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MBTI시대에 등장한 MBTI테마단편소설집!
『혹시 MBTI가 어떻게 되세요?』中, 「주말에는 보통 사람」p.45, 임현석(INTP)
I인 사람으로서 정말 공감가는 대목이었다. 직설적으로 부르지 말라고 하긴 좀 그렇고, 이정도면 눈치껏 알아 먹겠지?라는 생각으로 돌려 말하지만 실패해버리는 상황. 이런 친구들에게 쉬는 날은 '집'에서 쉬는 걸 말하는 거지, '일'만 쉬는 걸 말하지 않는다. 아무튼 그렇다.
MBTI는 스몰토크나 아이스브레이킹으로 무난하면서도 간단하게 상대방을 파악할 수 있는 가성비 좋은 대화주제다. 『혹시 MBTI가 어떻게 되세요?』라고 물어보는 순간, 경우는 두 가지로 나뉜다. 나와 같거나 다르거나. 같은 성향을 만나면 공감의 대화를 시작하고, 다른 성향을 만나도 그럭저럭 대화를 이끌 수 있다.
MBTI는 대화주제로만 소비되지 않는다. '나'라는 인간에게 하나의 이미지를 부여한다. 물론 16가지밖에 안되기에 모든 인간을 담을 순 없겠지만, 나름 잘 맞는 부분이 있다. 각 성향마다 대표되는 특징을 읽으면, 이것 참 신통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혹시 MBTI가 어떻게 되세요』는 6명의 소설가가 INTJ, INTP, ENFP, INFJ, INFP 유형의 인물을 등장 시킨 'MBTI 테마 단편소설집'이다. 자매품으로 『저는 MBTI 잘 몰라서...』와 『우리 MBTI가 같네요!』가 있다.
나는 INFP라서 이번 책을 사서 읽었다. 표지가 워낙 귀여워서 세 권 다 모으면 예쁠 것 같지만 굳이 하나만 골라야 한다면 각자의 MBTI 성향을 다룬 작품이 담긴 책을 사면 될 듯하다.
“다들 하는 인터넷 테스트, 그건 정식 MBTI도 아니래요. 정식 MBTI도 심리학계에서는 그다지 신뢰하지 않고요.”
“그냥 재미있는 사회현상으로 받아들이고 즐기면 되죠. 권위 같은 게 그렇게 중요해요?”
p.29
꽃에 이름이 있는 것처럼 사람들은 성격에도 맞춤한 이름이 있기를 바라는 거겠지.
p.37
사실 INFP인 나는 다른 유형에 대해선 자세히 모른다. INTJ인 사람이 주변에 누가 있을까 생각을 해봐도 떠오르지 않는다. 이 유형은 소설로 미루어 보자면, MBTI 자체를 왜 믿어? 하는 유형인 듯하다. 능력 있고 계획적이지만 사회성이 조금 부족한 그런 느낌이다.
MBTI에 과몰입하는 건 분명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유희로 즐기는 사람들에게 극성으로 반대하는 과몰입도 안 좋다. 그냥 즐기면 된다.
MBTI의 긍정적인 면은, 같은 유형을 만나거나 특징을 나열한 글을 통해 '나 혼자만이 아니었구나'라는 위로와 약간의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유형에 부여된 이미지를 충실히 수행해 나갈 필요는 없고, 단점으로 지적되는 부분이 자신과 부합하다고 생각된다면 유심히 들여다보는 정도가 좋을 듯 싶다.
말싸움을 하면 결국엔 내가 이기겠지만 아무튼 논쟁 자체가 몹시 귀찮은 일이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중략)… 나쁜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 일반적이진 않은 거 같다고, 윤아가 턱을 괸 채로 나를 보며 말했다.
p.53
나 혼자 공인중개소가 왜 망했을지 상상해 보는 동안 바깥에서 타로를 보려고 늘어선 대기 줄이 차츰 줄어들었다.
p.54
INTP는 잡생각이 많고, 보이는 걸 최대한 순화해서 말하려다가 버퍼링이 걸리는 듯하다. 있는 그대로의 본인 생각을 말하고픈 충동과 원만한 인간 관계를 통해 보통의 인간으로 지내야 겠다는 생각이 치열하게 싸운다.
작품 속 INTP인 인물이 속으로 중얼거리는 모습이 굉장히 귀여웠다. 보통의 질문에 일반적이지 않은 대답을 하고, 일반적이지 않다는 말을 들으면 보통의 답변을 학습한다. 이 과정을 통해 보통의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귀엽다.
“너는 1순위가 맞다, 틀리다야. 좋다, 싫다는 그다음이고.”
영지는 반박하고 싶었으나 아냐, 틀렸어, 라고 생각해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잠시 후에 맞아, 맞는 것 같아, 하고 대답했다. 그게 좋든 싫든 간에.
p.81
영지는 말로는 절대지지 않았다. 몸으로는 싸워본 적이 없어서 몸싸움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말싸움은 꼭 이겼다. 아니, 싸움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냥 맞는 말을 하는 것일 뿐, 그리고 네가 틀린 말을 하는 것일 뿐. 상대가 친구든 엄마든 애인이든 선생님이든 그랬다.
p.97
ENTP와 INTP는 역시 비슷하다. 그래도 ENTP가 조금 더 급진적이랄까. 「도도와 단추」에선 모든 분야에서 무난한 인물. 특출 나지 않지만 모난 곳도 없는 ENTP를 그려냈다. 허례허식과 쓸데없는 관습과 제도를 부정적으로 보며, 때론 이에 대해 급진적인 생각을 품고 산다.
그리고 도도가 사랑스럽다. 귀여운 고슴도치와 논리적인 주인공의 동거가 이렇게 귀여운 조합이라니.
쌀이든 고구마든 되는대로 최선을 다해 작물을 심고 그 수확으로 겨울을 나야 하는 중요한 땅에 나는 고작 꽃씨를 뿌렸다. 남들이 잡초를 뽑고 약을 치며 땀 흘려 일하는 때에 꽃을 보며 그저 놀았다.
p.112
세상에는 나쁜 이상함, 유해한 이상함이 있고 좀 바보 같지만 무해한 이상함이 있다. 남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함, 그건 아무래도 잘못은 아니다.
p.124
내게는 정말 현실감각이 조금도 없구나.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으로서 꼭 갖춰야 할, 피푸 위에 두텁게 두르고 살아가야 할 그것이 내게는 전무하구나.
하지만 없다면 어쩔 수 없다.
p.134
이상하게 보이고, 현실감각이 없어서 얼렁뚱땅한 ENFP. 이상하지만 무해하고, 현실감각이 없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ENFP는 존재만으로 미소가 지어진다.
잡생각이 마구마구 떠오르고, 이를 정리하는 와중에도 다른 잡생각이 피어오른다. 누군가는 한심하게 보고, ENFP는 좌절에 빠지기도 하지만, 뛰어난 회복탄력성의 ENFP다.
나는 MBTI가 뭔지 묻는 사람을 볼 때마다 나를 궁금해 하는 건지 아닌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 진심으로 나를 알고 싶어 하는 마음보다 유튜브 쇼츠 보듯 지나가면서 짧게 파악하고 싶은 게 아닐까?
...(중략)...
그래도 나는 MBTI가 좋아. 누군가를 알고 싶은 마음이라니 기특하고 귀엽잖아.
p.162
근데 사람들이 그걸 왜 좋아하는 거냐?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빨리 알 수 있으니까.
빨리 알아서 뭐하게?
시간을 아낄 수 있잖아.
다들 그 정도로 바쁘냐? 사람을 천천히 알아갈 시간도 없을 정도로?
p.168
INFJ라면 집단 생활을 못할 것이라는 편견에 대한 비판을 담았다. 각 유형 별로 특징이 있지만, 앞서 말했듯이 단순한 유희로 즐기면 된다. 특정 유형은 직장 생활에 맞지 않을 것이다~공감을 못한다~등의 요상한 프레임은 때론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든다.
MBTI는 타인을 알고 싶은 귀여운 마음이지만, 딱 그정도로 두자. 누군가를 알아가는 건 천천히, 정성들인 시간에 역시나 비례하니까. 들인 정성과 시간만큼 그 마음의 크기가 부풀고, 머무르고, 때론 줄어들기도 하니까.
조금만 더 나중에…… 나중에 모두들 보러 갈게.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나중이 있을까. 우리가 아무 사이도 아니게 되는 일은 너무 쉽다.
p.180
지수 씨가 솔직히 말해줘도 나 그렇게 안 듣겠지. 또 다른 속마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최악이다, 최악이네.
p.201
뭔가를 예감하면 아프고 슬프다. 생생했던 것들이 모두 희미해지고 결국 사라져 버릴 거라는 절대 미래. 그런 걸 예감하면 찔리는 것처럼 아픔을 느끼는데 그게 너무 슬프다. 그게 정확히 내가 느끼는 나에 대한 감각이다.
p.210
E유형의 애착 유형이라나 뭐라나하는 INFP다. 온갖 공상을 다하고, 감정의 높낮이 폭이 큰 유형이란 인식이 있다. 그래서 감정을 잘 다룰 줄 아는 사람도 있다. 워낙 자주 요동치다보니, 다루는 요령을 익히고, 금방 벗어나는 방법을 터득한다.
은둔하는 경우엔, 양가적인 마음이 공존한다. 혼자 있고 싶다는 마음과 누군가 나를 찾아줬으면 싶은 마음. '나 여기 있어!'하고 외치면 봐줄 사람이 있길 바란다. 근데 그걸 못외치는 경우가 많고, 「나 여기 있어」에서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겨우 네 글자로 개인을 정의할 수 없고, 고작 16개의 유형으로 모든 사람을 형상화할 수는 없다. 이를 알면서도 MBTI에 열광하는 이들이 있다는 건, 꽤 아이러니하다. 열광하지 않더라도, 한 번씩은 MBTI검사를 하고, 자신의 유형을 찾아본다. MBTI 비슷한 성격유형테스트가 SNS에서 유행하고, 식을 때쯤 다른 테스트가 등장한다.
그렇다고 이를 겨냥한 『혹시 MBTI가 어떻게 되세요?』가 단순한 흐름타기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개별 독자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고, 겪어본 적 없거나 관심 밖이던 유형을 가진 인물을 통해 '나' 밖의 세상을 기웃거릴 수 있게 한다. 그게 문학과 소설이 해오던 일이다. 특정 유형을 가진 지인에게 선물로 주기에도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작가가 다수 참여한 것도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