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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러운 이유

by 은수달


"둘째 딸이 이번에 학년에서 수석 했대요. 그래서 장학금 받는대요."


조용했던 사무실은 과장님의 목소리에 다들 축하 인사를 건네기 바쁘다. 힘든 코로나 시기를 지나 전공을 살리기 위해 올해 대학 입학한 과장님의 둘째 딸은 욕심도 많고 공부도 제법 잘한다. 하지만 수석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아들 하나 낳으려고 딸을 줄줄이 낳은 뒤 이름도 제대로 붙여주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베이비 붐 시대엔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표어가 유행했고, 삼 남매였던 우린 주위 눈치를 살펴야만 했다.


부모님이 사업을 하다 보니 주위엔 각종 아들이나 딸 얘기가 떠돈다. 힘들게 꾸려온 사업을 유학 다녀온 아들한테 물려줬더니 사고 치고 감옥에 갔다는 얘기부터 일밖에 모른다고 칭찬하던 외동아들은 일터에서 심장마비로 숨졌다는 얘기까지. 아무리 노력해도 1세를 만족시키기 어려운 운명에 처한 2세들. 하지만 그중에 딸이 재산을 말아먹거나 사고 쳤다는 얘긴 거의 못 들어봤다.



"제 이름이 왜 필남인 줄 알아요? 종갓집이라 둘째는 반드시 아들 낳으라고 붙여줬대요."

어른들의 소망대로 아들이 태어나긴 했지만, 장녀는 아들의 그림자에 가려져 꿈을 마음껏 펼쳐보지도 못했다.


큰댁에 아들이 없어서 늦둥이로 태어난 남동생이 장손이 되어버렸다. 그만큼 어른들의 기대도 컸고, 큰댁보다 형편이 조금 낫다는 이유로 제사를 떠넘기려는(?) 할머니와 삼촌들 때문에 어머니는 제사 대물림 종식을 선언했다.


"눈에 흙이 들어가도 우리 아들이랑 며느리한테는 제사 안 물려줄 거예요."


평생 양가 행사를 챙기느라 정신없이 달려온 K 장녀 엄마. 하지만 그런 엄마도 아들 밖에 모르는 아들바라기였고, 어린 나이에 운동을 시작한 남동생 뒷바라지 하느라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부모님이 너한테 사업 물려주는 거 아냐?"

오랫동안 나의 가족과 맡은 일을 지켜봐 온 지인이 물었다.


"그럴 리가요. 아무리 능력 있어도 아들을 이길 수 있겠어요."


자신은 장남인데도 집에선 찬밥 신세라고 불평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 역시 아들이라 장녀와는 다른 대접을 받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여자들이 왜 그렇게 독하게 공부하거나 일에 몰두하는지 알아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집안이나 직장에서 제대로 인정받기 힘들기 때문이에요."


"여자가 일로 성공하려면 결혼이나 육아와는 거리를 두는 게 유리해요. 특히 여자한테 집안일 대부분을 떠넘기거나 슈퍼우먼을 강요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물론 세상 모든 딸들이 아들보다 낫거나 효도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딸보다 나은 아들도 분명히 존재할 것이며, 집안마다 자녀의 역할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여자로 태어난다는 건 신체적, 사회적 약점을 가진 채 세상으로 나오는 것과 다름없다. 학교폭력뿐만 아니라 각종 성범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 사회에서 딸을 제대로 키우는 것이 그만큼 힘들다는 뜻이기도 하다.


아들이기 때문에, 남자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넘어가는 대신 아들이니까, 남자니까 좀 더 책임감을 가지고 여성을 아껴주고 존중해 주라고 가르쳐보는 건 어떨까.



p.s. 특정 성을 옹호하거나 비방하려는 의도는 없으니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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