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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라는 남편

오베라는 남자 또는 오토라는 남자, 그리고 내 남편에 대하여

by 은연주

남편은 결혼식 직후에 출근 때문에 먼저 출국을 했다. 나는 며칠 더 한국에 남아 주변 친구들에게 결혼식 감사, 작별 인사, 반려견 해외 수속 등 남은 일정들을 소화한 뒤에 따로 출국했다. 남편은 고작 며칠 차이 안 나는데도 내게 보고 싶으니 빨리 오라며 평소엔 안 하던 애정 표현을 했다. 아니 연애 때는 애정표현 같은 건 영 어색하다고 안 하더니 결혼했다고 잘해주는 건가? 어색한 나머지 "뭐야 하던 대로 해"라고 말했지만 내심 싫지 않았다. 그래도 결혼식도 올리고 정말 가족이 됐다고 생각해서 더 잘해주나 보다 했다.




그리고 내가 출국한 지 보름도 안 됐을 때, 우리는 다시 가족 일정 때문에 2박 3일 간 잠깐 한국에 들어올 일이 있었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가족 식사도 하고 혼인신고도 하고 친구 결혼식도 참석하고 후다닥 다시 출국하는 일정이었다. 비행기에 타고 각자 영화를 봤다. 나는 자백이라는 한국 영화를 보고 있었는데 남편이 갑자기 알짱거리며 내 손을 만지작, 머리를 쓰담쓰담했다. 헤드폰을 벗고 물었다. "왜?"


"아니 그냥. 영화 뭐 봐?"


"자백. 이거 범죄 추리물 그런 거야. 은근히 재밌어. 오빤 뭐 봤어?"


이상하다. 기내 조명이 꺼져 있어서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바짝 옆에 붙은 남편의 얼굴이 희미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눈동자는 촉촉했다.


"나 너무 슬픈 영화 봤어. 너도 이거 꼭 봐봐. 여기 나오는 남자 나 같아. 내 얘기 같아 이거"


"오빠 울어? 뭔데? 근데 진짜 우는 거 아니지?"


"오토라는 남자. 꼭 봐봐. 톰 행크스 나오는 거야. 자기 와이프가 먼저 죽고 난 뒤의 얘긴데, 나도 나중에 만약 너 먼저 죽으면 어떡하지 그런 생각 들더라. 와이프는 좀 너 같아. 내 얘기 같았어"


울기 직전인 사람한테 "너 울어?" 물어보면 "아니"라고 대답하는 동시에 눈물 줄줄 흘리는 효과처럼 남편은 결국 눈물을 보였다.


"근데 왜 우는데? 아니 오빠가 영화를 보고 우는 사람이었어? 헐"


3년간 만난 남편은 감정 표현이 극도로 서툴고, 본인 감정조차 잘 처리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오빠는 로봇이라고, AI라고. 가끔은 챗GPT가 차라리 오빠보다 더 공감능력 좋고 다정하겠다고 놀렸다. 남편이 우는 모습을 종종 본 적 있지만 프러포즈, 결혼식, 그리고 본인이 너무 힘들 때였다.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울 수 있는 사람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런 남편을 울린 영화라니. 그리고 남편 같은 사람이라니. 영화가 궁금해져서 보던 영화를 마치고 오토라는 남자를 보기 시작했다.




영화 시작부터 오토(톰 행크스)는 너무나도 내 남편 같았다.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럴 수도 있지’ 같은 태도가 절대 용납이 안 되는 사람. 매사에 불평불만이 많아 보이는데, 사실 그게 세상과 타협이 되지 않아서 그렇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결국 다 외로움이 기저에 깔려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화 속 오토는 그야말로 괴팍하게 늙은 꼬장꼬장한 노인네인데, 내 남편의 미래처럼 보였다. 영화 줄거리는 아내를 잃은 오토가 실의에 빠져 삶을 포기하려고 할 때마다 오지랖 넘치는 따뜻한 이웃들에 의해 실패하고, 결국엔 이웃들과 함께 더불어 살다가 편안하게 생을 마감했다는 훈훈한 이야기. 남편이 왜 오토가 자기 같다고 말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오토의 죽은 아내나 이웃집 여자는 왠지 나와 비슷해 보였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든 생각은 그게 전부였다. '와 진짜 내 남편이랑 똑같네'

옆에 잠든 남편을 깨워서 귓속말을 했다. "일어나 봐 오빠. 오빠 이제 영어 이름 오토라고 하자" 비행기가 도착할 때까지 나는 계속 남편에게 오토라고 불렀다. 공항에서도,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면서도 계속 남편을 놀렸다. "오토씨 내 짐 좀 들어줘", "와 비행기 연착돼서 시간 너무 늦었네. 오토 오빠 내일 바로 출근해서 힘들겠다. 오전에 반차 쓰면 안 돼?"




다음날 아침, 남편은 내가 시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시동생의 짐을 배달했다는 사실을 알고 화가 났다. 내게 이혼을 요구했다. 자기는 원래 한 번 결심한 건 죽어도 안 바꾼다고, 오토도 그러지 않냐면서 자기도 오토 같은 사람이라고, 본인을 영화 속 오토에 비유하면서까지 이혼을 입에 올렸다. 시부모님이 급히 한국에서 들어오셨을 때, 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을 현장감 있게 설명하기 위해 자초지종을 다 말씀드렸다. 그리고 비행기에서 남편이 <오토라는 남자> 영화를 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영화처럼 내가 나중에 먼저 죽으면 얼마나 그리울지 상상이라도 한 듯 다정하게 나를 바라봤는지 설명했다. 속된 말로 남편의 그런 '멜로눈깔'은 결혼식날보다 더 진지했다.


시부모님은 남편이 본인 같다며 보고 울었다는 그 영화를 궁금해하셨다. 그때는 그게 넷플릭스에 없어서 내가 결제해서 보여드렸다. 시어머니도 영화를 보시더니 '완전 내 아들이네'라고 하셨다.




계속 시간은 흘렀고, 나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 아픈 남편인지 미친 남편인지 악한 남편인지 어쩌면 셋 다일지도. 그렇게 남편에게 유기당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겉으로는 멀쩡하게 밥도 잘 먹었고, 정신과 약을 먹고 있으니 잠도 그럭저럭 잤다. 겉으로 보기에 살이 그렇게 폭삭 빠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거울 속 내 눈동자는 슬픔에 잠겼고, 행복이나 희망 같은 긍정적인 단어와는 영 거리가 먼 표정이었다. 영혼이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어떻게든 그 시간을 잘 견뎌보려고 외국을 들락날락거렸고, 도움이 될 것 같은 모든 것들은 다 시도했다.


그래도 나아지지 않았다. 시간은 고작 6개월밖에 흐르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괜찮아진 거라곤 시도 때도 나오던 눈물이 덜하다는 것. 그래서 하는 수 없이 받아들였다. 나는 남편에 의해 유기되었구나. 결혼 보름 만에. 혼인신고 하루 만에. 내 상처를 자가치료하는 방법은 몰랐지만 곪게 내버려 두지 않기 위해 현실을 인정했다.




야근을 하고 집에 와서 어색하게 TV 앞에 자리에 잡았다. 낯선 동네, 낯선 집. 아직도 소파와 식탁을 사지 못했다. 당근으로 산 TV라도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새 집은 너무 적막하고 외롭다. TV 소리 벗 삼아 잠들 때까지만 시간을 버텨볼까, 넷플릭스에 오토라는 남자가 올라왔네. 별생각 없이 재생을 눌렀다. 본 영화를 또 보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서 괜찮았다. 어차피 내게 필요한 건 적당한 소음, 사람의 소리, 가짜여도 좋으니 온기 비슷한 것뿐이라서.


같은 영화를 두 번째 보니깐 처음에는 안 보였던 것들이 많이 보였다. 처음에는 오토가 남편이랑 비슷하다는 것만 보였다. 그런데 다시 보니 오토의 행동들이 아스퍼거 같았다. 고기능 자폐 스펙트럼 같아 보였다. 기억해 두려고 영화를 보면서 메모하기 시작했다. 우선 하나씩 퍼즐을 맞춰나가듯 어지러운 머리를 정리하고 싶었다.




1. (현재) 오토 성격 매우 꼬장꼬장하고 타협 안되고 융통성 없음. 사회적으로 상호작용 안되니깐 신경 과민해서 짜증 많고 성질 고약한 노인 된 걸로 보임


2. (현재) 오토 본인만의 루틴이 있고 꼭 지킴. 매일 아침마다 동네 순찰 등등. 그리고 아내 살아있을 때도 토요일 2시마다 이 카페를 꼭 왔다, 이 자리에 꼭 앉았다는 대사로 말미암아 규칙적임


3. (과거) 아내와 처음 만난 기차 장면에서 25센트 동전이 몇 년도 생산인지 보더니 1964년 산 동전은 순은이네 어쩌네 함 (남들은 신경 안 쓰는 본인만의 사소한 디테일에 집착. 덕후 기질 비슷하게)


3-1. 그 동전을 행운의 부적처럼 계속 평생 간직해 오는데, (현재) 피에로랑 싸우는 장면에서 내 25센트 내놓으라고 싸움. That quarter is not mine. It's copper, 뭐 이런 비슷한 말을 하는데 일반인의 시각에선 그게 뭐 어쩌라고..? 싶을 뿐


4. (과거) 아내와 레스토랑에서 데이트할 때 아내가 "오토씨는 좋아하는 게 뭐예요?" 묻자마자 오토 혼자 신나서 속사포처럼 기계, 자동차 등에 대해서 좔좔좔 랩 하듯이 쏟아냄 (내 남편 싱크로율 100%)


5. (과거) 아내한테 프러포즈할 때 센스, 분위기 맥락 없이 다짜고짜 프러포즈함. 상대방 감정보다 자기감정을 더 우선시 (내가 남편에게 기습 프러포즈받은 상황과 맥락이 비슷. 심지어 남편 혼자 움)


6. 과거에도 현재에도 오토는 기계 잘 고치고 거의 박사 수준임


7. 과거든 현재든 시종일관 표정이 경직되어 있고 굳어있음 (내 남편도 항상 긴장돼 있고 굳어있는 편)


8. 아내가 먼저 죽고 난 뒤에 계속 자살 시도를 한 건, 그만큼 오토의 상실감이 커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솔직히 영화를 다시 보니깐 '문제해결능력'이나 '상황대처능력'이 떨어져서 그런 행동을 하는 걸로 보임. 자기 스스로 감정을 건강하게 인지하고 소화하고 그런 게 안되다 보니깐, '에잇 죽어버릴 거야' 이렇게 극단적인 결정을 하는 걸로 보임 (그래서 마지막 자살시도에 죽은 아내의 환영이 나타나서 '그만해, 알아 화난 거.. 근데 이제 그만해, 산 사람은 살아야지' 이런 대사를 한 것 같음. 아내는 오토를 평생 배우자보단 보호자의 심정으로 이해하고 포용해 줬을 것 같음)


9. 한때 베프였던 이웃 흑인 부부와 사소한 일로 틀어진 뒤로 평생을 자기만의 기준으로 적대시함. 극단적이고 흑백논리에 가까운 이분법적 사고방식 (내 남편이 지금의 나에게 갖는 감정과 이혼을 강요하는 사유 역시 강박적이고 편집적인 면이라서 비슷하게 보임. 남편이 시동생을 싫어하는 이유 역시 비슷함)


10. 오토가 나쁜 사람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과 평범한 관계 맺는 거에 굉장히 서툶. 새로 이사 온 이웃 부부의 오지랖으로 인해서 조금씩 마음을 열고, 마을 사람들과 평화롭게 지내다가 행복하게 생을 마감하는 내용은 사실 판타지에 가까워 보임.




남편이 이 영화를 보고 운 이유가 궁금했는데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본인에 대한 병식은 없어도 평생 살아오며 느꼈을 인간관계에서의 좌절감이나 무력감, 외로움 등이 무의식 속에 쌓여있었겠지. 아무리 봐도 오토가 너무 아스퍼거 증후군 같아서 네이버에 검색해 봤다. 오토라는 남자+아스퍼거, 오토라는 남자+자폐 스펙트럼. 별 다른 결과가 나오지 않아서 아쉬웠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구글에 영어로 검색을 했다가 맙소사! 빙고.


<오토라는 남자>는 <오베라는 남자>의 스웨덴 소설, 그리고 동명의 스웨덴 영화를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한 영화다. 책은 안 읽어봤는데 이참에 책도 읽어봐야겠다. 알아서 뭐 하겠냐만은 그래도 영화랑 또 어떻게 다를지 궁금하다.




아직도 풀리지 않은 의문이 있다. 하필 남편이 비행기에서 영화 <오토라는 남자>를 보고 눈물을 흘린 날, 그래서 나도 같은 영화를 보면서 오토가 정말 내 남편이랑 비슷하다고 느낀 날. 나는 바로 하루 뒤에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이혼 통보를 받았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도 아니고, 하늘에서 내게 마치 예고편처럼 맛보기로 알려준 걸까?


6개월 뒤에 같은 영화를 다시 보니 이제야 보이는 영화 속 오토의 자폐와 강박 성향. 그저 꼼꼼하고 규칙을 잘 지키는 사람인 줄 알았던 남편. 융통성은 없어도 앞뒤 똑같아서 믿음직스러웠던 남자. 이런 유형의 성격을 가진 사람들에게 대뜸 "혹시 자폐 스펙트럼이세요?" 라고 물어볼 또라이가 세상천지 어디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도대체 이걸 어떻게 눈치챌 수 있었겠는가. 남편을 꽤 오래 본 상담선생님도 미처 몰랐던걸. 남편을 낳고 기른 시부모님도 모르셨던걸.


오토라는 남자, 그는 영화 속 캐릭터가 아니라 내 남편이었다. 오토라는 내 남편이 불쌍하다. 그리고 나는 영화 속 죽은 아내보다도 더 불운하고 불행한 사람. 그러니 남편보다 내가 더 불쌍하다. 오죽하면 죽어버린 그 여자가 퍽이나 부럽더라. 소냐는 그래도 오토한테 유기되지는 않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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