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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시착

나라는 행성

by 내면여행자 은쇼

우주선의 경보음이 멈추었을 때, 나는 이미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불빛과 진동, 그리고 경고 메시지가 마지막 기억이었다. 눈을 떴을 때, 내 앞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여긴 어디지?"

내 음성은 이상하게 울렸다. 우주복의 산소 지시계를 확인했다. 숨쉴 수 있는 대기였다. 조심스럽게 헬멧을 벗자 따스한 공기가 내 얼굴을 감쌌다.


통신기를 켰다. "중앙 통제소, 응답하라. 탐험대원 K-427, 불시착 지점 확인 요청."

정적만이 흘렀다.


다시 한번 주변을 살폈다. 이곳은 분명 차트에 없는 행성이었다. 검색 시스템을 작동시켰다.

행성명: '나(自)'

상태: 탐험 이력 없음

주의: 이 행성은 매일 변화함


이상한 정보였다. 행성이 매일 변화한다니? 그런 속도로 변화하는 행성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우주선은 파손되어 당장 떠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수리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도 이 행성을 탐험할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로 눈에 들어온 것은 거대한 기억의 숲이었다. 나무들은 평범해 보였지만, 그 아래로 걸어갔을 때 나뭇잎 하나하나에서 영상이 흘러나왔다. 어떤 존재의 기억들이었다.

어린 시절의 웃음, 첫사랑의 떨림, 실패의 고통, 성취의 기쁨...


일지에 기록했다. "기억의 숲은 과거라는 시간을 저장하는 곳인 듯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같은 사건도 나뭇잎마다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객관적 사실보다는 주관적 해석이 더 중요한 행성인가?"


숲을 벗어나자 거대한 감정의 빙산 지대가 나타났다. 수면 위로 드러난 부분은 푸른 평온, 붉은 분노, 검은 우울, 노란 기쁨처럼 다양한 색을 띠고 있었다. 하지만 내 탐사 장비는 수면 아래 훨씬 더 거대한 부분이 숨어있음을 감지했다.


특수 잠수정을 타고 빙산의 수면 아래로 들어갔다. 첫 번째 층에는 '두려움', '상처', '외로움' 같은 더 깊은 감정들이 있었다. 그 아래층에는 '인정받고 싶음', '사랑받고 싶음', '소속되고 싶음' 같은 열망이 펼쳐져 있었다. 더 깊이 들어가자 '나는 부족하다', '나는 사랑받을 가치가 없다'와 같은 신념들이 단단한 얼음벽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가장 깊은 곳에는 '자아'라는 핵이 있었다. 모든 감정과 신념, 행동의 중심이었다.


"감정의 빙산은 이 행성의 가장 놀라운 구조물이다. 표면에 보이는 것은 전체의 10%에 불과하다. 진정한 이해를 위해서는 수면 아래를 탐험해야 한다. 모든 감정은 더 깊은 층위와 연결되어 있고, 빙산의 모양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이 행성의 기후 시스템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세 번째 방문한 곳은 소망의 산맥이었다. 높이 솟은 여러 봉우리들이 구름을 뚫고 있었다. 가장 높은 봉우리는 '진정한 나'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고, 그 외에도 '인정받고 싶음', '사랑받고 싶음', '자유롭고 싶음' 등의 이름을 가진 봉우리들이 줄지어 있었다.


"산을 오르려 했지만, 신기하게도 가까이 갈수록 봉우리는 더 멀어지는 것 같았다. 마치 평생 추구하지만 완전히 도달할 수 없는 목표처럼."


넷째 날, 나는 두려움의 동굴을 발견했다. 입구는 좁고 어두웠다. 들어가기를 주저했지만, 완전한 탐험을 위해서는 필요한 과정이었다. 손전등을 켜고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동굴 안에서는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넌 부족해", "넌 사랑받을 자격이 없어", "넌 실패할 거야". 마치 누군가의 가장 깊은 두려움이 형상화된 것 같았다. 더 깊이 들어갈수록 더 오래된 두려움들이 나타났다. 어린 시절의 상처, 버림받음에 대한 공포, 고립에 대한 불안...


"두려움의 동굴은 위험하지만, 이 행성의 지질학적 역사를 담고 있는 중요한 장소다. 과거의 상처가 퇴적층처럼 쌓여있다."


다섯째 날, 나는 가장 신기한 장소를 발견했다. '가능성의 평원'이라 부르기로 했다. 지평선 너머로 미래가 펼쳐졌다. 작가가 된 미래, 여행자가 된 미래, 평범한 일상을 사는 미래, 위대한 업적을 이룬 미래... 무한한 가능성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여섯째 날, 세 생명체를 만났다. 그들은 자신들을 '기억', '상태', '상상'이라고 소개했다.

기억은 끊임없이 형태가 변하는 물같은 존재였다. 푸른빛의 피부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영상들이 물결처럼 흘러갔다. 상태는 빛나는 크리스탈 같았는데, 순간순간 다른 색으로 빛났다. 상상은 가장 독특했다. 무수한 실타래들로 이루어진 형체로, 각 실은 다른 가능성을 향해 뻗어 있었다.


"어서 오세요, 탐험가님." 상태가 말했다. "당신이 올 것을 알고 있었죠."

"어떻게요?" 내가 물었다.

상상이 웃었다. "저희는 함께 존재하니까요. 우리 셋의 대화가 이 행성을 구성합니다."

기억이 말을 이었다. "저는 항상 변화해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제가 고정되어 있지 않아요."

"무슨 말이죠?" 내가 혼란스러워하며 물었다.

"한 예를 들어볼까요," 기억이 말했다. "당신의 열 살 생일을 기억하시나요? 슬펐나요, 행복했나요?"

나는 잠시 생각해봤다. "행복했어요. 가족들과 함께였으니까요."

"하지만 어제 당신이 외로움을 느꼈을 때는," 상태가 끼어들었다. "그 기억이 외로운 기억으로 변했죠. '난 항상 외로웠어'라고요."

상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일 당신이 깊은 유대감을 경험하면, 같은 기억이 '그때부터 난 연결되는 법을 배웠지'로 바뀔 거예요."


기억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내가 당신을 만드는 게 아니에요. 당신이 나를 끊임없이 재창조하는 거죠."

상태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저는 그 해석의 순간이에요. 지금, 여기, 당신의 인식."

"그럼 당신은요?" 내가 상상을 향해 물었다.

상상은 여러 목소리로 동시에 대답했다. "난 가능성이야. 너의 두려움이자 희망. 너는 나를 향해 움직이고, 그 과정에서 기억과 상태를 재구성해."

"우리는 대화해요," 세 존재가 동시에 말했다. "과거 기억의 해석, 현재 상태의 인식, 미래에 대한 상상이 끊임없이 서로를 변화시키며 '당신'을 만들어가요."


나는 그들 사이에 앉아 귀를 기울였다. 그들의 대화는 마치 복잡한 춤과도 같았다.

"어제했던 실수," 기억이 말했다.

"지금 두려움으로 느끼고 있지," 상태가 덧붙였다. "그래서 앞으로도 실패할 거라고 상상하게 돼," 상상의 어두운 실 하나가 말했다.


"하지만 그 실수에서 배운 것도 있어," 기억의 다른 물결이 일었다.

"지금 그 교훈을 떠올리고 있군," 상태가 녹색으로 빛났다.

"그래서 다음에는 다른 접근법을 시도할 수 있어," 상상의 밝은 실이 뻗어나갔다.


그들의 대화는 계속되었고, 나는 점점 더 깊은 이해에 도달했다. 내가 누구인지는 고정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세 존재의 끊임없는 대화였다. 내 정체성은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그럼 '나'는 누구죠?" 내가 마침내 물었다.

세 존재는 서로를 바라보더니 함께 미소지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들은 천천히 서로를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기억의 물결, 상태의 빛, 상상의 실타래가 섞이며 하나의 새로운 존재로 통합되어 갔다.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었을 때, 내 앞에는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러나 이상하게도 익숙한 존재가 서 있었다. 그것은 마치 거울 속의 나를 보는 것 같았지만, 동시에 더 온전하고 완전했다.

"나는 정체성이야," 그 존재가 말했다. "기억, 상태, 상상의 끊임없는 대화가 빚어낸 결과. 그리고 그 대화에 귀 기울이는 의식."


그때 깨달았다. 내가 '나'라는 행성을 탐험하는 이유—내가 나를 궁금해하는 이유—그것은 이 대화를 들으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대화가 만들어내는 존재, 바로 나 자신을 발견하기 위함이었다.


"이 행성의 가장 독특한 특성은 시간의 선형성이 없다는 것이다. 기억, 상태, 상상은 별개의 영역이 아니라 서로 대화하는 실체들이다. 그들의 끊임없는 교류와 통합이 '정체성'이라는 현상을 만들어내는 것 같다."


일주일간의 여정 끝에, 나는 행성의 중심부에 도달했다. 그곳에는 완벽하게 투명한 연못이 있었다.

연못에 비친 내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이상했다. 우주복을 입은 내 모습은 점점 흐려지고, 그 아래로 행성의 지형이 비쳐 보였다. 기억의 숲, 감정의 빙산, 소망의 산맥, 두려움의 동굴, 가능성의 평원... 모두 내 몸의 일부인 것처럼 보였다.


손을 뻗어 수면에 닿자, 물결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내 손가락 끝에서 작은 풀잎이 돋아났다. 놀라서 손을 빼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내 팔을 따라 푸른 이끼가, 그리고 작은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내 목소리는 바람 소리처럼 변했다. 두려움보다는 이상한 평화가 밀려왔다. 마치 오랫동안 무언가를 찾아 헤매다 마침내 집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

내 발밑에서 땅이 부드럽게 갈라지며 내 다리를 감싸기 시작했다. 저항하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이것이 옳다고 느꼈다.

연못 표면에 다시 글자가 떠올랐다.

"너는 언제나 이곳에 있었다."


그제서야 이해했다. 나는 관찰자이자 관찰 대상이었다. 바라보는 눈이자 바라봄을 받는 풍경이었다. 이 행성을 여행한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나는 이 행성이었다.

내 가슴에서 작은 새싹이 돋아나 점점 자라 나무가 되었다. 가지들이 뻗어나가 하늘을 향했다. 내 팔은 강이 되어 흘러갔고, 내 머리카락은 구름이 되어 떠다녔다.


내 의식은 점점 행성 전체로 퍼져나갔다. 더 이상 한정된 육체 안에 갇힌 존재가 아니었다. 나는 모든 것이었고, 모든 것은 나였다. 행성의 흙과 하나가 된 자리에 작은 연못이 남았다. 그 연못은 거울처럼 하늘을 비추었고, 간혹 지나가는 구름에 살짝 미소 짓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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