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독서 #1 불편한 편의점

따뜻한 환대와 현실 전복의 욕망

by 은수달


"자유롭게 책 읽고 감상평 공유하는 것도 좋지만, 같은 책을 좀 더 깊이 있게 읽고 생각을 나눌 필요도 있지 않을까요?


독서에 대해 부담감을 느끼는 분들이 많아서 모임 초반엔 '자유 독서' 위주로 진행되었다. 그러다 보니 다양한 사람들이 많이 유입되긴 했지만, 찐 독서를 원하는 분들은 상대적으로 아쉬움을 느꼈고, 나도 그들 중 하나였다.


여느 독서모임처럼 #부산독서모임 헤베스에서도 '지정 독서'라는 콘텐츠를 통해 독서토론을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베스트셀러부터 고전, 자기 계발서, 인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리더들과 같이 읽고 서로 생각을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인 것 같다. 얼마 전에 진행을 맡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은 원작과 영화를 비교해가며 읽어서 더욱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졌다.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김호연의 장편소설 #불편한 편의점


한동안 소설과 거리를 두고 지냈는데, 오랜만에 재밌는 소설을 발견한 것 같다.


[사진 1] 마음에 드는 구절을 발견하면 나중에 기억하고 메모하기 위해 위와 같이 촬영해둔다.



"타인은 도구도 아니며 사물도 아니다. 타인은 이 사물의 세계에 함께 거주하는 자이다.

우리는 타인을 함께 거주하는 자로 대해야 한다."


-레비나스, 타자 윤리학



기대 반, 의심 반의 마음을 품고 책장을 천천히 넘기기 시작했다. 지갑 분실 사건으로 시작되는 도입부가 눈길을 끌었고, 그 뒤에 이어지는 예상 못 한 전개에 당황했으며, 인물들이 빚어내는 갈등과 화해의 과정을 보면서 감탄했다. 특히 주인공 '독고'와 편의점 사장이자 전직 교사였던 '염 여사'라는 인물이 흥미로웠다.


지갑을 돌려준다는데도 뭔가 불안하고
다른 걸 요구할까 두려움이 번졌다. (9쪽)


어눌한 말투만으로 그가 '노숙자'라고 확신했지만, 지갑을 찾아주고도 사례를 요구하지 않는 그를 다시 보게 되는 그녀다. '오랜 시간 교단에 서 있으며 몸에 밴 피드백'이자 직업정신이 그를 편의점까지 데리고 가게 만든다. 하지만 독고의 행색을 마주한 아르바이트생 시현은 그리 달갑지 않다. 남들은 쉽게 먹을 수 있는 도시락이 그에겐 '산해진미'로 여겨지고, 자신한테 호의를 베푼 염 여사가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시현과 염 여사의 대화를 통해 타인에 대한 무조건적 환대를 확인할 수 있다. 처음에는 이해관계로 시작되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관계는 단순히 고용주와 직원의 사이를 넘어 가족 같은 애틋함과 서로를 걱정하고 응원하는 마음으로 발전한다.


[사진 2] 날짜와 시간도 같이 기록되어 유용한 어플 #타임스탬프



이 작품에서 주목할 점은 등장인물들의 목소리를 차례대로 들려준다는 점이다. 염 여사 눈에 들어온 독고부터 같이 일하는 공시생 시현, 남편과 아들이라는 이해 불가한 남자 둘과 사는 선숙. 저마다 고충과 사연을 가지고 있지만, 작가는 신파극 대신 풍자와 아이러니를 통해 효과적으로 그려낸다.



줄곧 불청객 취급을 받던 독고의 활약은 손님으로 온, 한 소년으로 인해 빛을 발한다. 소년은 삼각김밥을 점퍼 안에 몰래 넣다가 선숙한테 들키고 한바탕 소동을 피운다. 하지만 독고는 오히려 소년 편을 들면서 상황을 중재하기 위해 노력한다.



피해자는 도둑질을 당하고 김밥으로 얼굴을 강타당한 자신이어야 했다. 하지만 독고 씨가 순식간에 일을 정리해버리는 바람에 제대로 화도 못 내고 말았다. 선숙 씨는 신기하게도 화가 잦아들었고 딱히 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97쪽)


늘 자신을 피해자라 여기며 세상에 불만을 가득 품고 있던 선숙은 자신과는 너무 다른 독고로 인해 답답함을 넘어 묘한 안도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선숙에 이어 편의점을 자주 찾는 경만 역시 '곰 같은 사내' 독고한테 불편함을 느끼지만, 지옥에서 잠시라도 로그아웃 하고 싶어서 묵묵히 참깨 라면에 소주를 먹고 간다.



과로를 하느라 가정에 충실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돈도 많이 못 벌어다 줘 대접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자, 아내도 지치고 경만 역시 가족에게 잘해주지 못했다. (115쪽)



이 작품에 등장하는 '경만'은 신자유주의 시대를 힘겹게 표류하는 전형적인 가장의 모습이다. '아내에게는 존재감 없는 남편으로, 쌍둥이에게는 재미없는 아빠로 어떠한 반전도 주지 못한 채 늙어갈' 걸 걱정하는 그에게 유일한 위안거리가 바로 참깨 라면과 소주인 것이다.


경만에게 소주 대신 옥수수수염차를 권하던 독고는 그를 위해 온풍기를 꺼내 주며 위로를 건넨다. '경만은 왕따였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왕따가 아니었다. 이놈의 불편한 편의점이 한순간에 자기만의 공간으로 돌아왔다.'(125쪽) 어쩌면 그에게 진정 필요했던 건 소주 한 잔으로 얻을 수 있는 찰나의 위안이 아니라, 누군가 자신을 챙겨주고 인정해 주는 공간이 아니었을까.


염 여사와 독고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다양한 인물들의 에피소드는 유기적으로 얽혀 소소한 재미와 감동을 선물하고, 그 속에서 독자들은 따뜻한 환대를 받는 동시에 현실 전복의 욕망을 충족하게 된다. 어쩌면 조건 없는 환대야말로 실리와 효율 중심으로 돌아가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희망을 꿈꿀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아닐까.


[헤베스 지정독서 북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