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예정된 이별인데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다.
살아오면서 가장 정성을 쏟은 대상이 녀석인데 그런 존재가 조금씩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단단히 마음먹는다 해도 금세 우울해지는 일이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 세상에 태어난 존재라면 누구나 겪는 예정된 이별인데 왜 이리 힘든지 모르겠다. 아니, 머리로 안다해도 현실로 직접 맞딱뜨리기 전까지는 이 끝없는 먹먹함을 알 수 없다 생각하게 됐다.
요즘 심히 고통스럽다 보니 내가 과연 주변 사람들의 고통을 어떻게 대했는가 뒤돌아보게 된다. 타인의 고통에, 그가 처한 상황에 대해 섣불리 '안다' 또는 '알 것 같다'고 말한 것이 얼마나 오만한 일이었는지 생각해 본다. 누군가 겪는 그 고통과 상황은 온전히 그만의 것이다. 결코 나는 그가 될 수 없기에 그 고통을 알 수도 느낄 수도 없다. 그저 어렴풋이 가늠할 뿐.
그러나 그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저 그 시간을 묵묵히 지나올 수 있도록 가끔씩 마음을 환기시켜주는 것이 전부가 아닐까. 예를들어 평소 좋아하는 음식을 함께 먹으며 잠시나마 시선을 돌릴 이야기로 수다를 떠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의 고통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슬픔과 기쁨이 잘 희석되도록 도와주는 것, 그게 가장 좋다고 느낀다.
음, 근데 이렇게 내가 고통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죽음과 맞짱 뜨고 있는 녀석을 보면 사치 같기만 하다. 녀석에게 백 년 만 년 살아달라고 장난스럽게 노래를 불렀던 탓일까. 녀석이 나보다 먼저 떠난다는 것을 망각하며 살아왔다. 문을 열면 번쩍 고개 들어 큰 눈을 껌뻑이며 쳐다보는 녀석이 없는 집이라니. 전혀 떠올릴 수 없는데, 신은 참 무정하다. 근데 나는 배알도 없다. 무정하다 원망하는 그 신에게 나는 요즘 두 손 모아 싹싹 빌고 있다.
"이 녀석을 나중에 다시 만날 수 있는 거지요?"
(손 싹싹)
"무지개다리 건너면 천국에서 다시 만나는 거지요?"
(손 싹싹)
여기까지는 들어주시리라는 확신이 서는데,
문제는 따로 있다.
"근데, 제가, 천국에 못 가면... 어쩌죠...?"
(고개가 푹 숙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