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읽은 책에서 찾은 마법 같은 확신
결혼기념일이 바짝 다가올수록 평정심을 잡기 힘들다. 잃어버린 1년 아니 지난 4년 그리고 앞으로 이혼이 마무리될 때까지 얼마나 더 숱한 시간을 허비하게 될까. 글을 쓰는 이 순간이 너무 힘들어도 지금 밖에서 불어오는 봄바람은 기분이 좋아서 다행이다.
어쩌면 그건 지금 불어오는 바람이 내가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탄생한 인연으로부터 출발한 작은 날갯짓처럼 느껴져서 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 바람이 내 마음에 닿아 나를 달래주듯 받아들여져서일지도 모른다. 오늘은 날이 좋아서 한강에 가서 구독자 한 분께서 댓글로 추천해 주신 책을 읽었다. 늦잠을 잔 친구가 약속 시간에 늦어 서문을 읽을 짬이 생겼다. 제목은 정혜윤 작가의 삶의 발명.
몇 해 전 전자책을 구비한 뒤로는 종이책을 사서 읽은 적이 거의 없다. 기기값을 뽕 뽑으려고 주로 전자책으로 많이 읽었다. 하지만 종이책과 다시 친해진 건 결혼식 이후였다. 결혼식이라는 사건이 터진 뒤에는 뭐라도 해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마다 도서관에 자주 갔다. 도서관에서는 주로 정신건강의학서나 심리학에 대한 책을 탐독했다. 도서관에 가면 매번 최대 대출 권수인 6권씩을 꽉꽉 채워서 빌렸다. 남편을 어떻게든 책으로라도 이해해 보려고 하루에 두 권씩 읽기도 했다. 내가 처한 상황을 납득시키기 위해 스스로 애썼다.
감정을 억누른 채 텍스트로 도망갔다. 글자와 글자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에 가끔 터져 나오는 눈물을 숨겨놓기도 했다. 다시 회사에 다닌 뒤로는 경영 서적만 읽느라 정신이 없었다. 감정을 더 제거하고 차가운 이성으로 내 마음을 무시했다. 워커홀릭을 자처하며 공부해야 될 업무 관련 책들이 책상에 4권이나 쌓여있는 상태였다.
그런데 책을 잘 안 사는 나로서는 이상하게 그분의 댓글을 보자마자 아무 생각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주문을 해버렸다. 손가락 끝이 미끄러져 장바구니를 건너뛰고 바로 구매 버튼을 눌렀다. 내게 종이책을 산다는 일은 한 번 읽어본 책 중에 소장하고 싶은 것만 골라내는 합리적 행위이자 사회생활을 하며 지친 마음을 위로받기 위한 주술적 행위(주로 시집)이었기 때문에 무슨 마음으로 처음 듣는 작가의 내용도 모르는 책을 덥석 구매했는지 모르겠다.
내가 무엇을 누리든 그것은 한순간에 사라질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되었다. 많은 것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가 나에게 또 한 번 주어졌다. 살아남는 것이 중요한가, 변화하는 것이 중요한가. 나를 통해 묻는 사건이 일어난 것만 같다. 경이롭게 재생할 수 있다면 나를 위해 슬퍼해준 분들에게 은혜를 갚는 일이 될 것이다.
(중략)
나에게 삶은 좋은 이야기를 찾는 과정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마음으로 언제나 불러낼 수 있는 이야기들은 에너지로 변해 나를 내 자아 바깥으로 끌고 나오고 움직이고 살아 있게 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의 많은 에너지는 이야기가 변신한 것이나 다름없다. 영향을 받는 이야기, 의미를 두는 이야기가 바뀌면 에너지의 방향이 바뀌고 에너지의 방향이 바뀌면 삶의 방향도 바뀐다. 창조성은 다른 것이 아니라 뭔가에 의미를 둘 줄 안다는 뜻이니까. 지금 살고 있는 삶에 '더 나은', '더 좋은', '더 새로운'이라는 단어만 넣으면 삶은 갑자기 도전할 가치가 있는 모험으로 변한다.
서문 중 일부
그렇다면 결혼기념일을 앞두고 이 책은 우연히 나를 찾아온 게 아닐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나는 마음속에 여전히 사랑을 품고 있다고 희망을 노래하고 싶다. 2000년 된 대추야자 씨앗이 오랫동안 땅속에서 잠자다가 지금 시대에 와서 발견되어 나무로 자랐듯이 내 사랑이 씨앗이라면 잠깐 휴면기를 갖고 있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나는 세상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본 것에 후회 없다. 냉소와 혐오로 점철된 홍길동보다 그래도 다정하고 친절한 내가 훨씬 사랑스럽다. 그러니 보란 듯이 나는 다시 사랑을 싹 틔울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어떤 이야기의 일부가 되겠습니까'라는 책의 문장이 내게 설렘을 가져다주었다. 서문만으로도 소장하고 싶은 책이다. 나답지 않게 충동구매한 책이었지만 모처럼 마음에 완벽한 서문을 읽어서 용기를 얻은 일요일이다. 다가올 결혼기념일에는 당연히 공허할 것이고 비참할 것이다. 공황발작이 올 수도 있지만 내게는 약도 있고 책도 있다. 그날 혼자 있지 말고 만나자는 친구들도 두 명이나 있다. 그래도 이렇게 지리멸렬한 순간들에도 나는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 글을 통해 지나 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