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아렌트 읽기
과거에 쓰인 책이 왜 오늘날까지 읽힐까? 이러한 물음을 달고 수많은 스테디셀러를 둘러보면, 그들에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바로 21세기에 벌어지는 문제와 동일한 문제를 다루거나, 그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음이다.
『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에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다룬 악의 평범성과 더불어 아렌트의 다른 저서에 담긴 난민, 혁명정신 등의 문제를 포괄적으로 다루며 현대의 우리가 아렌트로부터 무엇을, 왜 배워야하는 지에 대해 말한다.
난민 문제는 현실적으로 와닿거나, 그들에게 진실로 공감하기엔 어려운 문제다. 몇몇의 과격한 이들은 난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며 받아들여선 안 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방인이 자국에 들어온다는 것에 거부감을 갖고 경계하는 것은 보호행위의 일환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난민을 배척하고 이들로부터 부정적인 프레임을 씌우는 행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아렌트는 유대인이란 이유로 미국 시민이 될 때까지 18년 간 무국적 상태로 지냈다. 이러한 아렌트의 경험은 그녀가 난민과 무국적자의 어려움에 예민하게 나서는 이유 중 하나다.
아렌트는 난민에 대해서 국가와 국민의 '주권'이 오용되고 있다고 말한다.난민을 배제하는 국가와 국민의 주권은 오직 바람직하지 않은 난민을 배제하는 데에 사용된다. 거부당한 난민이 지내는 난민캠프는 비참함으로부터 탈출한 이들에게 세계가 제공하는 유일한 나라로 작용된다.
난민은 현대 정치의 병적 모습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집단이다. 난민과 인권 문제를 다루는 국제 기구들과 NGO들이 증가했는데도 주권 국민은 자신들이 누구를 난민으로 받아들일지 또는 받아들이지 않을지를 결정할 "절대적" 권리를 여전히 맹렬하게 지켜내고 있다.
p.41
'양도불가능한 권리'에 대한 미국의 선언은 역사에 있어서 긍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그럼과 동시에 역설을 지닌다. '양도불가능한 권리'는 누군가를 명확하게 지목한 개념이 아닌, 추상적인 개념이다. 이는 각각의 선언을 한 프랑스인 혹은 미국인을 대상으로하지, 모든 인간을 대상으로 하지 않았다. 자연스레 난민과 같이 나라를 잃고 떠도는 이들에겐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
권리를 갖지 못한 자가 겪게 되는 최초의 상실은 고향의 상실인데, 이는 자신들이 태어나 이 세계 안에서 자신들을 위한 분명한 자리를 마련해주었던 사회적 조직 전체의 상실을 의미했다.
p.46
권리를 갖지 못한 자가 겪게 되는 두 번째 상실은 정부의 모든 보호를 상실하는 것이다.
p.47
아렌트는 가장 근본적인 권리란 "권리들을 가질 권리"라고 주장했다. 이는 권리가 보장되고 보호되는 특정한 공동체에 속할 권리를 말한다. 어떠한 공동체에도 속하지 못함이란 곧 보호받을 수도 없으며 목소리를 낼 수도 없음을 의미한다.
전체주의적 해결책들은 전체주의 정권의 몰락 이후에도 인간에게 가치 있는 방식으로 정치적·사회적 또는 경제적 고통을 완화하는 일이 불가능해 보일 때면 언제나 나타날 강한 유혹물의 형태로 살아남을 것이 당연하다.
p.59
과거 나치를 비롯한 어긋난 신념이 만들어낸 역사의 오점엔 전체주의가 있거나, 전체주의의 잔재가 남아있다. 비록 21세기에 와서는 전체주의가 몰락했지만, 이는 언제나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전체주의가 지닌 손 쉬운 해결책의 유혹은 워낙 강력하기에, 완전한 전체주의를 띠고 있지 않더라도, 어디에서나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것이 전체주의이다. 아렌트는 전체주의가 몰락했더라도 언제라도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전체주의이기에 이를 항시 경계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또한 전체주의는 법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게 하는 법적 인격 살해, 친족 간 혹은 민족 간의 살해를 지시하고 유도하는 도덕적 인격 살해, 마지막으로 자발성과 개별성의 파괴라는 3단계의 총체적 지배의 논리를 지녔으며, 이 세 단계를 거쳐 사람을 살아있는 시체로 만든다. 즉, 전체주의의 궁극적인 목표는 인간을 잉여적인 인간으로 만듦에 있다. 이처럼 아렌트가 경고하는 가장 큰 부분에 전체주의가 있다.
이 책의 매력은 아렌트를 무조건 지지하는 것이 아닌, 비판할 점은 비판하고 넘아간다는 데에 있다.
인종문제에 대하여 아렌트는 공립학교에서 흑인과 백인을 분리해 교육하는 것이 미국수정헌법 제 14조를 위반한 것이라는 내용에 비판하는 오류를 범한다. 아렌트는 유대인으로서 공격받을 때는 그 무엇도 아닌 유대인으로서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고 선언했지만, 자신의 경험에 근거해 흑인 문제를 다루지 않았다. 물론 그녀가 "사회적 영역에서 벌어지는 차별에 반대한 것이 아니었고 차별의 법적 강제에 대해서만 반대했던 것"이지만 이는 아렌트가 인종차별에 있어서 둔감했다고 볼만하다.
우리는 선과 악을 절대적인 관계로, 강한 이분법적인 방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영웅이 존재하고 악인이 존재한다. 사악한 가해자들이 있고 무고한 희생자들이 있다.
p.100
악을 신격화하는 행위는 악을 저지른 대상을 비판하는데엔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방법이지만, 이는 그 사람이 저지른 행위가 아닌 사람 자체를 악으로 뭉뚱그리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아렌트가 주장하는 '악의 평범성'은 악과 선은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닌 개인에게 공존하는 것이다. 따라서 나치 밑에서 유대인 수송과 학살을 맡은 아이히만의 죄목은 다른 이들의 고통에 대한 상상력 부재와 사유의 부재가 되며 아이히만이야말로 악의 평범성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아렌트는 주장한다.
아주 중요한 점은 집단의 권력은 집단이 함께 행위하는 동안에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집단이 해체되거나 흩어지면 그들의 권력은 사라진다.
p.141
권력이 있는 사람은 집단의 구성원들에 대해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권력을 위임받은 것이고, 따라서 그들은 권력을 부여했던 개인 또는 집단에게서 자신의 권력을 항상 철회할 수 있는 것이다.
p.141
아렌트는 권력이란 개인에게 존재하는 것이 아닌 집단에게 존재하는 것이며, 권력은 지배하여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위임받는 것이라고 말한다. 오늘날의 정치를 보면,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나뉘어있다는 기분을 받을 때가 있다. 또한 정치인의 권력에 우리가 자연스레 복종하기도 한다. 아렌트에 의하면 이는 올바르게 되고 있는 정치와 권력이 아니다. 권력은 집단의 것이며, 한 개인은 그것을 위임받은 것에 그치기에 개인이 권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고 정치를 서투르게 한다면, 언제든지 집단은 개인을 끌어내릴 수 있다. 이는 불과 몇 년 전 한국의 촛불혁명을 떠오르게 한다. 책에서 역시 한국의 촛불혁명을 언급하며 권력이란 집단의 것임을 다시금 명시한다.
오늘날 우리가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아렌트가 우리 앞에 아직도 버티고 서 있는 위험들을 예민하게 잘 이해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무관심하거나 냉소적이되지 않도록 경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p.170
처음으로 돌아가서, 우리가 아렌트를 읽고, 읽어야 하는 이유는 아렌트의 경고와 철학이 현재에서도 적실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내내 아렌트가 마치 예언가와 같다고 여겨진다.
끝으로 아렌트는 앞에 놓인 명과 암을 직시하고, 현실에 놓인 문제를 부정하지 않고 온전하게 책임지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요컨대『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를읽고 아렌트를 읽는 행위는 아렌트가 말한 '책임지는'행위의 일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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