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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by 은수달

우리에게는 자신의 내면을 탐색하고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그 과정이 분명하고 뚜렷하지 않을지라도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줄 거라고 믿는다. 모든 사람과 잘 지내는 것보다 나와 잘 지내는 것이 중요하다.


-우지현, <혼자 있기 좋은 방>




'나랑 잘 지내는 것이 어떤 걸까?'


표지의 그림이 마음에 들어서 고른 수필을 읽으며 은수는 생각해 보았다. 흔히 다른 사람과 잘 지내는 방법을 고민하거나 주위에 물어보는데, 나와 잘 지낸다는 표현이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유튜브에 접속하면 추천 동영상이 뜨고 마음에 드는 걸 플레이리스트에 저장할 수 있다. 우연히 보게 된 영상에서 에릭 사티의 <Je teux veux>라는 곡이 흘러나온다.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추억이 있지. 카페에서 일할 때 점장님이 플롯으로 직접 연주해 준 특별한 곡...'


낯가림이 심하고 소심했던 소녀는 사회에 나와 씩씩하고 주관이 뚜렷한 어른이 된다. 하지만 여전히 대인관계 때문에 고민하거나 상처받곤 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주인공이 순전히 남성 또는 여성이 되는 일은 치명적이에요. 남성적인 여성이나 여성적인 남성이 되어야만 해요. 여성이 어떤 불만을 조금이라도 강조하거나 정당하더라도 어떤 원인을 변명하는 것,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여성임을 의식하고 말하는 행위는 치명적이에요. 의식적인 편견을 가지고 쓴 글은 모두 소멸할 운명에 처해요. 풍요롭게 될 수가 없지요."라고 언급하면서 작가의 중요한 자질과 의무에 대해 강조한다. 문득 자신을 '남성의 탈을 쓴 여성'이라고 얘기했던, 아는 동생이 생각났다. 은수 역시 지인들한테 '여성의 탈을 쓴 남성'이라고 농담처럼 던지지만, 그 안에 진실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우린 사회가 만들어놓은 편견에 상대를 가두면서 자신도 그 안에 갇힌다는 걸 종종 잊는다.


서울 출장 후 녹초가 되어 귀가한 은수는 따뜻한 물로 샤워한 뒤 소파에 반쯤 드러누워 멍하니 창밖을 쳐다본다. 그리고 비로소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건 행운이야. 익명성 안에 나를 감춘 채 온전히 쉴 수 있다는 것도...'


주말엔 독서 모임이나 친구와의 약속, 혹은 데이트가 있다. 때론 가족 모임도 있어서 온전히 혼자만의 주말을 보내본 지가 까마득하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곡이 은수를 반긴 건, 병원이라는 무대에서 내려와 보호자라는 가면을 벗어던지고 난 뒤였다. 버스를 타고 귀가하면서 '아모르파티(Amor Fati)'라는 라틴어가 떠올랐다.

'힘겹게 빼놓은 시간인데, 이렇게 또 가족이라는 운명공동체에 실려가는구나.'


은수가 뭔가를 하려고 마음먹거나 모처럼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하면 어김없이 장애물이 나타났다. 장애물이라고 표현하기엔 좀 그렇지만, 가려는 길을 멈추고 우회하게 만든다는 점에선 맞는 것 같다. 새벽을 가로질러 달리는 열차 안에서 그녀는 문득 '리스본행 야간열차'라는 소설 제목이 떠올랐다.


'난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 내 가족 앞에 던져질 과제는 무엇일까.'


오래된 기계가 녹슬거나 고장 나는 것처럼 사람도 마찬가지다. 진료실에서 담당 의사의 설명을 들으며 현실은 언제나 기대를 배반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내 수명이 십 년쯤 줄어든다고 해도 아버지가 좀 더 건강해질 수 있다면...'


가족애나 이타심조차 위선이나 이기심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일까. 어깨에 힘이 빠지고 흰 머리카락이 늘어난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녀의 마음엔 연민과 안타까움이 스며든다. 열차 사이를 오가며 다들 무슨 사연으로 타지를 오가는지 궁금해졌다. 자기만의 방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던 우울증 환자가 이젠 넘쳐흐르는 연민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 모르겠다. 오지랖과 친절함의 차이도, 사랑과 집착의 차이도. 문득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행복하게 해 줄 자신이 있다고, 호기롭게 외치던 한 사람이 생각났다. 하지만 자신의 행복조차 찾기 힘든 세상에서 남의 행복을 책임지겠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내 행복은 내가 찾을 거예요. 그러니까 날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아요.


또다시 전쟁터로 가기 위해 알람에 맞춰 눈을 뜬다. 5분, 10분, 20분... 아침도 거른 채 차 문을 여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설마 또 배터리 방전은 아니겠지...'

다행히 시동이 걸렸고,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차를 몰기 시작한다. 교통지옥으로 들어선 순간 평소보다 몇 배 더 긴장한다. 얌체 끼어들기와 신경질적인 경적을 오랜만에 들으니 새삼 출근이 실감 난다.




좋은 글이란 진흙탕 속에서 조개나 진주를 캐내는 작업과도 같다고 은수는 생각한다. 사흘 동안의 글쓰기, 그리고 틈틈이 끼어드는 상념들. 문득 독서 모임 멤버가 언급한 '잔류사념'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하루에도 수만 권의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저마다 자기 좀 봐달라고 아우성친다. 하지만 진짜 괜찮거나 도움이 되는 책들은 드물다. 누군가 지구가 멸망하게 된다면 마지막으로 남겨두고 싶은 책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주저 없이 니체가 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꼽았다. 혹자는 지나치게 추상적이거나 어렵다고 얘기하지만, 이 책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라면 니체의 시대를 앞서가는 관점과 은유적 표현에 감탄할 것이다.


언제부터 소설을 멀리하고 에세이나 시를 가까이 두기 시작했을까.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읽으며 눈물 글썽이던 소녀는 경제학이나 자기 계발서를 읽으며 실생활에 적응하려 애쓰는 사회인이 되었다. 하지만 밥벌이를 위해서도,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도 독서는 꼭 필요하고, 글쓰기는 독서를 성장시키는 영양제이다. 짧지만 많은 얘기를 담고 있는 작업을 마치고 자기만의 방으로 들어간다. 당분간 긴장을 풀고 휴식할 테니 '방해하지 마시오'



P.S. 2020.02.12. '카프카의 밤'에서 펴낸 잡지 <진메이커스>의 내용을 편집해서 실었습니다.



http://aladin.kr/p/n1Vi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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