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 또는 도피
아직 인수인계도 OJT도 제대로 끝나지 않은 입사 이틀째. 야근을 했다. 지금 회사의 좋은 점은 직원 밥을 굶기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오늘 야근 조금 했다고 저녁밥 챙겨주는 게 좋았다. 자고로 머슴들 밥은 잘 챙겨주고 일 시켜야 하는데, 세상에는 이 당연한 게 아직도 당연하지 않은 회사들이 너무 많다.
예전 회사는 기업 문화나 복리후생이 다 좋은 편이었는데 정작 이상하게 직원들 점심값을 주지 않았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회사 다니면서 내 돈 내고 밥 먹는 게 이해 안 됐기 때문에 다음 회사는 기필코 밥을 챙겨주는 곳으로 가리라 다짐했다. 말이 씨가 됐는지 지금 회사는 점심과 저녁을 다 챙겨준다.
어제 못 끝낸 일들은 오늘 다 마쳤다. 점심 두 번 먹었다고 어제는 못 외웠던 팀원들 이름을 다 외웠고, 프린터 설치도 마쳤다. 그리고 회사를 공부했다. 모른다고 일단 아무나 붙잡고 물어보면 절대 안 된다는 걸 아는 시니어. 알아서 눈치껏 워크스페이스 찾아보고 DB 뒤져보며 히스토리를 따라간다. 그러면서 정리되지 않은 내용들이나 오류를 발견하면 그제야 조심히 목소리를 낸다. 그게 경력자의 생존법.
신입도 경력도 새 회사에 처음 들어온 건 마찬가지인데 신입은 밥 먹는 법, 숟가락질 젓가락질부터 다 알려준다면 경력은 어림도 없다. 냉정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그러니깐 내가 이전 경력 다 인정받고 남들보다 연봉 더 받아서 이 자리에 앉아있는 거겠지.
아무도 처음부터 끝까지 알려주지 않지만 어떻게든 1인분 몫을 해내려고 열심히 알아서 자료를 모았다. 머리가 팽글팽글 돌아가는 게 실시간으로 느껴진다. 내가 지금 극심한 충격으로 인지 기능이 손상된 사람 맞나? 치매 초기 환자들이 먹는 항우울제를 복용 중인 상태라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초인적인 힘이다. 어떻게든 살고 싶다는 의지가 이 정도라니.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이 있어서 다행이다. 잠깐 숨 쉴 수 있는 인공호흡기를 단 것만 같다. 당분간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애쓰자.