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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연 Feb 06. 2021

술 취한 주정뱅이  어른.

술 취한 어른 들의 모습을 보는 건 괴로운 일이었다.


어릴 때 나는 술을 먹는 어른을 이해하지 못했다. 내가 본 그들의 모습은 술에 취한 채 자신의 몸뿐만 아니라 정신을 온전히 가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고주망태가 되어 온 동네를 떠들게 하는 술꾼이 아니더라도 술에 취한 어른은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보통의 일상을 영위하는 모습과 전혀 다른 상태가 되어 자신이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유년시절부터 내가 겪어왔고 매체를 통해 간접적으로 본 어른들은 술만 마시면 자신을 잃어버리곤 했다.



고 작은 실수를 반복하고 때때로 돌이킬 수 없어 가까운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지키지 못한다는 점에서 스스로에게 가장 큰 상처가 될 텐데도 도대체 술을 왜 마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단지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해하고 싶지 않았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술에 취한다는 것 그자체가 자신에 대한 배반이라고 믿었다.


성인이 되었지만 여전히 술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


법률상 성인이 되었을 때 술을 먹고 싶지 않았다. 성인이 되었다는 것에 크게 의미 부여하지 않았고 스스로 체감도 하지 못했다. 미성년자 시절 모범적으로 살았다고 자부하지는 못하지만 금지사항을 어기지 않은 사람으로서 술에 대한 호기심은 일절 없었다. 담배도 마찬가지였다. 가끔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과실주를 조금 마시거나 맥주에 한 모금 훌쩍 거리는 게 전부였다.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으면서도 정작 술에 대한 애정도 못 느낀 채 술에 취한 손님을 싫어할 수밖에 없었다.




막상 먹어보니 맛도 없는데 심지어 숙취가 따르는 것을 왜 먹어야 하는지 더 이해할 수 없었다. 싫어하는 마음이 증폭된 것은 아니었지만 좋아하지 못하는 이유는 충분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거창하지 않은 작은 믿음이 있었다. 술에 취한 채 자신을 잃어버리는 어른은 나와 다른 세계에 있다고. 술에 취한 몸이 온갖 실수를 저질러 흑역사를 생성하는 건 나의 것이 아니라는 얄팍한 믿음이 내게는 있었다.


어떤 것도 함부로 자부할 수는 없었다.


그것 자체가 나의 흑역사적인 믿음이었다. 시간이 흐른 뒤 술에 한껏 절어 몸을 가누지 못하고 다음날까지 숙취에 시달린 적이 있었다. 숙취에 깨자마자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인해 연속으로 폭음을 달리기도 했다. 그 시기 나는 일주일에 여섯 번 술을 찾았다. 같이 먹을 사람이 없다면 혼자라도 술을 마셨다. 장소는 술집, 고기집, 편의점이었고 어디든 가리지 않았다. 내가 스스로 불안하고 힘들다는 이유로 술에 의존했고, 술이 아니면 안 되었던 시기가 분명 있었다.



폭음을 하고 나서야 절제하는 법을 깨닫는 아이러니.


그때 나는 술 없이 어떻게 살았을까 라는 가당치도 않은 생각을 떠올렸다. 간헐적으로 마시는 술은 재미없었다. 취기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술자리를 오래 즐기면서 술에 취하게 되자 신세계가 열렸다. 평소의 나라면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열기와 흥분이 느껴졌고 기분이 들뜨기 시작했다.



차마 말할 수 없던 말들까지 떠들면서 ‘아 이래서 술이 좋구나’와 ‘아 이래서 술은 안 돼’를 동시에 느끼게 되었다. 나는 유년시절 이해하지 못하는 ‘술에 취한 어른’과 다르지 않았다. 내가 술인지 술이 나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제정신이 아니었고 주변 사람들과 나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었다. 절제하지 못한 채 그건 폭음 자체였기 때문이다.


술이 없어도 일상을 살아갈 수 있다.


이제 나는 술고래에서 벗어났다. 술이 없더라도 일상을 살아갈 수 있다. 술을 마셔도 달라질 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술은 괴로움을 잊게 해주고 기분을 들뜨게 해준다는 점에서 때로 사람보다 낫다. 하지만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다. 나의 술버릇은 술에 취하면 핸드폰을 찾아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할 말은 많지만 차마 창피해서 적지 못할 만큼 흑역사를 만들었다. 사실상 술을 먹는 게 처음이었고 어떻게 해야 하는 지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급처방으로 모든 전화번호를 지운 채 일절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술안주를 포장하고 막걸리를 마신다.


‘술 마실래?’ 라고 묻는다면 웬만하면 거절하지 않는다. 술 맛을 느낀 나로서 소맥이 제일 좋고 다음으로 소주가 제일 좋다. 막걸리, 칵테일, 위스키, 와인을 마셔보았지만 소맥만큼 가성비 좋은 서민의 술은 어디에도 없다. ‘가볍게 맥주 마셔요’ 라는 제안을 받으면 ‘배만 부를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내가 술을 마시는 건 취하고 싶어서이다. 다만 지금은 소위 말하는 ‘맛 갔네’라는 상태가 되도록 술을 마시지 않는다. 술을 마시더라도 누구에게나 연락하며 주정부리지 않는다. 혼자 취한 채 괴로움을 떠안는 법을 체득했기 때문이다.


맛있는 오징어눈 안주와 막걸리 사이다


술에 취한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술에 취해 주정뱅이가 되곤 했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도 있었다. 법에 저촉된 적이 없다는 점에서 다행이라고 말해야할지 모르겠다. 이제 나는 술에 취해도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술에 취하고 싶은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친구도 지인도 별로 없어 술자리를 만들지는 못하고 혼술을 먹는다. 그 무엇으로 채울 수 없는 것을 술이라고 채워줄 수는 없지만 그렇게라도 술이 필요한 때가 있다. 어느 때 술은 대체할 수 없는 그것이 된다. 바로 지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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