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몽스 Aug 27. 2019

[비평문]이창동의『밀양』을 보고

믿음과 합리화

  믿음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신을 이어주는 매개체이다. 해내기 어려운 일도 믿음을 갖고 포기하지 않으면 성공할 때가 있다. 인간관계에서도 굳건한 믿음이 존재하면 각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여 좋은 시너지를 낼 수도 있다. 인간과 신도 그렇다. 인간이 신에 대한 무한한 믿음을 보내면 신은 인간에게 은혜를 베푼다. 여기까지가 대부분 사람이 정의하는 믿음의 예시이다. 사람은 신을 믿음으로써 상처를 치유 받고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 내리쬐는 햇볕 한 조각마다 저마다의 뜻이 있고 자식을 잃는 고난에도 신의 뜻이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믿게 한다.

  신애는 거듭된 비극으로 일상생활이 힘든 상태였다. 이를 본 약사는 그녀의 고난도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뜻이 안 비치는 것은 없다고 한다. 고난을 겪어 미약해진 심신을 신에 대한 믿음으로 치유하는 것은 올바른 믿음이다. 종교와 신을 수단으로, 상처를 치유한다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범인의 경우, 신애의 아들을 유괴하여 돈을 요구하고 살해하였다. 교도소에 들어간 그는 하나님을 영접하여 본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고 한다. 신애는 하나님이란 존재와 범인의 잘못된 믿음으로 인해 용서할 기회조차 빼앗겨 버렸다. 피해자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용기인 용서를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범인은 신애를 마주하였을 때 지체 없이 용서를 빌어야 했다. 죄를 저질러 놓고 하나님께 용서받았다는 말 하나로 자신의 죄를 씻었다고 여기는 태도는 비겁한 것이다. 용서는 신도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오직 본인이 용서해야 진정 용서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범인의 경우, 자신의 알량한 죄책감을 떨쳐내고자 신과 신에 대한 믿음을 수단으로 이용했다. 자신의 죄를 지우려고 신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닌 합리화일 뿐이다. 피해자의 상처는 곪게 두고, 범인에게 마음의 평화를 주는 신은 이 세상에 없다.

  신의 이면에 신애는 점차 타락하게 된다. 약사인 교회 장로와 불륜을 시도하고 그녀의 의도대로 성공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비도덕적 행위인 외도를 한다는 것은 교회의 주축 중 하나인 장로조차 완전한 믿음을 가진 신자가 아니란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에 비해 교회 신자도 아니던 카센터 사장은 그녀의 행동을 모두 곁에서 지켜보고 도움을 주려 한다. 영화 『밀양』에서 가장 속물이지만 그만큼 순진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가 잘못된 믿음으로 신을 섬기는 여타들 보다 나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본고는 종교와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것들을 믿는 행위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와 신을 믿는 행위를 인정하고 신의 존재도 인정한다. 대신, 잘못된 믿음으로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스스로를 궁지로 몰아넣는 이들의 잘못된 믿음을 부정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용도가 달라진다. 칼로 사과를 깎으면 과도가 되고 사람을 해하면 흉기가 된다. 성경과 믿음, 신과 종교 또한 마찬가지이다. 죄책감을 회피하기 위해 성경을 읽고, 신을 믿는 것은 잘못된 믿음이다. 죄를 지었다면 마땅한 벌과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야하는 것이 맞다. 용서 역시 하나님이 아닌, 피해자에게 직접 구해야만 한다. 이후에 믿음을 갖고 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것이 올바른 믿음의 시작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