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권리
외출 전 향수를 뿌리고 서둘러 길을 나섰다. 작년 5월 1일의 날씨가 생생히 기억난다. 딱 오늘 같은 날씨였다. 날씨 앱을 확인하지 않더라도 머리카락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 끝자락이 상쾌하다. 방금 전에 뿌린 향수가 코끝을 가볍게 건든다. 깊은 숲 속 오래된 목재 건물의 향기 또는 두꺼운 가죽 커버의 다이어리를 넘길 때 손에 묻어나는 향기와도 같다. 이 향이 오늘의 바람 냄새와 뒤섞여 나를 한순간에 작년 오늘로 데려가는 것 같다.
결혼 전에 꽤 많은 향수를 소유했지만 그것들은 작년 여름 해외 어딘가에서 통째로 사라졌다. 그가 말도 없이 제멋대로 자기 부모님 댁에 버리고 간 내 짐들에는 정작 중요한 것들이 하나도 없었다. 향수뿐만 아니라 내 인생이 담긴 책들, 아빠가 결혼 선물로 사준 커피머신, 내 돈 주고 산 비싼 오디오, 외할머니에게 물려받은 빈티지 가구부터 엄마가 혼수로 마련해 준 그릇들. 물론 그것들을 핸드캐리해서 일일이 가져올 순 없었을 거라는 상황은 이해된다. 하지만 내게 일말의 연락도 없이 제멋대로 내 물건에 함부로 손대고 나머지 물건들의 행방은 여태껏 알 수 없으니 나는 이 부분에 대해선 내 인생을 도둑질당한 것이나 다름없다.
향수를 모으는 취미는 없었지만 그래도 소유했던 향수가 대충 가늠해 봐도 15개 정도는 됐으니 모은 거라고 할 수 있나? 선물 받은 것들도 더러 있지만 대부분 출국길에 면세점에서 구매한, 그래서 각각 여행지의 추억이 담겨 있는 소중한 기억들이다. 아니면 회사에서 얻어터지고 기분 더러운 날 향기 테라피를 하겠다며 충동 구매한 향수도 몇 개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 수중에는 단 한 개의 향수만 있다. 공교롭게도 동생이 결혼 선물로 준 향수다. 나머지 향수들은 컨테이너로 해외 이삿짐을 보낼 때 포장되어 내 손을 떠났다. 작년 결혼식이 끝난 다음날 동생은 내게 결혼 선물이라며 조용히 쇼핑백을 건넸다.
“언니 결혼 축하해, 형부랑 같이 쓰라고 일부러 제일 큰 사이즈로 샀어. 언니 절 냄새 좋아하잖아.”
예전부터 갖고 싶어 했던 르라보의 상탈 33. 꽃이나 과일 향기도 아니고 이국적인 어느 외국 사찰 같기도 하고 오래된 헌책방의 냄새 같기도 하다. 르라보는 향수병에 제조 날짜와 가게, 메시지를 넣어주는 커스터마이징 해준다. 동생은 병에 다음과 같은 문구를 새겨 넣었다.
For Yeonju, wish you happiness
좋은 향기처럼 결혼에 행복한 추억을 가득 채우길 바라던 동생의 마음. 그 마음은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았다. 그리고 나도 변하지 않았다. 대신 저 문장에서 결혼이라는 단어만 조용히 지우면 된다. 좋은 향기처럼 행복한 추억을 가득 채우면 되니깐.
나는 동생이 선물해 준 향수를 당당히 뿌리고 -사건이 터지고 향수를 처음 뿌렸다- 청담동으로 향했다. 오롯이 나를 위해 헤어 메이크업을 받았다. 친구의 제안으로 메이크업 모델이 될 기회가 생겼다. 결혼식 말고는 두 번 다시 청담동에서 메이크업받을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역시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다.
앞으로도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지만 그래서 인생은 재미있고 세상은 여전히 흥미진진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계속 좋은 향을 곁에 두고 좋은 음식을 먹고 좋은 촉감의 옷으로 나를 감싸며 작은 행복들을 계속 수집해야지. 마치 좋은 향기가 나를 좋은 곳으로 데려다줄 것처럼. 그럼 나중에는 향수를 뿌리지 않아도 나 자체로 충분히 향기로운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