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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한 마음에 물을 주는 법

by 내면여행자 은쇼

평안으로 착각한 권태

평안은 따뜻하고 정답고 포근한 기쁨의 감정이다. 정답지도 포근하지도 않다면 더 이상 평안이라 우기지 말자. 실상은 재미도 멋도 없이 미지근한 상태로 권태나 무기력의 전조이다."
『감정어휘 - 미지근한 마음에 대하여』

처음 이 문장을 읽었을 때, 나는 무언가에 정확히 찔린 느낌이었다. 감정 통제 사회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나도 종종 아무런 감정의 기복 없이 지내는 상태를 '안정적'이라고, '평안하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저자의 통찰은 이를 정면으로 부정한다. 진짜 평안은 따뜻하고, 정답고, 포근한 기쁨의 감정이어야 한다는 것. 우리는 얼마나 자주 '평안'이라는 이름표를 붙인 미지근함 속에 살고 있는가? 기쁨이 없는 평온을, 진짜 평안이라 착각하며.


지루함과 인내심의 차이

지루함을 인내심과 혼동하면 곤란하다. 인내심은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마음이지만 지루함에는 참고 견딜만한 괴로움이나 어려움조차 없어서 더 견디기 힘들다는 점이 아이러니다."

이 문장에서는 더 날카로운 통찰을 발견했다. 나는 얼마나 자주 무의미한 지루함을 견디며 그것을 '인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왔던가? 인내와 지루함의 본질적인 차이는 명확하다.

고통은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지루함은 의미조차 없다. 이 깨달음은 왜 지루함이 때로는 고통보다 더 견디기 힘든지를 설명해준다. 우리는 의미 있는 고통은 참을 수 있지만, 무의미한 지루함은 영혼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감정 건조증

미지근한 감정을 무심하게 방치하면 '건조하다' 로 진행될 수 있다. 마음도 우물처럼 쓰지 않으면 말라버린다.

감정의 건조화 과정은 서서히 진행된다. 미지근함이 건조함으로, 건조함이 메마름으로 진행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점점 더 무감각해진다. 『감정어휘』는 이러한 상태를 '우물'에 비유한다. 마음이라는 우물에서 감정을 길어 쓰지 않으면, 그 우물은 말라버린다. 이 말라버린 감정 상태를 '감정 건조증'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현대인의 보편적 질환으로서의 감정 건조증.


감정 건조증 처방 : 재미

말라붙은 감정을 촉촉하게 해줄 처방이 필요하다. '재미' 와 '멋' 이다. 노잼시기가 길어지는 걸 예사롭게 여기지 말자. 재미라는 요소가 빠지면 인생은 갑갑한 것이 되어버린다... 재미의 두가지 풀이. '아기자기하게 즐거운 기분이나 느낌' , '좋은 성과나 보람' 우리에게는 두 가지 종류의 재미 모두 필요하며 다분히 의도해야 한다."


저자는 '재미'를 두 가지로 정의한다:

아기자기하게 즐거운 기분이나 느낌

좋은 성과나 보람

저자가 강조하듯, 이러한 재미는 "다분히 의도해야" 한다. 노잼시기가 길어지는 걸 예사롭게 여기지 말고, 적극적으로 생존을 위한 재미 장치를 곳곳에 심어두는 것이다.


나의 경우, 이 두 가지 재미를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루틴으로 실천하고 있다:

아기자기한 즐거움의 루틴

매일 한 번은 햇빛을 보며 산책하기

소품샵에 들러 귀여운 물건 구경하며 감각 환기하기

성과와 보람의 루틴

매일 전 날의 배움을 복습하고 창작으로 연결하기

매일 작법, 심리, 소설 분야의 책을 각 30분씩 읽기


'최선' 이 아닌 '최소한'의 노력으로 달성할 수 있는 목표를 세우라는 말이 인상 깊었다.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최고', '최선', '완벽'을 추구하라고 압박한다. 그러나 이런 완벽주의는 오히려 실행을 막고, 성취감을 앗아가며, 결국 감정을 메마르게 한다. 반면 '최소한'의 목표는 실행 가능성을 높이고, 작은 성취들이 쌓이는 기쁨을 경험하게 해준다.


감정 건조증 처방 : 멋

매일 짧은 시간 만이라도 세련되고 아름다운 것, 고상한 품격이나 운치를 가진 것을 찾아 마주하고 내 마음 밭에 어떤 감정 꽃이 피어나는지 구경하자. 감정이 달팽이처럼 길게 늘여 뻗어 어디로 나의 갈 길을 알려주는지 관찰하자.

감정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 앞에 마음을 세우고 그곳에서 피어나는 감정을 '구경'하는 태도. 그리고 그 감정이 달팽이처럼 천천히 뻗어나가 보여주는 방향성을 관찰하는 지혜.

이것은 감정 탐색의 새로운 방법론이다. 억지로 감정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미감 앞에서 감정을 초대하고, 관찰하고, 해석하는 태도. "감정은 내가 가야 할 방향을 알고 있다."


쓸데없는 일의 가치

살다 보면 윤기도 수분도 없이 바삭바삭하게 건조한 날이 있다. 왜 이런 기분인지 곰곰이 돌아보면 지나치게 유용한 행위만 한 날일 때가 많았다. 사람은 쓸모 있는 일만 하고 살면 숨구멍이 막힌다. 하루에 일정 시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아무데도 쓸데없는 일을 해야 한다.

이 문장은 현대 효율성 중심 사회에 대한 정면 도전장이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효율'과 '생산성'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시간을 '유용한' 일로 채우려고 하는가? 그러나 저자는 명확히 말한다: "사람은 쓸모 있는 일만 하고 살면 숨구멍이 막힌다."

숨구멍. 이 얼마나 적절한 비유인가. 우리 감정은 숨을 쉬어야 한다. 그리고 그 숨구멍을 틔우는 것은 바로 '쓸데없는 일'이다. 시시덕거리기, 무의미하게 돌아다니기, 꽃 사기, 시 읽기, 음악 듣기... 이런 '쓸모 없는' 행위들이 사실은 우리 감정의 생명선이다.


혼자서도 충만하게

재미를 목적으로 사귀는 친구나 연인은 대개 끝이 좋지 않다. 본디 우정이나 사랑이 나의 감정을 처리 또는 해결해주는 용도로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허기질 때 먹는 밥이나 비슷해서야 곤란하다.

이 통찰은 단순한 자립이나 자존의 논리를 넘어, 관계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사람을 '내 감정의 결핍을 해결해주는 도구'로 여길 때, 우리는 관계의 진정한 가치를 놓치게 된다.

저자는 관계를 '허기질 때 먹는 밥'에 비유함으로써, 도구적 관계의 한계를 명확히 지적한다. 진정한 관계는 서로의 결핍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충만한 두 사람이 그 충만함을 나누는 것이다.


창작 적용

『감정어휘』에서 얻은 이러한 통찰들은 나의 창작 활동, 특히 <센티아> 세계관 구축에 깊은 영감을 주었다. 감정이 통제되는 사회에서, 진정한 감정을 회복해가는 이야기를 그려내는 데 있어 이 책의 통찰은 소중한 나침반이 되었다.

건조한 마음을 가진 윤하가 센티아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재미를 찾는 것'이라는 깨달음은, 저자의 "미지근한 감정을 촉촉하게 해줄 처방은 '재미'와 '멋'이다"라는 통찰과 정확히 일치한다.

특히 '재미 감지 장치'와 '무계획 소풍'과 같은 구체적인 장치들을 도입하여 감정을 회복해가는 캐릭터들의 여정을 더욱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게 해주었다.


일상의 감정 루틴 만들기

『감정어휘』를 통해 얻은 가장 소중한 선물은 일상에서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감정 루틴'이다.

재미 회로: 아기자기한 즐거움(산책, 소품샵 구경, 영화 감상) / 성과 기반 재미(매일 책 읽기, 창작 활동)

감정 달팽이 루틴: 세련되고 아름다운 것을 짧게라도 마주하기, 그 앞에서 피어나는 감정을 구경하기, 그 감정이 가리키는 방향 따라가보기

숨구멍 데이: 하루 10분이라도 '아무 쓸모 없는 일' 하기 ex) 바람 따라 걸으며 아무 생각 안 하기

우리 마음의 우물이 마르지 않게 하려면, 이런 작은 실천들이 필요하다. 저자의 말처럼, "마음도 우물처럼 쓰지 않으면 말라버린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이 우물에서 감정을 길어 올려, 삶과 창작에 생기를 불어넣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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