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 사람들에게 엔잡러라고 밝히면 어김없이 다음과 같은 질문이 이어진다.
"본업이 뭐예요?"
흔히 '본업'이란 생계 수단으로써의 직업을 얘기한다. 그렇다면 나의 본업은 사무직, 그중에서도 회계 및 문서를 맡고 있다. 주요 업무는 그렇고, 청소부터 운전, 손님 접대, 통역, 디자인 등 그 외의 업무도 다양하다.
처음부터 이러한 업무들을 담당하려고 지금 직장에 입사한 건 아니다. 원래 있던 직원 한 명이 갑자기 그만둔다고 하는 바람에 급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고, 생전 처음 캐드란 걸 학원에서 배우게 되었다. 비상 인력으로 투입되었지만 그나마 할 줄 아는 게 기본적인 회계랑 서류 작업이었다.
그러나 다혈질인 사장님의 말뜻을 정확히 이해하고 기분을 맞춰주는 일이 가장 어렵다는 건 입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었다.
'일에도 순서라는 게 있고 실수 없이 진행하려면 차분하게 지시 내려도 되는데 왜 저렇게 매번 서두르는 거지?'
하지만 이건 피고용인인 나의 입장일 뿐, 돈에 누구보다 민감하고 직원들의 사생활에 유난히 관심 많으며 불가능도 가능으로 바꾸게 하는 힘을 기대하는 고용주 입장은 달랐다.
그중에서도 사장님이 특히 신경 쓰는 업무는 결재랑 화분에 물 주기이다. 전자는 잘못하면 추가 비용이나 손실이 발생하는 거라 이해가 되고도 남았지만, 후자는 쉽사리 이해가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물 주고, 비료 주고, 상태 확인해야 하고... 물론 공기정화에 좋긴 하지만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잖아.'
하지만 연휴를 앞두고 화분에 물을 주면서 왜 사장님이 그토록 이 일을 강조했는지, 본인이 바쁠 때 이 일을 나한테 맡겼는지 이해가 갔다.
평소에 스트레스 잘 받고 예민한 사장님은 식물을 키우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았고, 무뚝뚝하긴 해도 군말 없이 꼼꼼하게 일을 처리하는 나를 누구보다 신뢰했다. 무엇보다 본인한텐 어렵고 까다로운 일이 내 손에 넘어오면 원만하게 해결되기에 어떨 땐 과장님이나 부장님보다 날 더 자주 찾곤 한다.
점심을 먹고 나서 직원들과 청소하다가 아톰 대리한테 간식을 챙겨주었다.
"명절 때 혼자 있어야 할 텐데 괜찮겠니?"
"제가 중간에 들러서 챙겨줄 테니 걱정 마세요."
옆에서 듣고 있던 과장님이 대신 대답했고, 아톰은 간식을 담요 위로 들고 가더니 숨어서 야금야금 먹기 시작했다.
재작년 추석을 앞둔 어느 날, 과장님이 내게 조심스레 부탁을 했다.
"업체 통해 계약한 외국인이 한 명 있는데요. 오늘까지 일하고 내보내기로 했는데, 그쪽에서 지난주에 직접 알려주기로 해놓고 잊어버렸대요. 영어로 이 상황을 설명해줘야 하는데 어쩌죠?"
난감한 상황이라 아무리 설명을 잘해도 외국인 근로자 입장에선 충격이거나 상처받거나 둘 중 하나일 게 분명했다.
점심을 먹고 난 뒤 그 직원을 불러 좌초 지종을 얘기하며 미안하다고 했다.
"괜찮아요."
웃으면서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명절이 지나면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그의 입장을 생각하니 괜히 미안하고 안타까웠다.
규모가 작은 회사다 보니 업무가 중복되거나 원치 않는 일을 맡게 될 때도 있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은 재택근무를 하고 사정이 있을 땐 일찍 퇴근하거나 쉴 수 있다. 무엇보다 다른 직원들이랑 손발이 잘 맞는 데다 남초 직장이라 사소한 일에 신경 곤두세울 일도 비교적 적은 편이다.
오늘도 엔잡러는 일찍 귀가한 뒤 명절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P.S. 아톰은 6년째 회사에서 키우고 있는 반려견입니다. 나이가 많고 식성이 까다로워 국내산 간식만 먹이고, 주말엔 복도에 사료와 물을 챙겨두고 간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