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몽스 Aug 31. 2020

[리뷰] 레이첼 커스크의 『윤곽』을 읽고



『윤곽』은 '읽는다'보단 '듣는다'란 말이 더 잘 어울리는 소설이다. 글쓰기 강의를 가르치기 위해 그리스로 떠난 화자는 상실을 겪은 인물들을 만나며 조용히 그들의 얘기를 듣는다. 이들의 상실엔 결혼과 이혼이란 공통점이 존재한다. 비행기에서 옆자리에 앉은 남자는 세 번의 결혼과 세 번의 이혼을 했고, 안젤라키와 파니오티스 역시 이혼했으며 화자도 마찬가지다.




 난해했다. 화자가 만나는 이들 간의 대화엔 연관성이 없었다. 그저 결혼에 대한 부정적 견해가 이혼으로 이어지는 과정의 반복이었다. 챕터가 끝날 때마다 다른 인물을 만나며 조용히 듣기만 하는 화자의 모습이 반복되자 도대체 이게 무슨 소설인가 싶었다. 이럴 때 작품을 납득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저자의 배경을 아는 것이다. 저자와 화자를 무조건 동일시 여기는 것이 좋지만은 않지만 때론 소설을 읽는 데에 가장 큰 도움을 주기도 한다.




"특히 10년간의 결혼 생활과 이혼의 아픈 경험을 대담하고 솔직하게 담은 그녀의 회고록 『후유증: 결혼과 이혼』은 영국 문단에 큰 파장과 논쟁을 낳았다."




『윤곽』 저자 소개 글 중 일부이다. 물론 『후유증: 결혼과 이혼』을 읽어 보는 것이 저자의 배경 이해에 좋을 테지만, 저자의 개인적 경험 중 이혼이 있단 사실만으로도 『윤곽』을 읽는 데에 도움을 준다.


 화자가 만나는 인물들의 상실과 슬픔에 대한 얘기를 잔잔하게 듣다 보면, 나 역시 읽는 이가 아닌, 듣는 이의 자세를 취하게 된다. 주황빛 조명 아래에 마주 앉아 와인을 기울이며 옆자리엔 화자를, 건너편엔 라이언, 안젤라키, 파니오티스와 합석하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비행기 옆자리에서 만난 남자와 보트를 타기도 한다.


 화자의 귀에 피딱지가 생기지 않을까 염려될 때도 있지만 듣는 행위는 되려 나를 찾게끔 한다. 심지어 말하는 이들이 하나같이 상실을 겪은 이들이라면 더 그렇다. 들으면 들을수록 안에 무언가 쌓이긴커녕 되려 비워진다. 이는 말하면 말할수록 홀가분해지는 것이 아닌, 답답해지는 경우와 비슷하다. 화자는 듣고, 등장인물들은 말한다. 나 역시 듣고, 등장인물들은 말한다.



 그림으로 그리자면 위의 그림과 같다. 하얀 원이 듣는 이의 비워진 내면이다. 경계 밖의 회색 배경은 말하는 이의 내면이다. 우린 화자와 함께 인물들의 상실과 슬픔을 들음으로써 자신의 윤곽을 그린다. 나를 제외한 바깥의 틀에 존재하는 윤곽만이 선명해진다. 윤곽이 선명해지는 건 긍정 혹은 부정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름의 기준에 따라 좋을 수도, 안 좋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튼, 우린 듣는 행위로 윤곽을 그려간다. 듣기 전엔 답답한 회색이 들어차있던 내면을 하얗게 칠해간다. 상실을 겪기 전과 후의 윤곽은 다르다. 과거에 맞았던 윤곽과 현재에 맞는 윤곽은 달라야 한다. 상실을 기준으로, 계절이 변하듯 옷을 바꿔 입는 것이 순리다.




 마냥 상대방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란 어렵다. 지겹기도 하다. 때론 상대와 나의 의견이 맞지 않아 고쳐주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런 면에서『윤곽』을 읽는 건, 듣는 자세를 갖추기 위한 연습이다. 읽는 게 듣는 것의 연습이라니, 말에 어폐가 있지만, 이 표현이 가장 알맞다고 생각한다.


 인물들의 상실로부터 나의 상실을 찾을 수도 있다. 결혼과 이혼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긴 하지만, 그 외에도 열정과 낭만, 사랑의 상실도 있다. 『윤곽』을 통해과정과 결론, 어느 하나로부터 분명 공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6562831


매거진의 이전글 [리뷰] 통역사 정다혜의『인생도 통역이 되나요』를 읽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