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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츄츄 Mar 25. 2024

누구나 자기들 만남을 운명이라 믿어

30살 먹은 지독한 회피형의 연애시작

4년 만이다. 그리고 이 연애는 시작한 지 겨우 8일 됐다. 하루종일 그에 대한 생각을 하며 말할 수 없이 행복하지만 나는 그와 헤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머릿속에서 그가 했던 말, 행동, 표정과 말투를 반복재생하며 웃고 의심하고 감동받고 또 서운한 나 자신이 싫어져버린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알게 된 지 겨우 10 일남짓 된 사람을 그렇게 믿을 건 또 뭐고, 그렇게 불신할 건 또 뭔가 싶은 생각도 든다.


'호감을 가지고 알아가고 있는 단계'


말이 쉽지! 내 상상 속에선 벌써 그와 나는 결혼도 했고 애도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다.  


우리는 서로 첫눈에 반했다. 과장을 보태자면 운명 같이 만났다. 이제 서른이 된 이 나이에!



얼마 전 새벽이었다. 친구와 연애남매 1회를 같이 보고 설렘과 도파민에 절여진 체 자려고 누웠는데 문득 내가 4년씩이나 연애를 못하고 있다는 걸 자각했고 화가 났다. 그리고 또 문득 얼마 전 결혼한 지인이 해준 어플을 통해 남편을 만났다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생각났다.


타인에게 내 사진을 공개하는 걸 꺼려해 카톡 프사 하나 올리지 않는 내가 어플을 설치하고 프로필을 완성하기까지 5분이 채 걸리지 않았으니, 내 기준 놀라운 추진력이었다. 사진 몇 장과 함께 올린 내 자기소개는 딱 한 줄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


'밝고 예쁘다'


저런 성의 없는 자기소개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게도 매칭이 됐다. 나는 6명 정도 되는 남자들과 대화를 시작했다. 지루한 일상에 연락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거 자체가 삼일째까지는 재밌었던 것 같다. 잘 생긴 사람, 똑똑한 사람, 말이 잘 통하는 사람, 편안한 사람 등등 다 괜찮아 보였다. 그리고 그중 항상 꿈꿔왔던 내 이상형의 남자도 있었다. 하지만 딱 그 정도였다. 삼일이 지나니 답장하는 것도 귀찮고 만나자는 약속을 잡기는 또 부담스러웠다. 나는 허무함을 느끼며 읽씹을 했고 오래전 잡아둔 동생과의 호캉스로 부산으로 떠났다.


호텔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동생이 썸남과 잘 안 되고 있는지 우울해하길래 술이나 한잔 하러 호텔 바로 앞에 있는 바에 갔다. 입구에서부터 한 무리가 다트를 던지며 내는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안내해 주는 자리로 이동하면서 나는 다트 앞에 무리 중 유독 머리 하나가 더 있는 그 사람에 눈길이 갔다. 그러곤 자리에 앉자마자 오른쪽 얼굴을 가리며 동생에게 속닥였다.


"야... 어떡해? 저 사람 내가 어플로 연락하던 사람인 거 같아"

"뭐? 진짜? 설마. 진짜?"

"89% 확실해"


뭐 이런 대화를 나눴다. 어플을 열어 동생에게 사진을 보여줬다. 동생의 반응을 보고 나니 내 확신은 89%에서 99%가 되었다.  어떻게 이렇게 이런 곳에서 만날 수가 있을까? 어플에서 만난 내 외적 이상형 그 자체인 사람이었다. 부산에 산다는 그에게 부산 여행 계획 중이니 추천을 부탁한 나는, 얘기가 길어질 테니 전화로 하자는 그의 말에 괜히 부담스러워져 그 후로 연락을 뚝 끊었었는데 나는 그를 밤 열두 시를 삼십 분 남긴 시각, 골목 2층에 있는 작은 술집에서 만나게 됐다.


눈에 띄지 말고 조용히 한잔만 하고 나가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맥주를 주문했다. 그 후 동생의 욕 없이 들을 수 없는 쓰레기 썸남 이야기에 몰입하여 흥분한 내가 당장 끝내라는 말을 미친 듯이 반복하고 있던 때였다. 동생이 나에게 말했다.


"언니 뒤 돌지 마. 지금 그 사람이 언니 쪽 계속 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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