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락호락하지 않은 유학 준비

SOP, 나를 찾아 떠난 글쓰기

by 숭늉

시간이 얼마 없었다. 보통 12월 1월이면 학교별 지원서가 마감되다 보니 지금부터 바짝 준비해도 반년이었다.

유학길에 오르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은 높고 많았다. 기본적인 어학 점수인 토플은 물론, 미국 대학원 입학 자격시험인 GRE 점수가 필요했다. 서류로는 Statement Of Purpose와 자기소개서(Personal Statement), 그리고 추천서가 기본이었다. 여기에 내가 목표로 하는 조경학 석사(Master of Landscape Architecture) 프로그램의 특성상 가장 중요한 포트폴리오 제출이 별도로 요구되었다.


나는 한국에서 조경학과로 학부를 나왔고, 회사 조경팀에서 6년을 일했다. 그 경험이 전부였기에, 다른 분야로의 도전은 감히 상상하기 어려웠다. 당연히 조경 석사를 가는 것이 마땅하다고, 가장 안전한 길이라고 그땐 그렇게 믿었다. 그 외의 다른 가능성은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던 것, 그게 그 당시 나의 딱딱하고 편협했을 사고의 틀이었다.


먼저 어느 학교의 어떤 프로그램에 가고 싶은지 대략이라도 정해야 했다. 그래야 요구하는 시험과 커트라인 점수를 알 수 있고, 어떤 서류가 필요한지, 지원 일정은 어떤 지 알 수 있다. 이왕 힘든 길을 가는 것, 최고의 학교에서 제대로 배우고 싶었다. 조경 분야에서 가장 인정받는 하버드와 UPenn, 이 두 곳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지원 경험 축적과 만약을 대비해, 지원 일정이 빠른 UC Berkeley와 포트폴리오 중심의 RISD까지 총 네 곳에 지원하기로 목표를 정했다.


이 모든 과정을 유학원 없이 혼자 힘으로 헤쳐나가기로 마음먹었다. 건축/조경 분야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일반 유학원보다는 내가 직접 정보를 찾고 부딪히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고, 스스로 해내고 싶은 마음도 컸다.



맨땅에 헤딩, 유학 준비의 시작


가장 먼저 한 일, 토플 준비의 정석 코스인 해커스 평일 저녁반에 후다닥 등록했다. 퇴근 후 저녁은 대충 때우면서 서울 도착과 동시에 수업 시작, 밤 10시까지 수업 후 11시까지 스터디, 귀가 후 새벽까지 이어지는 단어 암기… 밥 먹을 시간, 쉬는 시간은 사치였다. 유학 가서 뭐 하지? 고민할 시간도 없었다. 그냥 그대로 직진이었다. 회사 일을 병행하는 것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회사행 셔틀버스, 짧은 점심시간까지 모든 자투리 시간을 영어 단어와 씨름했다. 그렇게 두 달간 바짝 매달린 끝에 간신히 커트라인을 넘기는 토플 점수가 나오자마자 GRE공부를 병행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었다.


GRE를 시작하자 시간은 더욱 부족했다. 무지막지하게 두꺼운 단어집은 생전 처음 보는 단어들로 가득했고, 어떻게 발음해야 할지 더듬더듬 읽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단어들이 내 인생에 정말 필요할까 하는 실존적 고민과 함께. 단어를 외우고 또 외웠다. 잠자는 시간은 새벽 3시로 늦춰졌다. 지옥 같은 알람소리에 간신히 몸을 일으켜 늘 몽롱하게 출근하러 집을 나섰고, 회사 셔틀은 어김없이 6시 50분에 출발했다. 눈 속은 모래알이 굴러다니는 듯했고, 말 그대로 영혼을 갈아 넣는 나날들이었다.


야심 차게 독립하겠다고 집을 나왔는데, 내 방은 잠만 자고 공부만 하는 답답한 고시원이나 다름없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사람을 좋아하던 내가,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약속도 단 한 개도 잡지 않았다.



영혼을 갈아 넣은 시간들과 나를 찾아가는 여정


혼자서는 버거웠던 GRE 단어와의 싸움에서 함께할 사람들을 찾기 위해 이 때도 스터디를 했는데, 여기서 귀인을 한 명 더 만나게 된다. 함께 공부하던 스터디원 중, 존스 홉킨스 박사 과정 경험이 있는 친구가 있었다. 유학 준비 경험이 풍부했던 그는 SOP 작성법부터 추천서 받는 요령까지, 애플리케이션 전반에 걸쳐 무지했던 나에게 아낌없는 조언과 도움을 주었다. 그는 경험이 엄청나게 많았고 그것들을 스터디원들에게 아낌없이 베풀었다. 그의 존재는 막막했던 준비 과정에 한 줄기 빛과 같았다.


본격적인 서류 준비, 특히 SOP와 Personal Statement 작성은 나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글을 쓰면서야 비로소 내가 왜 공부를 더 하고 싶은지, 가서 어떤 것을 배우고 싶은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동안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다, 머릿속에서는 끊임없이 생각을 해왔다. 정리가 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 떠다니는 생각들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바로 SOP였다. 아무리 잘 쓴 글을 읽어보아도 답은 거기에 없었다. 나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아내야 했다. 그것을 찾기 위해서 차분히 앉아서 내가 왜 공부를 다시 하고 싶은지, 미국에 가서 무엇을 공부하고 싶은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무슨 일을 하고 싶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 대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하고 깊이 들여다보았다.


나에 대해서 알아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고 까마득한 일이었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10년 뒤 나는 무엇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내가 동경했던 것은 단순히 디자인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떤 공간을 어떤 의도로 만들어낼지 방향을 잡는 일이라는 깨달음이 찾아왔다. 현장에서 성취감도 컸지만, 늘 프로젝트의 가장 끝단에서 참여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다. 설계변경을 통해서 내가 뜻하는 바를 넣을 수는 있지만, 큰 틀은 훨씬 이전에 디자인 단계에서 이루어진다. 어떠한 사이트에 대해서 내 분석과 의도를 넣고 큰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기획자’였다. 그제야 흩어져 있던 생각의 조각들이 하나의 그림으로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나의 이야기를 글에 녹여내었고, 마침내 어느 정도 만족하는 글을 완성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과정은 내 인생의 방향에 대해서도 조금은 더 자리가 잡히게 도와주는 듯했다.


턱걸이로 간신히 맞춘 토플 점수, 두 번의 시험만에 완성한 GRE 점수,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 SOP.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었지만, 그렇게 하나하나 필요한 조각들이 맞춰져 나가는 듯했다.


남은 것은 포트폴리오와 추천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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