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별이라도 하고 싶어. 제발 벗어나고 싶어.
남편과 그의 가족, 하다못해 우리 가족의 시간조차 어찌어찌 앞으로 흘러가는데 내 시간은 그대로다. 나를 뺀 세상 모두의 시간은 다 앞으로 가는데 나만 시간을 거스르듯이 제자리에 서서 온몸으로 중력에 대드는 기분이다.
어디 가서 말 같지도 않은 내 상황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는 이 현실도, 나 혼자서 입 꾹 다물고 숨 참으며 버티는 이 방법도 어느 것 하나 합리적인 게 없다.
멈춰버린 내 시간은 이혼 도장을 찍어야 겨우 앞으로 흘러가기 시작할 텐데. 남편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이 상황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기혼의 삶을 연기하고, 주변에서 가짜 결혼기념일을 축하받는다. 왜 나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생물학적 가임기에서 나만 계속 멀어지고 있는 이 현실을 같은 여자로서 시어머니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나는 내 예쁜 청춘, 꽃 같이 젊은 나이에 혼자 무거운 족쇄를 차고 있는 것처럼 그에게 질질 끌려가고 있다.
몇 주 전 시어머니께서 그러셨다. “길동이는 심부름 사건 때문에 이혼하는 거 아니라더라.” 걔가 말하는 이혼 사유가 그게 아니면 뭐 좀 달라지나요? 묻고 싶었지만 아무 말하지 못했다. 어차피 시어머니의 말 자체가 나한테는 두 번 돌 던지는 거라서 그냥 대화를 관뒀다.
시어머니가 무슨 의도로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는 나는 모른다. 도저히 대화 안 통하는 자기 아들이 너무 기가 막히고 답답해서 그러셨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아니면 조금이라도 아들의 심정을 이해해 보고 싶은 걸지도, 혹은 머리가 좋아서 교묘하게 상황을 조작하고 논리적으로 남 탓을 하는 아들에게 이미 설득당한 걸 수도 있다. 작년 가을 아빠가 그를 따로 만나고 왔을 때 아빠도 그랬다. “논리적으로 아주 구체적으로 완벽하게 너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놨더라. 이 상황을 모르는 사람이면 당연히 길동이 말만 믿을 정도로.”
벗어나고 싶다. 제발 살고 싶다. “저 이혼했어요!”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남편은 외국에 있고 저 혼자 일 때문에 돌아왔어요.”라고 말하고 뒤에서 독한 년 소리 듣는 게 이제는 몹시 지겹다. 사실 하나도 안 독하고 물러터진 애라서 이런 남자랑 엮인 걸 텐데. 내가 조금이라도 이기적이었으면 나았으려나. 독한 년 코스프레를 억지로 하다 보니깐 이제 원래 내가 누구였는지 자꾸 까먹게 된다.
일이 길어질수록 늘어진 테이프처럼 나만 계속 고장 나고 있다. 그냥 내가 혀 깨물고 죽고 싶다. 이깟 글 매일 쓰는 게 다 무슨 소용인지 모르겠다. 매일 롤러코스터 타는 심정으로 혼자 애쓰는데 정작 지는 남탓하면서 쏙 빠져있으니 그를 죽여버리는 게 맞는데 이제는 다 관두고 차라리 내가 죽고 싶다. 그러면 솔직히 그들도 편하겠지. 내가 심약한 탓이라며 단단하지 못한 나를 꾸짖으면 그만이니깐.
내가 오늘 왜 이렇게 발작 버튼이 눌렸나 잠시 정신줄을 잡고 곰곰이 생각해 봤다. 이유는 단 하나다. 5월에는 트라우마로 남아버린 결혼기념일이 있다. 5월은 가정의 달이지만 내 가정에는 나 혼자다. 세상은 2024년이지만 나는 그대로 2023년 5월에 머물러 있으니 미친년이 될 수밖에. 빨리 이 엿같은 5월이 끝나면 좋겠다. 공황장애 약을 먹는 날이 다시 늘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