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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츄츄 Apr 24. 2024

스스로를 객체로 전락시키는 사랑의 힘

빛나는 너의 곁에 빛을 잃는 나

두 번의 사건이 있었다.

지나버린 그 일들을 다시 말로 풀어내는 게 벅차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 작업을 하지 않으면 잊힐 것이고 또다시 발전이 없을 테니 힘을 내야 한다.


그와 연락이 잘 되지 않았다. 그는 항상 바쁘고 나는 너무나 한가하다. 이 간극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마주하자면 바쁜 그에게 얘기할 만한 나의 일상이 빈약하고 보잘것없어 그의 나를 향한 관심과 질문에 할 말을 잃었다.


“자기는 오늘 하루는 스케줄이 어떻게 돼?”

“베이비 오늘 하루는 어땠어?”


별 다른 계획 없는 나는 말을 돌리거나 그냥 그랬어. 하거나 침묵했고 마음이 불편해져서 끊으려고 했다.

사실은 시시콜콜하게 다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나는 주저하고 어버버 하다가 입을 다물어버린다. 당연히 대화가 안 되고 뜸해질 수밖에. 내 탓을 하겠다는 건 아니고, 이게 극복될 수 있는 문제이기를 바라며 빨리 해결하고 싶은 마음으로 내가 말하지 않은 많은 나날 중에 하루를 골랐다. 다음에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하며. 지나버린 그의 질문에 답하는, 그에게는 보내지 않을 편지를 썼다.




나는 오늘 도서관에 가서 우연히 갈라테이아라는 소설을 읽었는데 완전히 빠져서 메들린 밀러의 모든 저서를 빌려왔어. 작가는 그리스로마신화 같은 고전을 각색하는 작업을 주로 해. 그런 고전에서 대부분 주체이기보다 객체였던 여성의 입장에서 전개되는데 읽고 있으면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야. 작가가 사랑에 대해 말하는 문장들이 특히나 아름다워. 그리고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영웅에 대해서 말하는 작가의 시선이 흥미로웠어. 아킬레우스나 오디세우스 같은 영웅들은 결국 끝이 좋지 않았는데 평온하고 조용한 별 볼 일 없는 삶과 후대에 이름을 남기는 영웅의 길중에 그 남자 두 명 모두 영웅의 길을 선택했거든. 영웅의 삶이란 옆에 있는 사람을 외롭게 만들더라. 나의 명성에 몰두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타인을 위한 마음보다는 자신을 생각하는 마음이 클 수밖에 없어. 자기 자신이 일 순위인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란 기다리고 체념하는 일에 가까워.


파트로클로스를 사랑한다면서도 전쟁에 나가 결국  그를 잃고 자신도 죽을 수밖에 없는 영웅의 삶을 선택한 아킬레우스나

십 년이 넘는 시간을 전쟁에서 바다 위에서 보내며 자신의 아내를 그리워하지만 결국 돌아가서는 아내의 옆에서 안온한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의 명성이 잊힐까 전전긍긍하며 난폭해지는 오디세우스는 정말 바보같아보였어. 어리석고 추해보이기까지 해. 그가 전쟁에 나가면 죽게 될 걸 알면서도 그 시간이라도 함께하고 싶어서 그의 옆을 지키는 파트로클로스나 그 긴 시간 동안 홀로 아들을 키우고 수많은 구혼자들을 마다하며 기다린 페넬로페의 입장에서 쓰인 문장들이 너무 쓸쓸했거든. 나도 후대에 이름을 남길만한 중요한 업적을 가지고 싶은 그런 욕망이 있고 그걸 이해해. 그럴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을 보면 그게 얼마나 빛나고 매력적으로 보이는지도 알고 있고.


그래서 소설 ‘키르케’의 끝자락에 오디세우스의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이으라는 여신 아테네의 제안을 거절하고 평범한 삶을 선택했을 때 많이 놀라고 감탄했던 거 같아.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뽐내는 데 관심이 없다며 자신은 아버지의 삶을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그한테서는 다른 인물들과 차원이 다른 단단함이 느껴졌어. 소설 마지막에 이르러 최초의 마녀로 영겁의 삶을 살았던 여신인 키르케는 자신의 모든 힘을 모아 인간이 되는 데 사용하는데 나는 키르케가 이런 결정을 내릴 때 그의 존재가 큰 이유였을 거라고 생각해. 두려워하는 그녀 옆에 그가 있어줬고 예지능력으로 미리 본 그들이 함께하는 미래가 그녀 자신이 원하는 유일한 거였으니까.


너는 어제 너의 인생의 목표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사업가로서 너의 이름을 남기고 싶다고 이야기하더라. 그 말을 듣는데 이 소설들을 읽으면서 내가 했던 생각들이 떠올랐어. 너는 항상 에너지가 넘치고 가만히 있는 걸 지루해하고 그런 너를 옆에서 보고 있을 때 내가 초초했던 내가 기억났어. 왜 그때 네가 갑자기 우리 집에 찾아왔을 때 있잖아. 전화해서 이십 분 뒤에 도착이라고 했던 날. 나 그날 정말 행복했는데 또 엄청 속상했다. 너가 옆에 있어서 나는 너무 들뜨고 좋기만 한데 너가 우리 집을 막 서성이면서 혼자 춤추다가 침대에 다시 드러눕다가 지루해하는데 어떻게 널 재밌게 해줘야 하는지 모르겠었어.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빨리 집에 가라고 했던 거야. 피곤할 텐데 빨리 가서 쉬라고. 두 시간 운전해서 온 너는 두 시간정도 있다가 갔지. 너를 대하는 내 태도는 거기서 나와. 너가 주체고 나는 객체가 되는 거 같아. 함께 있어서 나는 그걸로 좋지만 너는 그 이상을 원하는 거 같아서 나는 널 어떻게 만족시켜야 할지 모르겠는 마음으로 불안해.


나는 너한테서 뭘 보고 있는 걸까. 어제 솔직하게 너가 어렵다고 털어놓은 나한테 너는 ‘나는 그렇게나 대단하지 않다’는 말을 했었지. 너를 좋아하는 내 마음이 너를 자꾸만 크게 만들고 나는 불안하고 이런 게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이라면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해. 마침내 너가 나를 거부할까 봐 두려워. 그전에 내가 먼저 놔버리고 싶어. 이런 글을 쓰는 게 어쩌면 나한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 너가 읽어줬으면 좋겠어. 이런 글을 읽지 않아도 너가 나를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럴 일은 없겠지.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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