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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한테 버림받아서 행복한 딸

by 은수달


"친구들이랑 저녁 먹고 놀다가 너희 집에 갈게. 늦으면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라."


예전엔 같이 저녁 먹자고 조르거나 약속 있다고 하면 대놓고 서운해하던 간장종지였다. 하지만 지난번 대반란(?) 이후로 달라졌다. 가족들과 적당히 거리 두고, 자신의 인생을 즐기기로 한 것이다.


나이 들어서 서럽다는 말을 습관처럼 하던 엄마는 외국에서 뇌진탕을 입은 후 인생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법무사를 찾아가 유언장 작성을 구체적으로 의논했고, 틈날 때마다 친구나 지인들과 어울렸다.


"내가 니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대부분 부모가 가진 보상 심리는 잊을 만하면 되살아났고, 그럴 때마다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키워주신 건 감사하지만, 저희 나름의 행복과 인생이 있어요."


할 말 다하고 계획적인 T 딸과 즉흥적인 F 엄마 사이엔 건너기 힘든 강이 흐르고 있다. 하지만 나도 나이가 드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내가 엄마의 딸이라는 사실은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여전히 엄마가 밉고 이해 안 가는 부분이 많다. 초등학교 때 강제전학을 당했을 때는 엄마가 친모가 아니라는 확신이 생겨서 가출을 결심했다. 하지만 집 나가봤자 고생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노력했다.



오늘도 엄마는 장녀를 버리고 친구들을 선택했다. 덕분에 양푼이 딸은 마음 놓고 사우나에 다녀온 뒤 여유롭게 저녁도 챙겨 먹었다.


"친구 같은 모녀는 드라마에서나 존재해요. 나한테 엄마는 감독관 아님 직장상사와 같거든요."


남들한텐 존경받고 카리스마 넘치는 간장종지가 딸에겐 늘 어렵고 불안한 존재였다. 언제 말이 바뀌거나 행동이 달라질지 몰라 눈치를 살폈고, 떼쓰면 더 혼나거나 불이익이 돌아온다는 걸 알기에 갖고 싶은 게 있어도 일찌감치 포기했다. 대신 원하는 걸 얻기 위해 노력하거나 투쟁하는 법을 배웠다.


간장종지는 가족을 위해 평생 희생했으니 여생이라도 마음 편하게, 못해본 일들 실컷 했으면 좋겠다. 양푼이는 하고 싶은 일은 거의 다 해봤으니 내일 당장 죽는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그러나 적어도 부모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는 자식이 되지 않기 위해, 치사하고 비열한 인생을 견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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