽을게. 사인회 열면 맨 앞자리 예약할게. ^^'
'서연아, 네 글 실력 알잖아. 분명 멋진 소설집이 될 거야. 우리 모두 널 응원해!'
서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메시지들을 다시 읽었다. 그녀가 정말로 원했던 응원의 말들이 하나둘 도착하고 있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미나의 메시지가 마지막으로 도착했다.
'때로는 사람들이 우리의 진짜 기대를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어. 하지만 그들에게 네 감정 빙산을 보여주니, 이제 그들도 네 마음 깊은 곳을 볼 수 있게 된 거야. 용기 있는 행동이었어, 서연아.'
서연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니, 기대했던 반응이 돌아왔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이제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명확히 알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관계의 시작임을 깨달았다.
다음 날 아침, 서연은 준호에게 연락했다. 1년 만의 연락이었다.
'안녕, 오랜만이야. 별일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문득 네게 하지 못했던 말이 있어서. 우리가 헤어질 때, 사실은 네가 나를 조금 더 붙잡아주길 바랐어. 그땐 그걸 말하지 못했어. 지금은 잘 지내니?'
메시지를 보내고, 서연은 깊은 숨을 내쉬었다. 응답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자신의 진실된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다.
서연은 어머니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팀장 됐을 때 엄마가 더 축하해줬으면 좋았을 것 같아. 그땐 말 못 했는데... 내 성취에 대해 엄마가 자랑스러워해주면 기쁠 것 같아."
전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하구나. 엄마는 네가 얼마나 대단한지 항상 알고 있었는데, 그걸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네. 정말 자랑스럽다, 우리 딸."
서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자신의 기대를 솔직하게 표현하는 것이, 때로는 상처받을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진정한 관계의 시작임을 깨달았다.
창밖엔 어젯밤의 비가 그치고 햇살이 빛났다. 서연은 커피를 한 잔 들고 베란다에 나갔다. 어제까지만 해도 마른 가지였던 나뭇가지에 작은 새싹이 돋아나고 있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준호였다.
'나도 사실... 그때 너를 붙잡고 싶었어. 근데 네 결정을 존중해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 우리 둘 다 말하지 않은 기대가 있었던 거네. 서로의 빙산을 보지 못했던 셈이야. 솔직히 말하면, 나도 네가 나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확인이 필요했던 것 같아. 결국 우리 모두 인정받고 싶었던 거지. 언제 시간 되면 커피라도 한잔할래?'
서연은 미소를 지었다. 마치 차가운 빙산이 따스한 봄 햇살에 서서히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동안 그녀의 마음속에 단단하게 얼어붙어 있던 인정욕구, 표현하지 못한 기대들이 봄물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서연은 이제 알았다. 말하지 않은 기대는 서운함만을 남기고, 그 서운함의 근원에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다는 것을. 그리고 진정한 관계는 자신의 감정 빙산을 드러내는 용기, 그 밑바닥의 인정욕구까지 솔직하게 표현하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을.
"안녕, 새로운 하루."
서연은 따스한 봄 햇살을 맞으며 속삭였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감정 빙산을 당당히 보여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빙산도 함께 탐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모두의 빙산 밑바닥에는 결국 같은 욕구가 자리하고 있음을 이해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